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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법성게’ 제25구: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

기자명 해주 스님

망상을 쉬면 무연으로 여의를 잡으니, 훌륭하고 교묘한 선교라 한다

무연은 무분별, 선교는 무주
착여의는 여래의 뜻 얻는 것

무연선교로 여의 잡는다는 건
반정즉시 법문으로 이해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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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분별 무주인 무연 선교방편
망정 돌이키는 반정의 방편

일체의 경계에 집착 없어야
여의를 얻을 수가 있으므로
그래서 무연이 선교방편 돼

화엄행자가 본제에 돌아가 망상을 쉬어서, “무연의 선교로 여의를 잡는다”고 한다. ‘법성게’ 제25구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이다. 의상 스님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분별을 반대로 되돌려 무분별을 얻는 것을 ‘연이 없다(無緣)’라고 이름한다. 이법을 따라서 머무르지 아니하므로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善巧]’이라고 이름한다. 말씀대로 수행하여 성자의 뜻을 얻으므로 ‘잡는다(捉)’라고 이름한다. ‘여의’는 앞과 같다.(일승법계도)

‘여의(如意)’란 비유를 따라 이름 붙인 것이다. 여의보왕(如意寶王)이 무심히 보배를 비내려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데 연을 따라 끝이 없다. 석가여래의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 또한 이와 같아서, 일음(一音)으로 펼친 것이 중생계를 따라 악을 없애고 선을 일으켜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데, 어디든 필요한 곳에 따라서 여의롭지 않음이 없는 까닭에 ‘여의’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일승법계도)

‘무연’이란 무분별이고 ‘선교’란 무주이며, ‘착여의’의 ‘착(捉)’이란 가르침대로 수행하여 여래의 뜻을 얻는다는 것이다. ‘여의’란 석가여래의 가르침인 일음 또는 여래가 중생을 이익되게 함이 자재한 것이니, 석가여래가 일음으로 연을 따라 중생을 이익되게 하되 자재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진기’에서도 무연의 선교란 무분별이라고 한다. 무연의 선교방편에 자재하게 됨이 바로 착여의이고, 무연선교가 무분별 무주로서 곧 착여의인 것이다.

‘법융기’에서는 행자가 본래 자리에 돌아가고자 하면 반드시 망상을 쉬어야 하고 망상을 쉬고자 하면 반드시 연이 없어야 하므로, “파식망상필부득” 다음에 “무연선교착여의” 구절이 이어진 것이라고 한다.

본제에 돌아간 행자는 아집을 일으키는 기심(起心), 망상을 끊으려는 단망(斷妄), 불법을 바라고 구하는 희구(希求) 등의 망상을 끊을 뿐만 아니라, 망상이 본래 없는 것임을 깨달아 망상을 쉬게 된다. 

망상을 쉬면 무연으로 여의를 잡으니, 이것을 ‘훌륭하고 교묘한 선교(善巧)’라 한다.(법계도주) 선교는 방편이니 ‘진기’에서는 방편의 의미에 대하여 법을 들을 때 마음이 밖으로 반연하지 않고 오로지 이 법에 의거하여 계속 사유함이 ‘방(方)’이며, 이로 말미암아 마음이 법에 익숙한 것이 ‘편(便)’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면 무연의 선교방편이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진성수연의 연기문은 모두 일승보살의 수행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째서 무연이라 했는가? 그보다 먼저 무엇이 연(緣)인가?  

‘연이 없다[無緣]’라는 것은 무엇인가? 

오식(五識)이 오진(五塵)의 경계를 반연하는[緣] 때에 의식이 함께 반연하고, 그 말나는 곧 안으로 향하여 아(我)에 집착하고, 아려야본식은 세 종류의 경계를 반연하니 그러므로 여의를 잡을 수 없다. 연이 없기 때문에 성자의 뜻을 얻을 수 있음을 이름하여 ‘잘 여의를 잡는다’고 한다.(법융기)

여기서 ‘연’이란 전5식·제6의식·제7말나식·제8아려야식(아뢰야식) 등 8식의 대상이다. 제8식이 반연하는 경계는 종자와 전오근(前五根)과 기세간의 세 가지이다. 8식이 그 대상인 경계를 분별하고 따라가 집착하므로 일승의 가르침인 여의를 따라 잡지 못한다. 일체 경계에 집착이 없어야 여의를 얻을 수 있으니, 그래서 무연이 선교방편이 된다.
 

해인사 대장경정대 모습. 1993년, 김인화 촬영.
해인사 대장경정대 모습. 1993년, 김인화 촬영.

중생의 염오심은 대상에 따라 흔들리고 움직인다. 경계에 흔들리고 물드는 것이 중생이다. 우리는 보통 마음을 인식하는 주체로만 생각하는데 그 마음을 바로 보려면 그 마음을 대상화시켜야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니, 만들어진 모든 것이 바로 마음이다. 다시 말해서 대상인 모든 경계가 다 자기 마음이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등이 다 내 마음인 것이다. 보는 마음, 듣는 마음 등이 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등과 다르지 않다. 대상화 된 마음이 바로 주관적으로 보는 마음이니, 주관과 객관이 다 마음이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인 경계에 자재한 것이 무연임을 알 수 있다. 

‘대기’에서는 선교로 여의를 잡는 것을 장님이 자신의 보배장소에 연결된 끈을 잡아서 그곳으로 돌아감에 비유하고 있다. 행자도 그러해서 지혜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안으로 증득한 법성의 보배 있는 곳을 미혹하여 궁핍해서 다른 이에게 구걸하다가, 성자의 대비의 원에 의해서 다라니의 끈을 잡아서 법성보배집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 다라니는 연기다라니이다. 성자가 이 연기다라니의 ‘하나 가운데 일체이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다’ 등의 한 끈을 행자의 신심의 손에 쥐어주고, ‘진성이 매우 깊다’는 다른 한 끝을 증분의 보배집에 매고는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행자가 믿고 받아서 성자의 뜻을 얻어 여의의 가르침을 잡으면 처음 발심하는 때에 문득 십안(十眼)을 열어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곧바로 안으로 증득한 법성의 보배 있는 곳에 들어가서 다함없는 자기 집의 진귀한 보배를 받아쓰게 된다는 것이다. 

십안이란 부처님의 열가지 눈으로서 육안 내지 일체지안(一切智眼)의 보안(普眼)이다. 처음 발심하는 때에 문득 십안을 연다는 것은 정각을 얻어 부처님이 된다는 것이다. 

방편은 지혜를 기준으로 한 말이며, 또한 방편은 성자의 뜻을 기준으로 설한 것이다. 지혜란 일승에 들어가는 지혜이니, 선교방편의 지혜는 모든 근기의 이익을 볼 수 있는 지혜인 것이다. 성자의 뜻이란 교화하는 위대한 성인이 훌륭한 방편으로써 일승가운데 삼승을 나누어 설해서 중·하근기 중생을 이끌어 근본의 일승으로 들이는 것이다.(대기)

행자가 ‘일중일체다중일’과 진성수연의 끈, 즉 여의의 가르침에 의해 법성의 보배처소에 이른다는 것은 선재가 선지식의 해탈법문을 통해 법계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선지식은 법계로 향해가는 점차적인 단계가 아니라 하나의 지위가 일체의 지위인 일위일체위(一位一切位)의 일승보살도를 다양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선재동자 역시 초발심에 해탈하여 법계에 들었으며[入法界] 계속해서 선지식들을 만나 무수한 해탈문을 증득하는 것은, 중중무진으로 불세계를 장엄하는 화엄일승보살도를 펼쳐 보이는 것이다.

의상 스님은 ‘자서’에서 대성인의 선교방편은 일정한 방소가 없음을 ‘반시’가 한 줄로 이어진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으니, 한줄로 나타낸 일음의 여의교가 일승원교의 방편인 것이다. 그런데 그 한 줄이 54각으로 구불구불한 것은 눈먼 장님으로 비유되는 중생의 근기에게 필요한 삼승방편 그 자체가 일승의 방편임을 상징하고 있다. 

삼승을 돌이켜 별도의 일승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삼승 자체가 바로 일승이고 일승 외에 따로 삼승이 없는 별교일승의 선교가 무연선교이다. 미혹한 이를 인도하고 꿈꾸는 이를 깨우는 방편이 실은 다 성자의 훌륭하고 교묘한 일승의 방편이다. 여래가 중생을 거두는 선교방편의 뜻은 하나여서 둘이 없으니, 삼승 또는 오승이 모두 일승의 방편이라는 것이다. 

또 반시에서 굴곡 있는 한 길인 도인은 육상의 선교방편임을 보인 것이기도 하니, 육상설이 법성가(法性家)에 들어가는 요문(要門)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육상은 관법으로도 실천되어 졌다. 관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연기관(緣起觀)과 성기관(性起觀)이 대표된다. 육상설은 보통 연기 제법을 관하는 수행법으로 중요시된다. ‘일승법계도’에서는 육상을 보이는 도인이 바로 지정각세간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법계연기의 보살도가 법성가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분별 무주인 무연선교로 여의를 잡는다는 것은 ‘반정즉시(反情卽是)’의 법문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즉 무연의 선교방편이 곧 망정을 돌이키는 반정(反情, 返情)의 방편이라 하겠다. 

반정방편이 한량없는데 그 핵심은 보이는 것에 집착함이 없고, 들리는 법에 집착함이 없는 것이다.(도신장) 보고 들리는 것에 집착함이 없고, 보고 들리는 법에 자재한 반정의 방편이 바로 무연의 선교방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정즉시’가 곧 무연의 선교로 여의를 잡아서 법성가에 돌아가는 것이라 하겠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94호 / 2019년 6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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