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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다시 출가를 하며 ① - 진광 스님

기자명 진광 스님

“어머님! 자식 하나 없는 셈 치고 부디 강녕하세요” 

대학 졸업 얼마 앞두고 출가해 
눈물로 부모님께 편지 쓰고 와

섬김 받으러 온 것이 아니기에 
모든 이를 섬기러 절에 왔으니 
매순간 매일매일 새 출가 꿈꿔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매 순간 우리는 새로운 선택과 실천의 기로에 서 있다. 두 갈래의 길에 선 채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하고 절망하며 방황하는 것이 바로 인생길이다. 그 순간 어떤 길을 선택하고 걸어왔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일생은 달라진다. 그런 까닭에 나는 매 순간, 매일 매일이 선택이자 출가(出家)가 아닌가 생각한다.

대학생활 동안의 기록들을 모아 ‘석천세설(石泉世說)’이란 작은 소책자를 만들고 부제로 미당 서정주의 “길은 어느 곳에나 있지만, 길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라는 싯구를 적었다. 그리고는 통도사 지형 스님께 한권 드리니 단 한 페이지도 펼치지 않고 “왜 길은 어느 곳에나 있지만 길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고 했나요?”라고 물으신다. 그냥 멋있으라고 써 놓은지라 대답을 못하니 다시 당신께 물어보라 하시어 물으니 “당신이 이미 그 길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엄청난 충격과 전율을 느꼈다.

이후 존경하는 호진(浩眞) 스님께 출가의 뜻을 밝히니 “어느 한 길을 선택한다고 하는 것은 다른 모든 가능성의 길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비로소 출가를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의 출가는 이 두 분의 자비와 덕화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스물 네 살의 세모(歲暮)에 충남 예산 덕숭산 수덕사로 출가를 하게 되었다. 경주에서 대전을 거쳐 예산에 이르는 차안에서 바라본 예산평야의 너른 들판과 지평선 너머로 지는 석양이 참 보기 좋았다. 저녁 무렵 수덕사 아래의 사하촌에 도착해 허름한 여관에 하룻밤을 묵었다. 그때만 해도 사하촌은 정비가 안 된 시기라 일주문 앞에 음식점이며 다방과 여관이 즐비했다. 밤새 전혀 새로운 길과 운명에 대해 많은 번민과 고뇌를 했었다.

친한 벗인 ‘중도(中道)’가 아침에 목욕탕 간다고 하니 건네준 만원짜리 지폐를 어루만지며 중노릇을 잘하리라 다짐도 했다. 강원도 시골의 부모님 생각에 눈물이 절로 흘러내려 내 마음을 적신다. 잘 키워 대학 졸업을 얼마 앞두고 출가를 한 아들 때문에 얼마나 가슴 아파하실까 생각하니 더욱 짠한 기분이다. 

아무 말도 없이 온지라 눈물로 부모님께 마지막 편지를 썼다. “자식 하나 없는 셈 치고 부디 강녕하시고 행복하시라”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이걸 받아보시면 아마도 자식 군대에 보내놓고 받는 소지품처럼 억장이 무너지실 게다. 평생 받기만 하고 효도 한번 못한 채 이리 출가를 해버렸으니 어릴 때 일찍 죽은 두 누이를 가슴에 묻는 심정과 같으실 게다. 아마 처음에는 부정하시다가 이내 체념하고 눈물도 다 말라 버리시리라. 부디 불효한 자식일랑 다 잊으시고 행여 바람소리에 문을 여는 등 헛된 기대를 안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늦은 밤 밖으로 나가 일주문을 서성여본다. 과연 여기서 중노릇 잘하며 살 수가 있을지, 못 견디고 금세 도망치지나 않을지 만감이 교차한다. 많은 이가 나와 같이 이곳에서 번민하다가 산문을 지나 출가를 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체념한 채 일주문을 등진 채 세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일주문은 오늘의 이 더벅머리 총각을, 그 마음을 기억이나 할는지 모르겠다. 옛말에 야심성유휘(夜深星愈輝)라고 했던가, 일주문 위로 밤의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눈이 시리도록 밝기만하다. 부모님 계신 곳의 별님을 향해 마지막 큰절을 눈물로 드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수덕사 뒷산인 덕숭산을 올랐다. 정혜사에 이르는 1080계단을 오르며 바라본 소림초당이며 마애관음석상, 그리고 향운대와 만공탑이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은 느낌이다. 아마도 전생의 언젠가 이곳에서 살았던 듯이 마치 고향에 다시 온 듯 한 느낌이다. 그리 높지 않은 500m도 채 안 되는 정상에 올라 고함을 한번 내지르며 내가 왔음을 고했다. 정상에서 바라다 보이는 수덕사의 풍광이 가슴 시리게 내안에 들어와 파문을 일게 한다. 

발자크의 불후의 명작인 ‘고리오 영감’에서 청년 라스티냐크가 고리오 영감을 초라하게 장례지낸 후 파리시내를 바라보며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사회에 도전하려는 첫 행동으로 라스티냐크는 뉘싱겐 부인 집으로 식사를 하러갔다”라는 문장으로 끝맺음을 한다. 그렇듯이 나도 “이제 불교 혹은 부처와 나와의 대결이야!”라고 마음먹으며 이내 산을 내려가 바로 수덕사로 출가를 하였다. 아니 금오 노스님께서 출가를 할 적에 보은에서 법주사로가 아닌, 상주에서 속리산 정상을 올랐다가 내려가서는 법주사로 출가하신 것을 본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스물네살 청춘을 덕숭산에 바쳤다.

그 뒤에 강원을 가고 선방을 가고 여행을 시작하거나 서울 총무원에서 소임을 볼 때마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나는 가급적이면 어렵고 힘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 모든 순간들이 나에겐 또 다른 의미의 출가와 같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또 다시 새로운 출가를 꿈꾼다. 그렇게 매 순간이 ‘출가(出家)’와 같은 삶이자 ‘귀가(歸家)’와 같은 죽음을 꿈꾸어본다. 어쩌다보니 내 이름으로 된 ‘나는 중이 아니야’라는 졸저(拙著)를 세상에 내 놓게 되었다. 실로 부끄럽고 욕되기는 하지만, 지난 생을 정리하고 새로운 길과 희망, 그리고 깨달음을 위한 또 다른 의미의 출가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중(中)도 상(上)도 아닌, 중하(中下) 혹은 지하(之下)이다. 나는 누군가의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섬기러 왔기 때문이다. 권위와 겁박이 아닌 자비와 친절로, 위가 아닌 아래로, 신이 아닌 인간에게로, 부처가 아닌 중생에게로 나아가고 싶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출가정신이자 참 출가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나는 중이 아니므로 하여 도리어 참 중이 되는 것이다. 

나는 매 순간, 매일 매일을 또 다른 출가(出家)를 꿈꾼다.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와 나 자신으로부터의 ‘버림’과 ‘떠남’이 참 출가이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나는 본래 내 집으로 돌아가려는 귀가도중(歸家途中)의 영원한 나그네이다. 저 멀리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어머님이 나를 향해 손짓해 부르시는 듯하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그만 둘 수는 없지 아니한가? 가던 길 앞에 있으니 아니 가고 어찌할꼬. 

진광 스님 조계종 교육부장 vivachejk@hanmail.net

 

[1493호 / 2019년 6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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