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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반인권 사라진 정토세상을 희망한다

기자명 법보
  • 사설
  • 입력 2019.05.07 16:08
  • 호수 1488
  • 댓글 0

불기 2563년 부처님오신날에 부쳐

불기 2563년 봉축 주제는 ‘세상愛 평화를! 마음愛 자비를!’이다. 자비심 충만한 정토에 평화가 꽃피워지기를 소망함이다. 고르다는 의미의 평(平)과 화합을 뜻하는 화(和)가 만나 평화(平和)를 이루었다. 평등한 세상에서 화목을 도모할 수 있고, 평온한 세상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을 ‘평화’는 전하고 있다. 노르웨이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평화의 개념을 두 개로 나눠 설파했는데 살육전쟁을 피하는 노력은 ‘소극적 평화’, 구조적 폭력에 항거하며 사라지게 하려는 노력은 ‘적극적 평화’라 규정했다. 구조적 폭력이란 불평등, 반인권 등의 사회구조 결함으로 불거지는 인간의 정신·육체적 피해를 말한다. 한자에 함축된 평화와 요한 갈퉁의 평화는 일맥상통한다.

평화를 해치는 행위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숫타니파타’가 그 실마리를 제공한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집착은 왜 시작되었는가? 세상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투쟁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가? 집착과 권력투쟁은 분에 넘치는 욕망 때문에 시작되었다.’ 세계사가 증명하듯 착취와 전쟁은 늘 ‘분에 넘치는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집단·세력에 의해 자행됐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세계 1·2차 대전과 9·11테러, 그리고 작금의 중동사태를 들여다보면 명징하게 인식할 수 있다. 

중세와 근대기를 떠올리면 가톨릭·개신교·힌두교 등 대부분의 종교들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 번도 폭력과 이교도의 탄압, 종교재판, 종교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유일한 종교는 불교”라는 야스퍼스(Jaspers)의 말을 100% 수용하기 어렵다 해도 자신의 종교우위를 위해 종교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종교는 불교가 유일하다. 인간의 마음 깊숙이 똬리 튼 욕망 덩어리를 모기가 무쇠 솥을 뚫을 듯이 철저하게 직시한 부처님, 아라한, 선지식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지혜’ 덕이다. ‘법구경’은 평화를 이루는 구체적인 방법까지도 담고 있다. ‘그는 나를 욕했고 그는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이겼고 그는 내 것을 앗아갔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미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미움은 미움으로 정복되지 않는다. 미움은 오직 자비(사랑)로 정복된다.’ 평화와 자비의 상관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낸 대목이다.

부처님께서는 브라만(수행자), 크샤트리아(귀족·전사), 바이샤(평민), 수드라(노예)라는 인도의 세습적 계급제도인 카스트(caste)를 반대하며 사성계급의 평등을 주창했다. 요한 칼퉁이 말한 평화론에 비춰보면 당시 부처님께서는 ‘적극적 평화’를 실현시키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보이신 그 의지·원력은 이 땅에서도 실현되어야 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식민지와 군사정부·권위주의적 정권이 휘두르는 제도적 폭력을 경험했던 우리는 극단적 서열화로 비롯된 폭력에 다소 무감각하다. 학교와 직장, 군부대 내에서 폭력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서열화 또한 무지에서 온 것임을 알고 그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이주민이 240만에 이르고 있다. 피부색과 말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폄훼하는 언행을 일삼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세습적 신분계급을 형성하는 일에 일조하는 것이다. 그들의 문화와 정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회적 약자(소수자)를 향한 말 한마디도 폭력임을 명심해야 한다. 무분별적인 댓글로 고귀한 생명의 불꽃이 꺼지는 일을 얼마나 더 보아야 하는가.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냉전 대결의 현장인 한반도에서의 전쟁 방지노력은 ‘소극적 평화’에 속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남북화해 분위기 기류가 흐르고 있는 지금 우리는 6·25 한국전쟁 이후 가장 따듯한 봄을 맞이하고 있다. 물론 낙관만 할 수는 없다. 비핵화 조치를 요구하는 미국과 제재 해제를 요구하는 북한의 결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북교류를 선두에서 이끌어 온 불교계는 남북·북미 정세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품어 온 계획들을 하나씩 펼쳐가며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걸어가기를 바란다. 신계사 템플스테이 전용관 건립, 식목불사, 문화재 공동 조사 등은 간단없이 진행해야 한다. 민족 동질성을 회복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1488 / 2019년 5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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