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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바람(願)과 바람(風) ①-진광 스님

기자명 진광 스님

“바람은 불가능한 그 무엇이라도 해내게 한다”

강원 물걸리 사지서 태어난 건
불연이 아주 없지 않다는 징표
어릴 때 처절한 몸부림·일탈은
산골 벗어나려는 절박함 때문

원력의 바람과 공기의 바람은
가능성 없어 보이는 것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힘 북돋아 줘
10년 130개국 운수행각의 돛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나는 강원도 두메산골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의 절골이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집 뒤편에 고려시대 절이 있었다고 하고 보물도 출토된 ‘물걸리 사지’가 바로 그곳이다. 그러니 불연(佛緣)이 아주 없지는 않은가보다.

우리 아버님은 둘째로, 일찍 결혼해 군대를 다녀온 후에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향을 떠나 강원도 양구로 이주하셨다. 당신은 우리에게 흥부인양 말씀하시고 우리도 그리 세뇌가 되었지만 딱히 그렇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온통 사방이 산과 물로 막힌 유배지 혹은 절해고도 같은 기억뿐이다. 높은 산과 깊은 강, 늦게 뜨고 일찍 지는 해와 음산하고 처량한 달빛, 온갖 가난과 고통의 질곡들, 책보와 오동잎 우산과 초근목피의 배고픔, 지긋지긋한 감자와 옥수수, 대남방송과 군인들의 거친 욕설과 어디에나 있던 삐라들. 그 속에서 나는 그렇게 모질게도 살아왔다.

그러니 저 산과 강 너머의 또 다른 세계를 동경했음은 당연한 이치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읍내로의 가출과 영화관람, 그리고 단 한 번의 결석과 농땡이는 그곳에서 벗어나고픈 나름 처절한 일탈과 몸부림이 아니었나 싶다.

내 나이 열아홉이 되어서야 대학에 들어가면서 그 지긋지긋한 강원도 산골을 마침내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때 심정은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의 “어디라도 좋다.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하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동경대(東慶大) 불교학과에 입학했지만 불교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지라 참 많은 절망과 번민, 그리고 방황을 함께 했다. 그래서 난 다시금 독서와 여행을 통해 전국의 사찰과 산하를 떠돌며 자연과 사람, 그리고 삶과 깨달음에 대하여 보고 듣고 느꼈었다. 

그러나 미당 서정주의 시처럼 “길은 어느 곳에나 있지만, 길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는 바로 그 느낌이었다. 그 숱한 불면의 밤과 수 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나를 키우고 일으켜 세운 것은 팔할이 바람(願) 혹은 바람(風)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곳을 떠나 새로운 세상을 향한 간절한 바람(願)과 운수(雲水)와도 같은 바람(風)이 나를 키우고 불가능한 꿈을 꾸게 하였으리라. 그렇게 스물네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었다. 그리고 다시금 나는 스물네 살의 세모(歲暮) 무렵에 드디어 덕숭산 수덕사로 출가를 감행하였다.

왜 출가를 해야만 했는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리 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다만 출가를 함으로써 남들이 가지 않는 그 길을 한번 가보고 싶었다. 아니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불가능한 꿈을 내가 이루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그 날의 결심은 훗날 생각해봐도 참 잘한 일생일대의 ‘위대한 포기’이자 ‘탁월한 선택’이 아닌가 생각한다.

출가해 3년간 원담 노스님을 시봉하다가 드디어 선방으로 향했다. 정말이지 한 평생 없다손 치고 치열하게 용맹정진해 깨달아서 참 도인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그리 말처럼 쉬운가? 또다시 숱한 절망과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는 마음 가득 상처를 입은 채, 또 다른 일탈과 자유를 꿈꾸며 만행(萬行)으로서 전 세계 배낭여행을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선방과 세상을 넘나드는 청산과 백운의 이중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이 또한 내 삶과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전기이자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배낭여행은 10여년 간에 걸쳐 130여개 나라를 떠돌게 만들었다. 다만 여름, 겨울의 수선안거는 가급적 지키면서 주로 봄, 가을의 해제철에 배낭여행을 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나와 사람들, 그리고 세상에 대한 모든 생각과 비전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참 나를 찾는 여정에서 전혀 새로운 나로 거듭 난 것이다. 여행은 그렇게 나를 변화시키고 성숙하게 했다.

여행은 또 다른 나를 찾는 과정이자 내 오랜 바람의 실현이었다. 나는 그렇게 어린왕자나 선재동자라도 된 듯이 새로운 삶과 사람들, 그리고 세계를 끊임없이 유력하면서 무언가를 찾아 떠돌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길 위에서 나만의 한 길로 나아갈 수가 있었다. 나의 온 몸과 마음이 그대로 한줄기 바람이자 허공과 같았으니 여정(旅程), 그 자체로 보상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런 후에 다시금 교육원에서 소임을 맡아 9년간 어수(‘어쩌다 수도승首都僧’ 줄임말)이자 행정승으로 살아왔다. 이 또한 내 삶과 수행의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게 떠돌았으니 그에 따른 일종의 ‘밥값’이자 ‘재능기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동안 조계종 학인대회를 함께한 학인 스님들과 해외순례 연수를 함께한 동참대중 여러분들의 노고와 열정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왜 안될 게 뭐야!”라며 도전하고 실천함으로써, 마침내 현실로 이루어 온 것이 스스로 대견스럽고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아마도 모든 이의 바람이었기에, 그들과 더불어 함께 함으로써 마침내 그 꿈을 현실로 이룰 수 있었다고 믿는다.

이제 교육원 9년을 갈무리하며 나는 또 다른 불가능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소임을 마치면 지중해 연안 국가와 서부 아프리카를 여행한 후에 다시 선방으로 들어가 참선수행을 할 것이다. 그리고 작은 구멍가게를 인수해 구멍가게 사장 겸 그 동네 이장을 해 보고 싶다. 더불어 북 카페나 북 스테이는 물론 시골동네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농촌재생 모델을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

또한 불교적 이념에 기초한 사회적 기업을 운영해보는 사회적 기업가가 되고 싶다. 내가 출가할 적에 고민했던 물품보관이나 스님 네의 휴식공간 및 화합과 상생의 승가공동체를 사회적기업의 형태로 건설해보고 싶다. 아울러 키바(KIVA) 형태의 소액대출을 하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누구나 참여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모델로 한번 운영해보고 싶다. 

그런 후에는 다시 배낭을 둘러맨 채 인도 갠지즈강이나 티베트 혹은 네팔의 히말라야를 여행하고 싶다. 그리하여 그곳 어딘가에서 여행자로서 바로 그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한 채, 그곳에서 화장하여 허공에 흩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곳의 허공과 바람으로 항상했으면 한다. 하나의 바람이 천개의 바람이 되어 온 세상에 천 개의 연꽃과 천 분의 부처로 화현하기를 빌어본다.

진광 스님 조계종 교육부장 vivachejk@hanmail.net

 

[1491 / 2019년 6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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