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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중생(衆生, sattva)

기자명 현진 스님

인도 브라만교서 유래한 의미로 윤회 반복하는 상태

사뜨와, ‘존재하는 상태’ 어원
브라만교는 피동적 존재지만
불교에선 능동적으로 탈바꿈
스스로 깨달음 얻는 존재 의미

인도의 고대종교인 브라만교에서 가장 궁극적인 상태로 여기는 것은 그들이 절대존재이자 절대상태로 간주하는 브라흐만(Brahman)과의 합일(合一)인데, 이는 불교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해탈 혹은 열반과 유사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불교도가 해탈이나 열반에 대해 가지는 현실성에 비해 브라만교도(또는 힌두교도)가 브라흐만과의 합일에 대해 갖는 현실성은 상대적으로 높다. 그것은 불교도로서 해탈이나 열반을 성취하겠다는 염원은 어느 정도 믿음이나 교리의 틀에 갇혀있는 반면, 힌두교도들이 결국엔 브라흐만과 합일을 이뤄야 된다는 생각을 사회신분의 고하나 지식의 유무를 떠나 숨을 쉬듯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용어 가운데 하나인 중생(衆生)이란 개념은 인도에서 불교 이전부터 존재했었다. 중생의 산스끄리뜨어인 사뜨와(sattva)는 ‘존재(sat)하는 상태(­tva)’라는 어원을 지니는데, 이를 브라흐만과의 합일이란 틀에 집어넣으면 중생은 ‘브라흐만과의 합일을 이루지 못한 상태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로 해석될 수 있다. 불교에서 중생이라면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범부로서 보살이나 부처의 상대개념으로 간주되며, 넓은 의미로는 심지어 보살이나 아직 반열반(般涅槃)에 들기 이전의 붓다까지 포함되는 것이니, 브라만교와 불교의 중생에 대한 생각은 그리 큰 차이가 없는 셈이다.

사뜨와의 한문번역인 중생(衆生)을 우리말로는 ‘뭇 삶’이나 ‘여러 태어남’으로 옮기는데, 어찌 보면 한자풀이에 국한된 부실한 옮김 같지만, 표현을 약간 수정하여 ‘거듭 태어남’으로 이해하면 본 의미가 오롯이 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거나 해탈하여 열반에 들면 다시는 태어나지 않기에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거듭 태어나서 윤회를 반복하는 것이 중생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번역어로 유정(有情)이 있는데, 사뜨와(sattva)를 옮기며 의역이자 다소 비관적으로 표현된 것이 ‘衆生(거듭 태어남)’이라면 직역이자 제법 낙관적으로 표현된 것이 ‘有情(활기찬 마음을 지님)’이라 할 수 있다.

사바세계와 열반의 개념이 내포된 ‘중생’이란 용어는 브라만교에서 피동적이며 의존적인 존재를 가리켰던 것에 반해 불교에선 능동적이며 의지적 작용을 갖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불교에서 중생은 불보살에 의한 구제의 대상이자 스스로 업(業)을 지어가는 주체로 여기는데, 이는 곧 의지를 통해 훌륭한 가르침을 만나고 그것을 수행함으로써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중생의 범위를 9류 혹은 12류 중생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의지적 작용을 갖는 모든 존재로 귀결된다. 그래서 불보살에 의한 구조의 대상이 아니며 또한 스스로 업을 짓지 않는 산천초목 등의 무정물은 중생이 아니기에 중생세간이나 유정세간에 상대되는 기세간(器世間)으로 분류되어 있다. 마치 그릇[器]이 물건을 담고 있듯이 중생 혹은 유정을 담고 있는 세간이란 의미이다.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중생이 사라진 기세간은 저절로 소멸되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선 기세간을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간주하여 중생들이 그것에 의지해 수행하게 함으로써 해탈할 기반이 되어주고는 모든 중생이 해탈한 후에는 소멸된다는 설화를 시설해놓기도 하고, 혹은 길장 논사나 일본의 일련종처럼 초목성불(草木成佛)을 주장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단순히 중생의 개념을 초목에까지 확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불교적인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즉, 중생들이 의지해 수행할 기반으로서의 기세간인 자연(自然)은 그저 쓰다버릴 무엇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해야 해탈이건 무엇이건 가능한 도반(道伴)이자 공생(共生)의 관계임을 강조한 것이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491 / 2019년 6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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