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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㉖ 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⑤

기자명 최병헌

선덕여왕, 부정적인 여왕 여론 불식 위해 황룡사 9층탑 조성

선덕여왕 즉위 순탄치 않아
‘나라 사람 추대’ 명기가 증거

여왕 예지력 관련 기록 많아
불만 잠재우려는 욕구 반영

고구려와 백제 침략에 맞서
당나라와 적극적 연맹 모색

당 태종의 여왕에 대한 불만
비담·염종 반란으로 이어져

​​​​​​​즉위 후 불교통한 위상 강화
위기 맞아 권위적 상징 필요

경주의 황룡사 목탑지 전경.
경주의 황룡사 목탑지 전경.

27대 선덕여왕대(632〜647)는 내우외환이 겹친 국가적 위기를 맞은 시기였다. 우선 선덕여왕은 즉위과정부터 순탄하지 못하였다. 부왕인 진평왕이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맏딸인 덕만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귀족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진평왕 54년(632) 정월에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기 바로 8개월 앞서 이찬 칠숙(柒宿) 등의 반란 모의가 발각되어 9족이 멸망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삼국사기’ 진평왕조에서는 반란의 이유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왕위계승과 관련된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선덕여왕 말년인 16년(647) 정월 상대등 비담(毗曇)의 반란 사건의 혼란 중에 여왕이 의문의 사망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삼국사기’ 선덕왕조에서는 반란의 이유로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명기하고 있었다. 즉위과정과 사망경위를 종합하여 볼 때 선덕여왕의 재위 16년간은 왕위가 상당히 불안한 시기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삼국사기’ 선덕왕조에서는 “(진평)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國人)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고 하였는데, 특별히 왕을 추대한 사람으로 ‘나라 사람’을 명기한 것을 보아 왕실을 비롯한 귀족들의 논의과정을 거쳐 어렵게 결정되었으며, 결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논의과정에서 여왕의 즉위를 지지한 인물로서는 즉위 직후에 나라의 정사를 총괄하는 책임을 맡은 종실의 대신 을제(乙祭)를 비롯해서 5년(636) 정월에 상대등이 된 수품(水品), 6년(637) 정월에 서불한(舒弗邯, 1등 관계인 伊伐湌의 다른 이름)에 오른 사진(思眞)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인 지원자는 진평왕과 사촌형제 사이로 사위가 되었으며, 선덕여왕의 제부이기도 한 용수(춘)였다고 본다. 그는 선덕여왕 4년(635) 10월 수품과 함께 지방의 주·현을 두루 돌며 위문하고 있었는데, 민심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용수는 왕 14년(645) 국왕의 위상을 강화하고 국가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가시적인 사업이나 상징물로서 황룡사 9층탑을 조성할 때에 그 공사를 감독하는 책임을 맡기도 하였던 것을 보아 왕위계승을 합리화하고, 그 체제를 굳혀나가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본다. 

‘삼국사기’ 선덕왕조에서는 국왕의 여자로서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성조황고’라는 존호를 올렸고, 왕의 자질로서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고 하여 자질과 인품을 극찬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선덕왕조와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條)에서는 선덕여왕이 미리 알아보는 예지력이 뛰어났음을 전하는 설화를 싣고 있다. 첫째는 선덕여왕이 즉위하기 전인 진평왕 때에 당태종이 모란꽃 그림과 씨를 보내왔는데, 덕만은 그 꽃이 향기가 없을 것을 알아보았다고 하며, 둘째는 선덕여왕 5년(636) 5월 궁궐 서쪽(또는 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두꺼비(또는 개구리)가 많이 모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남쪽 변경의 옥문곡(玉門谷, 또는 女根谷)에 군사를 보내어 그곳에 숨어있던 백제의 군사를 모두 죽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은 약간의 다른 사실을 전하고 있으나, 신라의 장군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백제의 장군 우소(于召) 등의 인명과 부산(富山) 아래의 여근곡(女根谷)의 지명 등을 고려할 때 역사적인 사실에 바탕을 둔 설화로 보인다. 셋째는 낭산(狼山) 남쪽인 도리천(忉利天) 가운데 장사지내라는 선덕여왕의 유언이 뒷날 문무왕 때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함으로써 사실로 적중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덕여왕의 예지력을 설명하는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인 내용이 뒤섞여 있고 뒷날에 부회된 내용의 설화형태지만, 선덕왕의 여왕으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돋보이게 함으로써 여왕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고 국왕의 권위를 드높이려는 당대인들의 욕구가 반영된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한편 3국 가운데 가장 후진적이고 약소한 국가였던 신라는 24대 진흥왕대(540〜576) 한강유역과 낙동강 서쪽 지역을 점유함으로써 3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역 확장의 결과는 뒷날 신라에 엄청나게 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이후 100여 년간 신라는 옛 땅을 회복하려는 고구려와 백제의 양대 강적을 맞아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신라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하여 중국의 남북조 왕조들과의 빈번한 교류를 통해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589년 수에 의해 중국대륙이 통일됨에 이르러 고구려를 칠 것을 요청하였고, 618년 수를 이은 당에 대해 고구려가 조공로(朝貢路)를 막는다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고구려가 수양제의 침입과 살수대전, 당태종의 침입과 안시성싸움 등 중국의 침입세력과 사활을 건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남쪽의 백제는 신라에 대한 침공을 계속하였다. 특히 선덕여왕 10년(641) 백제의 의자왕이 즉위하면서 군사활동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고, 그 다음해(642)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보장왕을 옹립하고 무단통치를 감행하게 되면서 두 나라의 신라에 대한 정치적 압력과 군사적 침입은 더욱 강화되었다. 선덕여왕 때는 대내적으로 정치적인 불안에 겹쳐 대외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받는 절박한 위기 상황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선덕여왕 11년(642) 7월 백제 의자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의 서쪽 40여성을 쳐서 빼앗고, 이어 8월에는 고구려와 함께 모의하여 당항성(党項城, 경기도 남양)을 빼앗아 당과 통하는 길을 끊으려고 하였기 때문에 신라는 당태종에게 사신을 보내어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때까지는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에 대한 침공이 각각 별개로 행해져 왔었는데, 이제 두 나라는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신라를 협공하는 형세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에 더욱 위기의식을 갖게 된 신라는 당과의 적극적인 연맹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로써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고구려·백제의 남북연합세력과 신라·당의 동서연맹세력의 대결로 양분되기에 이르렀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삼국통일전쟁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백제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의 당에 통하는 길을 막으려는 군사행동을 감행했던 같은 달에 장군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경남 합천)을 공략케 하였다. 신라에게 대야성은 낙동강 서쪽의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백제에게 함락 당함으로써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게 되었다. 더욱 대야성이 함락당할 때 김춘추의 사위인 도독 품석(品釋) 부부가 함께 죽임을 당함으로써 신라왕실의 충격은 더욱 컸던 것 같다. 이에 신라는 대야성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하여 그해 겨울에 김춘추를 적국인 고구려에 파견하여 군사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보장왕은 원래 고구려 땅이었던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것을 거절한 김춘추를 별관에 억류하였다. 이 소식을 탐지한 신라는 대장군 김유신에게 명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 보장왕은 이 소식을 듣고 김춘추를 돌려보냈으나, 결국 고구려의 군사적 지원은 받을 수 없었다.

고구려로부터의 군사적 지원에 실패한 신라는 다음 해인 선덕여왕 12년(643) 정월과 9월 연이어 당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으로 야기된 위기를 호소하고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신라에 대한 지원계책을 말하는 가운데, 여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그대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으니, 이는 임금을 잃고 적을 불러들이는 격이 되어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내가 친족의 한 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임금을 삼되, 자연 혼자서는 임금 노릇을 할 수 없을 것이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어 호위케 하고, 그대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그대들 스스로 지키는 일을 맡기려고 한다.” 당태종의 제안에 대해 신라 사신은 답변을 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는데, 신라 조정에서도 쉽게 결정을 보지 못하고 귀족세력은 여왕에 대한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신라에서는 당태종의 제안을 계기로 하여 여왕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국왕의 교체를 주장하는 세력이 대두하게 되었다. 선덕여왕 14년(645) 11월 이찬 비담이 상대등에 오른 것은 여왕에 대한 불만세력이 전면에 등장한 것을 말한다. 선덕여왕 16년(647) 정월 마침내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 불만세력은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고 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용수·김춘추 부자와 김유신을 중심으로 여왕을 지지하고 그 체제를 고수하려는 세력에 의해 비담의 반란은 마침내 진압되었으나, 선덕여왕은 반란의 혼란 가운데 의문의 죽음을 맞기에 이르렀다.

국왕의 위상 강화와 국가의식 고취의 상징물인 황룡사 9층탑의 조성은 실로 이와 같은 내우외환의 국가적 위기와 국왕 권위의 불안정한 가운데서 추진되었다. 선덕여왕은 일찍이 즉위 3년(634) 정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면서, 동시에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하였고, 다음해(635)에는 당으로부터 신라왕으로 책봉을 받으면서 영묘사(靈廟寺)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636)에는 여왕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백고좌회를 개최하여 ‘인왕경’을 강론케 하고, 아울러 100명의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선덕여왕은 즉위 초기부터 사찰의 건축과 호국법회의 개설을 통해 불교신앙을 통한 왕의 위상강화를 추진해 왔었다. 그러나 선덕여왕 11년(642) 이후의 국가적 위기와 국왕 권위 실추 상황은 좀 더 가시적 사업이나 권위적인 상징물이 요구되었다. 마침 선덕여왕 12년(643) 자장(慈藏)의 귀국, 김춘추의 대당외교와 김유신의 군사활동을 통한 실세로의 등장이 맞물려 이루어진 사업이 황룡사 9층탑의 조성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95호 / 2019년 7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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