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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대중은 평등할 수 없다?

기자명 유정길
  • 법보시론
  • 입력 2019.06.11 10:30
  • 수정 2019.06.11 11:29
  • 호수 1492
  • 댓글 3

52%의 신도가 십일조, 개인당 월 33만원의 헌금
한 사람을 알려면 현재 그가 어떤 친구들을 만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더 깊이 알려면 그가 어디에 시간을 많이 쓰는지 알면 된다. 나아가 그 사람이 현재 버는 돈 중 어떤 부분에 가장 많이 쓰는지를 보면 더욱 깊이 알 수 있다. 2008년 발표된 바른교회아카데미 여론조사에는 개신교인의 52.1%가 수입의 10분의1 이상을 정기적으로 십일조 헌금을 하고, 그 이상을 내는 사람도 20.4%나 됐다. 가구당 헌금액은 연평균 345만원이고 감사헌금이나 건축헌금을 포함하면 연평균 400만원이라고 했다. 매월 평균 33만원 정도다. 

인연과보를 믿는 우리는 현재 발생하는 모든 것이 우리가 받을만해서 받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기독교가 현재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과거에 했던 행동의 결과이다. 매주 1~2회 교회를 나가고,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수입의 1/10을 헌금하고, 수시로 봉사를 하고, 거리와 전철에서 전도를 하고, 목숨을 걸고 해외선교를 다니는 그들의 인연에 따른 과보인 것이다. 종교적 신심과 신행의 강도와 헌신의 밀도가 높으면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돈도 많이 모이고, 큰 건물도 짓게 되고,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오히려 최근 개독교라는 이미지 추락으로 그들이 애쓴 것에 비해 영향력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불자인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성장하는 이웃종교와 단순 비교하며 질투어린 비난을 하는 것은 인과의 이치를 믿지 않는 것이다. 현재의 불교는 이제껏 우리가 해온 과거의 결과이다. 우리의 미래는 내가 지금 결심해 실행하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부대중의 평등은 1/4의 책임성
열심히 수행하고 노력하는 스님도 많지만, 무위도식하는 스님도 많은 듯하다. 교회를 성공시키려고 치열하게 노력하며 종교적인 서비스에 최선을 다하는 목사와 달리, 애쓰지 않고 불교가 융성하길 바란다면 그야말로 연목구어라 하겠다. 또한 자칭 불자라면서 꼬박꼬박 법회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십일조까지는 아니지만 삼보를 위해 보시하는 것도 아니며, 마음을 닦거나 수행도 하지 않는다면 대체 스스로 불자라 명명할 근거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4명이 동업한 회사에서 빚을 졌다면 4명이 그 빚의 1/4씩을 골고루 나눠야 한다. 그리고 사고로 결원이 있다면 나머지 사람이 균등하게 피해를 나누어야 진정한 주인이다. 4부대중이 평등하다고 하면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똑같이 1/4의 책임과 역할을 해야 한다. 불사, 염불, 간경, 주력, 참선 등 수행도 똑같이 해야 하고 보시도, 포교도 스님이나 재가자나 같은 수준의 책임을 갖고 있어야 평등하게 대접받을 자격이 있는 것 아닐까? 주장만 불자인 사람에게 곳간 열쇠를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그저 불교단체의 월급 직원인 사람에게 4부대중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삼보정재를 결정할 권한을 줄 수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나마 비구 비구니 등 2부대중은 책임을 져야할 사람이라는 외양적 보증이 있다. 하지만 신뢰가 점검되지 않은 재가자에게 동등한 권한을 위양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 재가자들도 할 말이 없지는 않다. 책임질 기회를 부여받은 적 없이 그저 스님들이 모든 것을 쥐고 있고, 설법과 교시에 따르는 위계적 관계 속에 수동적 신자로 만들어 온 것도 스님이라고 원망할 수 있다. 옳은 이야기다. 가르치고 알려줘야 할 스님에게 우선적 책임이 있다.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시각에서 불교의 주인은 나
그러나 내가 항상 주인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해결의 주체도 바로 ‘당신’이 아닌 ‘나’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항상 고요하고 닦으면 그곳이 바로 불교이고 절이며 수행공동체”라던 서암 스님 말씀이 떠오른다. 부처님도 열반하시면서 “법에 의지하고 자신에 의지하라”고 했듯이 법의 주인은 나이다. 지금 출가자가 줄어들고 있어 앞으로 스님 없는 사찰들이 늘어 날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책임 있게 삼보정재를 맡을 주체가 더욱 많아져야 한다. 스스로 담마불교의 주인으로 원력을 갖고 정진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불교의 바람직한 미래이자 불교의 희망이다.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 ecogil21@naver.com

 

[1492호 / 2019년 6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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