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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달라이라마의 전법 ②

기자명 김정빈

중국, 5만 군대와 거짓협정으로 티베트 침탈하다

1950년 10월 중국군 티베트 침공
중국, 세계에 티베트 해방 합리화  
티베트, 국제 사회에 부당성 호소
달라이라마, 결국 북인도로 망명

그림=육순호

제14대 달라이라마는 1935년에 티베트 북동부 변방인 암도에 있는, 스무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 탁최에서 소작농인 아버지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분’으로 기억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열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중 일곱이 살아남았다. 

어렸을 때 그의 이름은 라모 툰둡이었으며 나중에 달라이라마가 되면서 텐진 갸초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그가 세 살이 되어가던 때, 제13대 달라이라마가 서거한 후 정치를 맡고 있던 섭정 정부는 서거한 달라이라마의 환생을 찾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떤 아이가 전대의 달라이라마로 인정받기까지는 아주 정교한 검증 과정을 거친다.

먼저 국무회의가 열리는 동안 제13대 달라이라마의 시신에서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시신의 머리가 본래는 남쪽을 향해 있었는데, 북동쪽 방향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 직후에 고위 라마승인 섬정이 남부 티베트에 있는 신성한 호수 라마 라초의 수면 위에 티베트 문자 Ah, Ka, Ma가 떠 있는 환상을 보았다. 더하여 그는 청록색과 황금색 지붕이 있는 3층 사원과 그 사원으로 이어지는 좁다란 길을 보았으며 그 길 한 모퉁이에 이상한 모양을 한 빗물받이 홉통이 있는 작은 집을 보았다.

그는 Ah가 북동 지방인 암도를 의미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파견단이 암도의 쿰붐 사원에 도착했는데, 과연 그 사원은 3층으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지붕 색깔 또한 섬정이 본 그대로 청록색이었다. 파견단은 다음 단계로 이상한 물받이 홈통이 있는 집을 찾아냈는데, 그곳이 바로 라모 툰둡이라는 아기가 사는 바로 그 집이었다.

하지만 달라이라마 후보자는 라모 툰둡 말고도 한 아기가 더 있었다. 파견단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곧바로 용건을 드러내지 않은 채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파견단장인 큐창 린포체(전생이 확인된 고승)는 묵는 동안에 아기와 함께 놀면서 아기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관찰했다.

아기는 그를 보자마자 “쎄라 라마, 쎄라 라마”라고 소리쳤는데, 쎄라는 큐창 린포체가 있던 사원 이름이었다. 그들은 그 이튿날 떠났다가 며칠 후에 제13대 달라이라마의 유품과 그가 쓰던 물건은 아니지만 겉보기에는 매우 비슷해보이는 다른 물품을 준비하여 돌아왔다. 아기는 그중 선대 달라이라마의 유품에만 관심을 보이면서 “이건 내 꺼야, 이건 내 꺼야”라고 말했다.

이렇게 하여 제13대 달라이라마의 환생으로 인정된 라모 툰둡은 부모 곁을 떠나 라사의 포탈라궁에서 지내게 되었으며, 그다음 해에 정식으로 달라이라마로 즉위했다. 다만 그는 아직 아기였으므로 종교적, 정치적 결정은 섭정이 맡아서 처리했다.  

1950년 여름, 티베트에 중대한 위기가 찾아왔다. 중국군이 티베트 국경을 침범한 것이다. 10월이 되자 8만명의 인민해방군이 ‘평화적인 해방’을 주장하며 투리추 강을 넘어왔는데, 티베트 군인의 수는 모두 합쳐 봐야 8500명밖에 되지 않았고 장비 또한 중국군에 비해서는 보잘것없는 초라한 수준이었다. 

티베트 정부는 영국 정부의 지지를 얻어 중국에 항의하는 한편 국제연합에 중재를 호소했지만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했다. 이런 급박하고 암담한 상황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열다섯 살 소년 텐진 갸초로 하여금 서둘러 즉위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했다. 즉위하자마자 달라이라마는 승단 계열의 수상과 평민 계열의 수상을 임명하는 것으로서 임무를 시작했다.

달라이라마는 정부를 이끌고 수도인 라싸를 떠나 평민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남쪽 지방인 트로모로 피신했다. 그동안 수도는 두 수상이 맡아 다스렸고, 국가적 중요사항을 결재할 때 사용하는 국새는 달라이라마가 소지했다. 피난 상태에서 달라이라마는 중국에 항의하는 한편 국제연합과 영국, 미국, 인도 등으로 외교단을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했지만 유의미한 응답을 듣지 못했다. 

그때 참도의 지사인 가왕 아왕 직메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는데 그는 인민해방군이 곧 진격할 것이므로 인명 살상을 막기 위해서는 협상을 하는 도리밖에는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달라이라마는 그에게 두 명의 관리를 붙여주면서 티베트를 대표하여 중국과 협상하도록 지시했다.

그 무렵 달라이라마는 중국어를 배웠으며 라디오를 통해 중국 방송을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베이징 라디오를 통해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방송은 중화인민공화국과 티베트 대표들이 ‘티베트 해방 협정 17조’에 합의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그동안 지난 100년간 티베트에는 침략적인 제국주의 군대가 들어와 있었으며 그 때문에 티베트인들은 극심한 고통과 노예 상태에 빠져 지냈는데 이 협정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티베트에는 외국 군대가 있지 않았으므로 이는 순전히 거짓이었다. 또한 달라이라마는 가보를 협상 대표로 파견한 것일 뿐 그가 최종 결정을 내릴 권한까지는 주지 않았었다. 최종 결정은 국새를 가진 자신이 내려야만 하는 것이었지만 중국은 가보를 비롯한 협상 대표들을 강제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결정을 내린 다음 가짜 국새로 일을 처리한 것이었다.

중국은 이 협정을 통해 티베트인들이 ‘조국으로의 복귀’를 하게 되었노라고 주장했다. 이는 티베트인들의 조국이 중국이라는 뜻이지만 이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티베트는 지난 수 세기 동안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해 왔었고, 국제사법위원회는 1912년 이후 티베트가 독립국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티베트인들은 중국인들과 다른 언어, 다른 관습,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중국은 협정 17조를 통해 티베트의 정치에 간여할 명분을 만들었으며 티베트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달라이라마를 보호하는 주변 사람들은 조국을 떠나 인도로 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무렵 미국 영사관을 통해 미국을 방문하면 허락하겠다는 뜻을 전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망명은 최종적인 수단일 뿐이었다. 달라이라마는 남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1961년 6월, 중국 대표단이 트로모에 도착했다. 달라이라마는 중국 대표단 단장인 지앙진우 장군과 회담했는데 회담 분위기는 나름대로 정중했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90호 / 2019년 5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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