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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㉓ 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②

신라 성골‧진골 구분은 신분의 타락이 아닌 정치이념 변화의 산물

왕계 성골서 진골 구분 시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달라

진덕여왕 때까지 기술 동일
유사는 불교왕명시대 한정

과거에는 성골과 진골 구분
부모 양쪽 왕종인가로 판단
그러나 실체부정 주장 있어 

진덕여왕과 태종무열왕은
진흥왕 증손으로 신분 같아
성골과 진골 구별은 불합리 

종래의 사회사적 방법 한계
사상사적 방법으로 이해 도모

‘삼국유사’ 파른본(연세대 소장) 왕력편 선덕여왕 진덕여왕조.
‘삼국유사’ 파른본(연세대 소장) 왕력편 선덕여왕 진덕여왕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신라사를 같이 3기로 구분하고 있었으나, 내용에서는 약간의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상대(上代, 1대 박혁거세거서간〜28대 진덕여왕)·중대(中代, 29대 태종무열왕〜36대 혜공왕)·하대(下代, 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등 3기로 구분하였고, ‘삼국유사’에서는 상고(上古, 1대 박혁거세거서간〜22대 지증마립간)·중고(中古, 23대 법흥왕〜28대 진덕여왕)·하고(下古, 29대 태종무열왕〜56대 경순왕) 등 3기로 구분하였다. 

이로서 두 역사서에서의 일치된 구분시점은 28대 진덕여왕부터 29대 태종무열왕으로의 교체시기뿐이다. 즉 ‘중고’에서 ‘중대’로의 구분시점인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3대(代) 구분은 ‘중대’에 방점을 둔 시기구분인 반면, ‘삼국유사’의 3고(古) 구분은 ‘중고’에 방점을 둔 시기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의 중대는 이른바 한식시호시대(漢式諡號時代)라고 칭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추구하였던 시기였던데 견주어 ‘삼국유사’에서의 중고는 이른바 불교식왕명시대(佛敎式王名時代)라고 칭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불교적인 정치이념을 추구하였던 시기였다. 

유학자인 김부식에 의해 편찬된 ‘삼국사기’의 유교사관과 승려 일연에 의해 저술된 ‘삼국유사’의 불교사관의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으로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고에서 중대로의 시기구분은 불교에서 유교로의 정치이념의 변화라는 사실로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중고와 중대의 구분시점을 정치이념의 변화라는 측면보다는 신라의 왕계(王系)가 성골(聖骨)에서 진골(眞骨)로 바뀐 시기로서 더욱 주목되어 왔다. 즉 같은 왕족이면서도 진골과 구별되는 특별한 신분인 성골의 28대 진덕여왕이 사망함으로써 성골이 소멸되었고, 그를 이어 진골 출신의 김춘추가 왕위를 계승하여 29대 태종무열왕이 되었고, 이후 56대 경순왕까지 왕위는 모두 진골 출신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신라의 왕계가 성골에서 진골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주목하여 특기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에서는 약간 다른 사실을 전하고 있다. 먼저 ‘삼국사기’에서는 연표 상 박혁거세거서간 즉위기사에서 “이로부터 진덕왕까지 성골이었다”고 기록하고, 또한 연표 하 태종무열왕 즉위기사에서 “이로부터 진골이었다”고 하여 1대부터 28대는 성골, 29대부터는 진골 출신이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신라본기 진덕왕 8년조 말미에서도 “나라 사람들은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의 28왕을 일컬어 성골이라 하고, 무열왕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일컬어 진골이라 하였다”고 하여 같은 사실을 거듭하여 명기하고 있다.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왕력편 선덕여왕조에서 “성골의 남자가 끊어졌기 때문에 여왕이 즉위하였다”고 하는 언급이 있고, 같은 왕력편 진덕여왕조에서 “이상 중고는 성골이고, 이하 하고는 진골이다”고 하여 ‘삼국사기’와 다르게 성골을 중고에 한정하고, 상고의 시기와는 일단 구분함으로써 성골의 상한시점을 법흥왕대로 보는 주장의 근거를 제공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 고대사회의 실태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신분제도는 신라의 골품제였다. 골품은 성골·진골의 두 골(骨)과 6두품으로부터 1두품에 이르는 두품으로 구분되었다. 성골은 김씨왕족 가운데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최고의 골품이었으나, 앞의 신라사의 시기구분 문제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진덕여왕 이후 소멸된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성골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비롯한 모든 역사서에서 시기구분의 문제로서만 등장할 뿐이고, 그 이외 일체의 언급이 없기 때문에 아예 그 실재를 부정하려는 주장도 없지 않게 되었다. 다만 신라말기 최치원이 찬술한 ‘성주사낭혜화상탑비’(893)에서 성이(聖而)·진골(眞骨)·득난(得難) 등 5품을 들고 있는데, 성이를 성골로 이해하여 성골·진골·6두품·5두품·4두품 등 5품의 실재를 인정하는 자료로서 활용되고 있는 유일한 예이다. 

진골은 골품제 안에서 성골 다음의 상위 신분으로 김씨왕족을 중심으로 하고, 그와 함께 옛 왕족이자 왕비족이기도 한 박씨가 대부분이고, 본가야와 고구려 등의 정복과정에서 새로 편입된 일부 구왕족의 후예도 진골에 포함되었다. 진골은 원래 왕이 될 자격이 없었는데, 성골이 소멸된 뒤에 진골인 김춘추로부터 왕위에 올랐던 것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재고를 요하는 문제이다. 진골이라는 개념은 ‘삼국사기’ 사다함전에 등장한 이후 ‘삼국사기’ ‘삼국유사’ ‘황룡사찰주본기’ 등 역사서와 금석문 등에 수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정치 사회적으로 최고의 지위를 누린 신분이었다. 반면에 6두품·5두품·4두품은 진골 다음의 일반 귀족의 신분이었다. 그리고 3두품·2두품·1두품 등의 하위 골품은 뒤에 소멸되어 평인 혹은 백성이라 불린 것을 보면 일반 평민층을 구성하였을 것이다.

이상의 골과 두품으로 구성된 골품제는 신분의 등급, 즉 혈통의 존귀함과 비천함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여러 특권과 제약이 부여되는 제도였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특권과 제약의 기본이 되는 관등과 관직의 등급은 골품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었다. 17관등제에서 대아찬 이상의 관등은 진골만이 받을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은 진골 중심의 정치와 사회운영의 실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점은 중앙의 중요한 관청의 장관인 영(令)과 중요한 군부대의 최고 지휘관인 장군(將軍)은 모두 진골 출신자들만이 임명될 수 있다는 사실과 궤도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색복(色服)·거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 조에 의하면 의복·수레·기물·가옥 등 일상생활에 대한 제도가 골품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신라 사회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최고의 특권을 누린 성골과 진골이었음은 물론이다. 혜공왕 4년(768)에 책봉사를 따라 신라에 왔던 고음(顧愔)이 찬술한 ‘신라국기(新羅國記)’에 의하면, 진골 신분을 제1골, 두품 신분을 제2골로 구분하여 서술함으로써 양자 사이의 신분 차등이 현격하였던 사실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그런데 두품제와 달리 같은 김씨왕족이면서도 성골과 진골로 구분되는 이유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최고의 골품으로 전해지는 성골의 경우 그 성립의 상한 시기를 박혁거세거서간 이후로 보는 설부터 법흥왕대나 진평왕대로 보는 설까지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으며,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도 없지 않다. 성골과 진골의 구분 기준에 대하여 종래에는 부모 양쪽이 모두 왕종(王種)인가 또는 한쪽만 왕종인가로 구별된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어 왔다. 따라서 왕위가 성골에서 진골로 넘어간 이유도 모계(母系)의 변화에서 찾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한 견해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6부귀족제 위에 구성된 이부체제에서 생겨난 것으로서의 김씨를 부계로 하고 박씨를 모계로 하는 조건에서 성립된 것이 성골임을 지적한 견해이다. 

그리고 그 뒤 김씨왕권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 김씨와 박씨의 이원적인 것을 뒷받침하였던 6부귀족제가 기능을 상실하고 부모 양쪽이 모두 김씨가 차지하게 되었으며, 직계에서 방계로의 전환이 진골의 왕위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성골에서 진골로의 왕위 변화는 곧 신분의 강등이나 타락으로 평가하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주장에 일찍부터 의문을 가지고 접근한 결과 성골에서 진골로의 왕위 변화는 신분의 타락이 아니라 정치사상의 발전, 곧 정치이념의 변화의 산물임을 이해하게 되었는데, 뒤에 다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성골과 진골의 구분 기준에 대하여 근래에는 모계의 변화에서 찾는 대신에 7세대 동일친족집단의 이론을 채용하여 왕실가계 사이의 교체로 보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친족집단의 분지화(分枝化) 이론을 채용하여 왕의 최소 가계집단에 속하는 왕족인가 아닌가로 구별된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즉 왕위계승권을 독점한 성골집단의 규모가 3세대 가계(家系) 정도로 작아졌기 때문에 남녀 모두의 대가 끊어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런데 실제 중고기의 왕실세계를 살펴보면 24대 진흥왕의 두 아들 가운데 첫째 아들이 동륜태자이었고 그 손자가 26대 진평왕이었으며, 다시 진평왕의 딸이 27대 선덕여왕, 조카딸이 28대 진덕여왕이었다. 한편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 사륜, 즉 25대 진지왕이고, 그 진지왕의 아들이 용춘(수)이었으며, 다시 용춘과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이 김춘추, 즉 29대 태종무열왕이었다. 

이러한 왕실계보에 의하면 28대 진덕여왕과 29대 태종무열왕은 모두 진흥왕의 증손자녀로서 3종간의 형제 남매 사이가 된다. 그런데 동륜태자의 아들인 진평왕부터 선덕여왕·진덕여왕은 성골 신분이 된 반면,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과 손자인 태종무열왕은 진골 신분으로 구별되었다. 친족집단의 분지화 이론에 따라 왕족집단의 규모가 3세대 가계 정도로 작아졌다고 이해하더라도 동륜태자 계통은 성골이 되고, 사륜, 즉 진지왕 계통은 성골에서 강등된 진골로 구분된 이유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직계(直系)와 방계(傍系)의 관계로서도 충분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동륜태자 계통과 사륜, 즉 진지왕 계통은 모두 진흥왕의 직계 자손이면서 왜 성골과 진골로 구별되었는지 다른 설명이 요구되는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성골과 진골의 구분기준은 제3의 방법에서 찾을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국가의 발전과 왕권의 강화, 정치사상의 발전과 정치이념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접근해 보려고 한다. 구체적인 방법으로서는 6부체제 기능이 약화되고 왕권이 초월적인 위상으로 강화되는 22대 지증왕부터 중고기 왕실 계보의 추적과 동시에 정치사상의 발전과정을 추구해 보려고 한다. 특히 정치사상의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는 불교와 유교의 정치적 위상과 역할의 변화를 중심으로 추구될 것이다. 종래의 사회사적 방법 대신 사상사적 방법을 통해  신라 중고기 국가발전과정과 성골과 진골의 구분 의미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89 / 2019년 5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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