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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총림 방장 지유 스님 기해년 하안거 결제법어

기자명 주영미
  • 교계
  • 입력 2019.05.22 19:29
  • 수정 2019.05.30 11:16
  • 호수 1490
  • 댓글 0
지유 스님.
지유 스님.

 

오늘 벌써 여름 안거 결제를 맞이하였습니다. 여러분이 각처에서 모여 서로 만나서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을 볼 때 어떤 분은 낯이 익은 분이 있고 어떤 분은 처음 보는 분도 있습니다. 이 분들 중에는 지난해에도 계셨고, 지지난해에도 계셨고, 10년 전에도 계셨던 분도 있을 겁니다. 같은 얼굴이지만 10년 전과 비교해보면 조금씩 모습이 달라졌겠지요.

부처님 말씀대로 이 세상의 모든 물질치고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육신은 젊은 시절과 지금 나이 든 시절이 같진 않습니다. 생로병사, 출가자는 바로 이 생로병사 문제를 초월하기 위해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겠다고 원력을 세운 분들일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생사를 초월하셨다고 하였으니 우리도 생사를 초월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출가한 이 몸들이 아닙니까.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머릿속으로 가만히 생각하고 보니, 결국 부처님의 말씀이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처님도 자신의 마음 하나 깨닫고 생사해탈 하셨다, 그 깨달은 그 마음은 부처님만 갖추고 있고 깨닫지 못한 우리 일체중생에게는 없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있다, 심지어 미물, 곤충, 동물까지도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깨닫지 못한 우리들은 부처님과 똑같은 불생불멸의 불성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눈으로 무엇을 보면 이러쿵저러쿵, 귀로 소리를 들으면 이러쿵저러쿵, 커피라도 마시면 이러쿵저러쿵 항상 움직입니다.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생각이고, 생각은 기분인데 기분이 좋고 나쁘게 되면 감정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서 일어난 생각에 사로잡혀 망상 집착으로 말미암아 그 이전의 모습을 까마득히 잊어버린다는 사실은 경전에도 이미 나와 있습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참으로 그렇겠구나 싶습니다. 우리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이러쿵저러쿵, 좋으면 좋다, 나쁘면 나쁘다, 좋은 것은 갖고 싶고, 싫은 것은 버리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갈등이 심해져 괴롭습니다. 괴롭다고 하는 것은 외부의 상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하고 있는 자신이 혼자서 좋다 하고, 나쁘다 하며 분별합니다. 그 바람에 우리가 부처님과 같은 불성을 속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우리가 무엇을 집착하고 있다면, 자신이 도대체 무엇에 대한 집착을 하고 있을까 각자 자기 나름대로 마음속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집착하는 것이 있다면 한번 털어버리기만 해도 정말 부처님 말씀대로 불생불멸의 마음이 드러나고 볼 수 있는지, 그것을 해보기라도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팔만대장경도 연구해보니 결론은 각자 자기입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인가. 냉정하게 자신을 돌이켜보면 인간은 몸, 다시말해 육신을 갖고 있습니다. 육신만 있어서는 보고 듣고 움직이지 못합니다. 육신을 움직이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자가 속에 들어앉아서 온갖 생각을 하다 보니 생각하는 대로 몸이 달라지고 움직입니다. 그래서 몸은 마음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그림자이기 때문에 주인의 마음이 흐리면 그림자인 몸도 흐려지고 마음이 맑아지면 그림자인 몸도 맑아진다, 그래서 몸을 좋게 하려고 한다면 몸을 건드려봐야 좋아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속에 있는 마음을 밝히고 맑히면 몸은 저절로 밝아지고 좋아진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현재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먼저 내 몸이 건강한지 보아야 합니다. 건강하지 못하다면 병이 난 것이고 병은 막연히 생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 원인이 있습니다. 당뇨랄지, 고혈압이랄지, 요즘은 암이랄지 별의별 병이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빨리 원인을 제거해 버리면 병 없는 몸이 될 것입니다.

몸은 그렇다 하고, 마음은 어떻습니까? 육신은 형태가 있기에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을 찾겠다 마음을 깨닫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마음입니까. 무엇이 마음인가 생각하고 있는 이놈이 마음입니다. 손가락 끝이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머리끝이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코가 생각하고 있는 것 역시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하고 있는 자체가 마음입니다. 마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나도 무엇인가 해야겠다, 공부하겠다, 견성성불을 해야겠다, 이렇게 항상 생각하고 있는 자체가 마음 아닙니까?

생각이 하늘에서 날아와 나의 속에 들어온 것도 아니요, 땅에서 솟아나서 나의 속에 들어온 것도 아닙니다. 바깥의 물체를 보면 이러쿵저러쿵 생각하는 것이 자기 속에서 나온 것이고, 소리가 나면 이러쿵저러쿵 생각하는 것도 나의 속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서울 남대문을 생각하면 남대문의 모습이 나의 마음속에 그림자로 떠오릅니다. 부산 자갈치의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자갈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또 돌아가신 노스님을 생각하면 그 모습이 마음속에 떠오릅니다. 이것을 천 번 만 번 해보니 도대체 생각이 무엇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사람들은 생각이 복잡하고 답답해서 괴롭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생각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또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가만히 조용히 관찰해보면 생각이라는 것은 마음속의 그림자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환상이요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실제 존재한다면 그림자가 앞에 나타났을 때 부딪혀 나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그림자가 떠올랐을 뿐입니다. 그 그림자는 어디서 생기고 누가 만들었습니까?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스승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생각이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그 스승은 답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스승은 다른 이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합니까?”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생각이 어디서 일어났는가, 그 질문도 좋겠지만, 파도는 어디에서 일어났는가 물으면 무엇이라고 답하겠습니까?”
답이 없자 말을 바꿨습니다.
“바람은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또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파도가 어디에서 일어났느냐고 하지 말고 파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보아야 합니다.”

파도는 물의 움직임입니다. 결국 파도는 물에서 나온 것이지요. 바람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묻지 말고 부채질만 해봐도 공기의 움직임이 바람인 줄 압니다. 바람은 없어질 수 있고 파도도 없어질 수 있지만, 파도가 없어진다고 해서 물이 없어지지 않고 바람이 줄어든다고 해서 공기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바람은 공기에서 나왔고 파도는 물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생각은 도대체 무엇인가 관찰해보면, 이러쿵저러쿵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에서 생각이 나왔다는 말은 맞습니까?

이 생각이 어디에서 일어났는지 일어난 자리를 찾으려면, ‘움직이는 모습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는 그 생각을 쉬어버리면 됩니다. 파도 없는 물과 같습니다. 너무 이론적이고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을 탁 털어버리면 됩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망상집착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기 전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있던 것이, 생각을 털어버리면 저절로 생각 아닌 마음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결론은 이렇습니다.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을 비교해 볼 때,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가 고민하며 화두도 들어보고 염불도 해보고 기도도 해보지만 이렇게 해도 되지 않고 저렇게 해도 되지 않습니다.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자기 마음속의 모든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가지고 생각 아닌 마음을 보지 못함을 말합니다. 깨달은 사람은 정반대입니다. 이때까지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것을 알고 모든 생각을 다 털어버렸습니다. 마음속에 갖고 있던 생각을 털어버리니 생각 아닌 마음을 드러낸 것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마음속이 생각에 가려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듣지 못하고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 털어버리니까 저절로 소리인 줄 알고 저절로 보이고 저절로 차가우면 찬 줄 압니다. 간단합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도 마음이고 깨달은 사람도 마음입니다. 깨달은 사람도 때리면 아픕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미물, 곤충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놈이 바깥에서 무엇을 들으면 이러쿵저러쿵, 보기만 하면 이러쿵저러쿵, 온갖 생각에 사로잡히니까 마음속이 마치 안개 속에 묻혀 버린 것과 같아서 앞의 경치를 보지 못하고 요즘처럼 미세먼지가 꽉 쌓여 갑갑한 것과 같습니다. 반면 깨달은 사람은 안개에 묻혀서 보지 못했던 앞의 경치가 안개의 사라짐으로 인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 안개라고 할지 미세먼지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스스로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화두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그 마음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이러쿵저러쿵 생각하지요. 그런데 생각은 있다가도 사라집니다. 생각은 있다가 사라지지만 마음은 생각이 일어났다고 해서 같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생각이 사라졌다고 해서 같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마치 파도가 일어났다가 사라지지만 물은 파도가 생겼다고 해서 같이 생기거나 파도가 사라졌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영원히 불생불멸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이 일어났다고 해서 마음이 따라 일어난 것도 아니며 생각이 사라졌다고 마음이 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불생불멸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도대체 마음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어느 장소 무슨 시간 무슨 짓을 해도 항상 마음을 떠나서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내가 찾고자 하는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화가 난다든지 즐겁다든지 감정이 일어날 때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모든 감정 속에 마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감정은 있다가 사라집니다. 감정은 있다가 사라지지만 마음은 없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이 일어났을 때 생각 속에 있다고 했는데 생각이 사라져버리면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 역시 답이 무척 간단합니다. 파도가 일어났을 때 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파도 속에 물이 있습니다. 파도를 만져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파도가 없어지더라도 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파도 없는 평탄한 물이 있습니다. 아 이것도 물이구나. 맞습니까?

화가 났다고 합시다. 그 때 본인들이 화를 내고 있는 줄 아십니까? 기분이 좋다고 합시다. 기분이 좋을 때 내가 기분이 좋은 줄 아십니까? 때리면 아픈 줄 알 듯, 찬 것이 오면 찬 줄 알 듯, 기분이 나쁘면 기분이 나쁜 줄 압니다. 기분이 좋을 때도 기분이 좋은 줄 압니다. 그런데 사라져버리면 기분이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습니다. 찬 것도 없고, 아플 것도 없습니다.

물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불도 아시지요? 물은 어떤 것이냐고 질문을 하니까 어떤 사람이 어떻게 대답을 할까 고민을 합니다. 물을 항상 마시며 살지만 딱 설명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방바닥에 손을 대 보라, 어떤가?” 라고 묻습니다. “물기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 대답에서 알 수 있듯이 젖는 습성을 물이라고 합니다. 안개도 물, 눈도 물, 비도 물, 이처럼 젖는 습성을 물이라고 합니다. 불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방바닥에 손을 다시 대어 봅니다. ‘아, 불기가 없구나.’ 불기가 없다는 것은 방이 따뜻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불은 뜨거운 것입니다. 맞지요?그렇다면 마음은 어떤 것이겠어요? 화날 때 화난 줄 아는 놈이 마음입니다. 알면 화는 없어집니다. 찬 것이 오면 찬 줄 압니다. 찬 것이 마음이 아니라 찬 줄 아는 놈이 마음입니다. 기분이 나쁠 때는 막 화가 납니다. 자신이 기분 나쁜 줄 알면 기분 나쁜 것은 없어집니다. 기분 나쁜 줄 아는 그것은 불생불멸입니다. 이해하시지요?

조용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눈 뜨고 가만히 벽을 보고 앉아있을 때, 그때 만일 종소리나 목탁 소리가 나게 되면 저절로 귀에 들어와서 무슨 소리인 줄 압니다. 앞에 벽이 있으면 눈 뜨자마자 벽인 줄 압니다. 찬바람이 불면 피부에 닿자마자 찬 줄 압니다. 특별한 생각을 했거나 재주를 부려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오면 저절로 압니다. 소리가 오면 소리인 줄 알고 없어지면 없어진 줄 알고, 어떤 물체가 오면 온 줄 알고 가면 가는 줄 스스로 압니다.

옛날 어떤 선사가 화두를 들 때 그렇게 고심하고 고심해도 아무리 알려도 해도 도무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도저히 알지못해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결국, 일없이 우두커니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종소리가 ‘땅’ 나자, 이 종소리는 누가 압니까? 그래서 ‘앗, 이제 알았다.’ 여태까지 종소리를 실컷 듣고 있었는데 그동안에는 온갖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몰랐습니다. 화두다, 염불이다, 기도이다, 그것이 모두 자신의 마음을 찾기 위해 그런 것인데 말입니다. 생각을 털어버리니까, 깨닫고 보니까, 알고 보니까 이제 비로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닫기 전에도 알고 있던 것입니다. 깨닫기 전에도 찬 것이 오면 찬 줄 알고 더운 것이 오면 더운 줄 압니다.

육조(六祖) 스님을 쫓아왔던 도명 선사에게 육조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 하라. 이때 그 마음을 나에게 보여 보시오.”
이때 도명 선사가 깨달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물으니,
“어떤 사람이 입으로 물을 마실 때 찬물이라면 입에 대자마자 찬 줄 알고 더운물이라면 대자마자 더운 줄 압니다.”
그렇게 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육조 스님께서,
“모든 부처님께서도 이것을 깨달으셨고, 나도 이 문중에 와서 이것을 알았고, 그대 이제 내 말도 알았다.”

이것은 깨달은 사람만의 전매특허입니까? 깨달은 사람만이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것을 믿지 못합니다. 무시하고 다른 것을 찾고 있습니다.

도명 선사는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자신이 오늘까지 20여 년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온갖 방법으로 애를 써도 마음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과거의 모든 원수를 다 갚았다며 이 은혜는 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불법이 이 외에 또 다른 것이 있습니까?”
혜능 스님께서는 “없다.”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있다고 한다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을 믿어버리면 부처님과 한 몸이 될 것이고 이것을 믿지 못하면 하늘과 땅처럼 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대가 의심치 말고 이것을 믿고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의 말을 들어보면 누구나 다 아는 내용입니다. 때리면 아픈 줄 알고 소리가 나면 소리인 줄 알고 벽을 보고 있으면 벽인 줄 압니다. 이것이 자신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지만 무엇이 차이가 있는가, 완전히 다릅니다. 같은 마음이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앉아있을 때 이러쿵저러쿵 생각합니다. 벽을 보고 있긴 하지만 벽을 보는 것 자체가 재미없습니다. 남대문, 자갈치로 생각이 왔다 갔다 하면서 항상 무엇을 해야 할 텐데 하며 잠시도 눈앞의 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피곤하면 혼침에 빠집니다. 깨고 나면 다시 이 생각 저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눈 뜨면 산란하고 피곤하면 잠에 빠져버립니다. 이것이 깨닫지 못한 사람의 마음속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벽을 보는 데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난 과거의 모든 생각이 왔다 갔다 했다고 봅시다. 그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생각을 간섭할 필요가 없습니다. 환상에 사로잡히면 눈앞의 물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벽을 볼 때는 환상이 있거나 말거나 산란하지 않으면 됩니다. 조용한 속에 찬 것이 오면 찬 줄 알고 소리가 나면 소리인 줄 알고 눈앞의 벽을 벽인 줄 아는 것이 바로 영지(靈知)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을 쉬라고 하니 생각을 하지 않고 무심이 되겠다며 눈을 감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을 무기혼침(無記昏沈)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텅 비어 있으므로 막힌 곳이 없습니다. 물체가 오면 물체인 줄 알고 소리가 나면 난 줄 압니다. 알지 못한다면 산란하거나 혼침에 빠진 것입니다.

마음속을 어떤 생각도 가리지 않으면 소소영영하게 눈앞의 벽이 완전히 자신의 눈에 들어옵니다. 저절로 들어오는 것은 내가 막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놈이 내 속에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내가 그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상대가 나의 속에 내가 상대 속에 그래서 주인과 객이 혼연일체가 됩니다.

벽을 보고 있을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엌에서 불을 때고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 때 짐을 지고 옮길 때에도 항상 목전을 뚜렷이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벽을 보면서도 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일할 때도 다른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보통 사람의 마음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벽을 볼 때는 벽과 혼연일체, 일할 때는 일과 혼연일체가 됩니다. 일체 모습이 일체 삼매입니다.

몸은 마음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답답했던 마음이었기에 몸에도 병폐들이 있었는데 마음이 맑아지니까 몸도 같이 맑아집니다. 그래서 어제보다 오늘이 좋고 오늘보다 내일이 좋아질 것입니다. 생로병사가 거꾸로 입니다. 10년 전에는 답답하고 머리도 복잡하고 기억력도 떨어지고 몸도 무거웠던 것이 지금은 시원하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해도 상쾌합니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안개 속에서 미세먼지 속에서 살았던 자신이 일체 티끌없는 푸른 하늘을 보듯이 하니까 무엇을 해도 즐겁고 막힌 곳이 없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얼굴을 보면 빛이 납니다.

우리가 정말 공부를 시작했다면, 오늘까지 10년, 20년 선방에 다녔다면, 얼마나 좋아지고 있습니까? 자신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고민하고 고민했는데도 아직 찾지 못했다면 갈수록 늙고 병들고 몸이 무거워집니다. 이것은 별수 없습니다. 마음을 밝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밝힌다는 것은 마음속을 막고 있는 혼침과 산란을 털어내는 것입니다. 털어내버리면 현실이 그대로 들어옵니다. 그것이 마음을 비우라는 것입니다.

마음속의 어떤 생각에도 사로잡히지 말고, 생각할 때 하더라도 생각을 탁 털어버리면 생각 없는 마음으로 항상 살아갈 수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여태까지 마음속이 생각으로 가려져 있던 것이 생각을 털어버리고 생각 없는 마음으로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살아갑니다. 이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말씀드린 것을 싱겁게 듣고 넘기면 안 됩니다. 그 스님 말씀이 진정으로 맞는지 한번 해보자며 앉아 보십시오. 선방이든 어디든 좋습니다. 가부좌를 틀고 눈 똑바로 뜨고 있어 보십시오. 처음에는 생각도 해보겠지만 나중에는 일체 생각을 하지 말고 조용히 앉아 보십시오.

옛 선사께서 ‘비사량처(非思量處)’라고 하셨습니다. 비사량처는 생각 아닌 곳입니다. 생각 아닌 곳이란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파도를 일으키지 말라고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파도 이전에 물로 되는 것이겠지요? 조용히 있다 보면 여태까지는 몰랐는데 ‘아, 이제 알았다.’ 이렇게 됩니다. 깨달은 사람이 처음에는 화두를 열심히 참구해도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이 없어져서 저절로 깨달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달라져야 될 것 아닙니까. 나쁘게 달라지면 안 됩니다. 좋게 달라져야 합니다. 기억력이 적었던 사람은 기억력이 좋아지고, 치매에 걸린 사람은 치매가 없어지고, 어두운 것은 밝아져야 하고, 병든 몸이 건강한 몸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5월19일 금정총림 범어사 보제루에서 봉행된 ‘금정총림 범어사 기해년 하안거 결제 법회’에서 지유 스님이 설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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