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15. 달라이라마의 전법 ③

기자명 김정빈

땅과 동포 침탈에도 달라이라마 자비만을 설하다

정중했던 중국군 1951년 돌변해
티베트 침공 후 병력 2만명으로
물품 빼앗고 서슴없이 학살 진행
그럼에도 달라이라마 인내 강조
“차츰 강탈 멀리하고 좋아질 것”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중국을 대표하여 파견된 지앙 장군을 만난 후 달라이라마는 피난처인 트로모에서 수도인 라싸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그 나름 정중했던 중국군의 태도가 1951년 10월 갑자기 변했다. 참도에서 티베트군을 진압했던 중국군 3000명이 라싸로 진입해온 것이다. 그들은 중국군에 협력하는 티베트인의 인도를 받고 있었다. 얼마 후 중국군의 규모는 2만 명으로 증강되었다.

그 무렵 중국군은 자신들이 티베트와 맺은 ‘17개 조항’을 지키는 듯했다. 그 협정에 따르면 인민해방군은 정당한 매매행위를 통해 물품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중국군은 규정을 무시하고 티베트인들의 물품을 강탈하기 시작했다. 중국군은 거지나 다름없는 누더기옷을 입고 있을 정도로 본국에서 지원받지 못하는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 문제를 티베트인들의 것을 빼앗음으로써 해결하고자 하였다.

중국군은 티베트 정부에 식량과 숙소를 제공해줄 것을 요구했고, 달라이라마를 대신하여 티베트의 수상 루캉와는 이렇듯 많은 군대가 머물 필요가 없음을 주장했다. 중국군에 의해 경제가 흔들리자 하룻밤 사이에 물가가 두 배로 상승했다. 분개한 티베트인들은 중국군들을 몽둥이로 때리거나 칼로 찔렀고, 소극적으로는 그들을 조롱하는 상스러운 노래를 불렀다.

얼마 후, 티베트를 대표하는 수상 루캉와와 중국군을 대표하는 지앙 장군이 협상을 시작했다. 루캉와는 매우 강경하게 티베트의 주권을 주장했고, 이에 지앙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마침내 중국 정부는 루캉와를 해임하지 않으면 중국과 티베트 간에 큰 문제가 생긴다는 점을 달라이라마에게 통지했으며, 달라이라마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해임했다. 중국이 강제로 체결한 17개 조항은 티베트를 독립국이 아닌 중국의 한 자치구로 보고 있었으며, 그에 의거하여 중국인들은 티베트를 ‘개혁’하려 하였다. 개혁 과정에서 중국식 집단 농장이 구성되었다. 달라이라마는 비록 중국의 간섭을 받고 있긴 하더라도 나름 소강상태가 되는데 대해서는 적이 안심하고 있었다.

1954년 달라이라마는 중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베이징을 방문하여 중국 최고 지도자 마오저둥을 만났다. 마오는 나름 친절했다. 부처님에 대해 그분이 인간의 계급성을 부정했으며, 인간성의 타락을 거부하고 착취를 반대했다는 점에서 훌륭했다는 호의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는 독약과도 같은 것이라는 비판적인 견해도 피력했다. 그에 따르면 비구, 비구니는 독신생활을 함으로써 인구를 감소시킬 뿐 아니라 물질적인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이었다.

1955년, 한 해 전에 중국은 인도와 조약을 맺었는데, 그에 따르면 두 나라는 내정 문제에 간섭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고, 티베트는 중국의 영토로 간주되었다. 중국의 통제는 나날이 심해져 갔다. 그들은 자신들 나름의 ‘개혁’을 밀어붙여 티베트의 사원에 세금을 부과했다. 토지들이 몰수되어 재분배되었는데, 중국 공산당원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중국 당국은 지주들을 비난했고, 유목민들이 야만적이라며 붙잡아 들였다. 또한 그들은 지역 주민들에게 종교를 반대하라고 선전했다. 승려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했다. 그들은 살생을 금지하는 계율을 어길 수밖에 없도록 승려들로 하여금 쥐, 새, 해충 등을 박멸하는 시책에 참여시켰으며, 이를 거부하면 매질을 했다.

1955년 말, 마오의 지시에 따라 ‘티베트 자치구 준비위원회’가 준비되자 티베트인들이 거세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중국군들은 티베트인들이 가진 무기를 몰수하려 하였고, 티베트인들이 이에 저항하자 구타, 처벌, 재판을 강행했다. 중국인들에 의해 ‘범법자’는 포승에 묶여 탈진할 때까지 방치되었고, 티베트인들을 불러내어 그들에게 고통을 가중시키도록 강제했다.

달라이라마 전통에 ‘네충 신탁’이라는 것이 있다. 영매가 신으로부터 예언을 듣는 것인데, 비록 영매를 이용하고 신으로부터 예언을 듣는다고는 해도 이것이 불교 교리에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그들은 믿는다. 1956년 초, 달라이라마는 “희망을 이루어주는 보석(달라이라마)이 서쪽에서 빛날 것이다”라는 네충 신탁을 받았다. 훗날 자신이 인도로 망명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당시의 달라이라마는 이 신탁을 자신이 장차 인도를 방문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중국에 저항하는 티베트인들이 무장 게릴라 조직을 결성했으며, 중국 정부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티베트인들을 중심으로 자치위원회를 결성했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 대표자들을 모아 개혁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를 물었고, 얼마 후에는 반대자들만을 불러들여 요새 안에 가둔 다음 5천 명의 군대로 건물을 에워쌌다. 그러고는 개혁에 찬성할 것을 강요하였는데, 경비가 약화된 틈을 타서 그들은 모두 산속으로 도망쳤다.

어느 날 달라이라마는 중국 당국이 발행한 신문에 머리가 잘려진 사람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실려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사진 설명문에 따르면 그것은 ‘반동적인 범죄자’의 머리였다. 이 사진이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한 중국 당국은 서둘러 신문을 회수했고, 심지어는 돈을 주면서까지 사려고 했다.

그런 고통과 곤란의 한복판에서 달라이라마는 불교인으로서의 수행과 명상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그때 친구와 적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 즉 “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친구보다도 오히려 더 소중하다. 왜냐하면 적은 그대에게 친구가 가르쳐줄 수 없는 그 어떤 것, 예를 들면 인내 같은 것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는 구절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달라이라마는 거기에 자신의 말을 덧붙여 이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불운한 일도 결국은 차차 좋아질 것이다. 사람들 마음속에 본래부터 깃들어 있는 진리와 정의, 그리고 인간적인 이해에 대한 열망은 무지와 절망을 딛고 최종적으로는 승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중국인들이 우리를 탄압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우리 티베트인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평생을 작은 벌레 한 마리 죽이지 않는 티베트인들을 급습하여 사람을 죽이고 때리고 학대하는 중국인들. 두 나라 사람들은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현격하게 달랐다. 중국인들에게 사람은 공산주의 사상에 의해 판단되고, 그 판단에서 인민의 적으로 판정이 나면 얼마든지 죽이거나 학대해도 되는 대상이었지만, 티베트인들에게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학대하거나 살해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대상이었던 것이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91 / 2019년 6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