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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의식 무의식, 실수 복소수-하

DNA는 자아도 의식도 없지만 끝없이 자신을 복제

의식보다 무의식 먼저 주어져
‘우리’라는 생각은 의식 일부
자기마음 작동하는 원리 몰라
무아론이 유의미한 이유이기도

나방은 왜 불에 뛰어들까? 여기에는 놀라운 수학이 숨어있다. 나방은 밤에 달빛을 나침반 삼아 날아간다. 달빛줄기 즉 월광선(月光線)에 대해 일정한 각도를 만들고 목표물로 날아간다.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 방향을 정하고 길을 가는 것과 같다. 혹은 북위 30도 하는 식으로 가는 것과 같다. 그런데 달은 지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지구에 도달하는 달빛줄기들은 서로 거의 평행이다. 그래서 그 빛줄기들에 대해 일정한 각도를 가지고 날아가면 목표물에 이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목적지점과 출발지점을 잇는 선분이 달빛줄기와 30도를 이룬다면 그 30도를 유지하고 날아가면 된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불빛은 촛불이든 전등불이든 광원으로부터 방사선으로 뻗어나간다. 그래서 빛줄기들은 밤송이 가시 모양을 이룬다. 이 빛줄기들에 대해서 일정한 각도를 가지고 날아가면 나선(螺線 helix)을 그리면서 광원으로 향하게 된다. 첫 번째 빛줄기에 대해 30도 각도로 날아가 도달한 두 번째 빛줄기에서 여전히 30도를 유지하면 처음보다 더 광원 쪽으로 향하게 된다. 이 과정이 수없이 되풀이되면서 광원으로 향하게 된다. 나방의 눈을 통해 받은 시각정보를 바탕으로, 나방의 뇌가 날개에 30도 유지 명령을 내린다. 이런 일이 수없이 되풀이된다. 나는 것은 겉보기와 달리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 결과 촛불이나 백열등에 닿아 타죽게 된다. 나방은 자기 몸이 광원에 부딪혀 튕겨 나오면 고집스럽게 다시 광원으로 향한다. 무의식의 힘이다. 무지막지한 힘이다. 무의식은 기계적인 힘이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의 힘이다.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알라야식에는 부처와 같은 완성된 형태의 대자대비심이 없다. 종자(種子)일 뿐이다. 어디 식물 씨에 자비심이 있던가? 무좀 곰팡이가 자비심이 있던가? 이런 무의식의 힘을 통제하는 것은 의식이다.

이 나선형의 궤적은 수학으로 기술할 수 있다. ‘=’이다. 자연현상을 수학으로 기술할 수 있음은 놀라운 일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기술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신이 신비롭게 역사하다면 그건 신이 수학을 사용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주가 아름답다면 신이 우주를 수학을 이용해 만들었기 때문일 수 있다. 여기서 신은 분노와 시기와 질투의 신이 아니라 우주의 이법(理法)으로서의 신이다. 연기법이 아름답다면 연기법이 수학에 기초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세상에 문제가 있다면 수학에 서투른 데미우르고스(영지주의자들은 우주를 창조한 것은 최고신이 아니라 그 밑의 하급신인 데미우르고스라고 주장한다)가 엉터리로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국가인 공화국에서 지도자들이 수학을 필수과목으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지도 모른다. 사실 현대문명은 능하다. 과학기술이 수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세계가 전보다 극락에 더 근접한 것은 과학기술의 힘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에너지 해결이다. 우주 모든 곳에 있는 에너지를 인간 손에 넣은 것이다.

우리에게는 의식보다 무의식이 먼저 주어진다. 뱃속에서부터 뇌와 마음(무의식)이 형성된다. 우리가 우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의식으로서, 전체 의식의 일부분이며 극히 일부분이다. 무아론(無我論)이 유의미한 이유이다. 의식이 의식·무의식을 모르므로, 자기가 자신을 모른다. 우리는 물질적인 우리 몸에 대해서도 모른다. 의사들이 이렇다 저렇다 하면 그런 줄 아는 것이지, 우리가 우리 힘으로 자연스럽게 아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대해서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기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모르고 마음속에 뭐가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체로, 우리가 의식하기 전에 만들어졌지만 우리 의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무의식에 의해 움직인다. 불교는 이것들이 전생에서 온 것으로 생각했다. 업(業 karma)으로 표현했으며, 대승불교에서는 알라야식이라고 했다. 이들은 업이 알라야식이나 미세의식 형태로 전해진다고 생각했지, 소프트웨어 복제처럼 다시 생겨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DNA는 자아도 없고 의식도 없지만 끝없이 자신을 복제한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489 / 2019년 5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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