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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성문(聲聞)

기자명 현진 스님

부처님 가르침 듣고 깨달음 얻은 출가제자를 지칭

연각·보살, 대승불교 상징 명칭
성문은 초기·부파불교 출가제자
성문, 범어 ‘싀라와까’ 옮긴 말
‘듣는 이’ ‘학생’의 의미서 유래

‘성문’이란 말에는 ‘연각・보살’이란 말이 항상 뒤따른다. 연각(緣覺, 스승 없이 홀로 정법을 깨달은 성인)과 보살(菩薩, 깨달음을 이룬 중생)이 대승불교를 상징하는 명칭이라면, 성문(聲聞)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출가제자를 일컫는 말로 주로 사용된다. 보살이라는 용어는 불교 이전의 여타 인도사상에선 보이지 않다가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에서부터 이미 보이기 시작하지만 그 개념이 강조되고 내용이 풍부해진 것은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다. 그런데 그에 반해 ‘성문’이란 개념은 약간의 의미 차이를 지니긴 하지만, 불교 이전의 브라만교로부터 사용되어왔다.

‘성문’은 범어 싀라와까(śrāvaka)의 옮긴 말이다. 듣는 이나 학생 등을 의미하는 명사 싀라와까는 동사 싀리(√śri)에서 온 말인데, 정작 싀리의 의미는 ‘가다, 도달하다; 의지하다; 숭배하다’ 등일 뿐 듣는다는 의미는 지니고 있지 않다. 그래서 브라만교 기준으로 싀라와까의 어원을 살펴보면 ‘브라흐만의 상태에 가닿기 위해 신을 숭배하고 신에게 의지하여 노력하는 이’ 정도일 것이다. 그러기위해 그는 신의 가르침을 듣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일 것이며, 그래서 그런 이를 ‘듣는 이’ 혹은 ‘학생’이라 할 수 있기에 생긴 말이다.

범어로 성인을 가리키는 르싀(ṛṣi)도 이와 유사한 경우이다. ‘르싀’란 어리석은 보통 인간들과는 달리 절대신 브라흐만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렇게 전달받은 신의 음성인 베다(veda)를 읊조림으로써 인간들에게 전하는 자이기에 성인으로 추앙 받는 인물을 말한다. 그런데 그러한 ‘르싀’의 어원은 ‘가다, 움직이다’ 등의 의미를 지닌 동사 르스(√ṛṣ)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르싀와 싀라와까 둘 모두 ‘듣는 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 어원이 되는 동사 또한 둘 모두 ‘가다’라는 동일한 의미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인도는 청문(聽聞)문화이고 중국은 시각(視覺)문화라는 말이 있다. 고대로 가면 갈수록 인도문화의 모든 분야는 기억과 구술(口述)에 의해 유지가 되고 전승이 되었기에 ‘듣는 문화’란 말이 생겼으며, 이에 반해 중국은 대체불가의 한문(漢文)이란 든든한 문화자산을 가지고 이를 십분 활용하였기에 ‘보는 문화’란 말이 생긴 것 같다.

불교 이전의 인도 브라만교에선 절대상태이자 절대존재인 브라흐만(brahman)이 궁극적인 가치이다. 완벽한 존재인 브라흐만에 비해 너무도 결함이 많은 인간들은 설령 브라흐만이 올바른 가르침을 펼친다 해도 그것을 알아들을 귀가 열려있지 않다고 여겼다. 다만 ‘르싀’가 그것을 알아듣는데, 그것도 능동적으로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그저 ‘귀에 들려지는…’ 정도로 표현될 뿐이다. 인간을 나약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 이것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중생상(衆生相)의 원형이기도 하다. 그렇게 들려진 가르침을 가장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 글자가 아닌 입으로 전달하는 구전(口傳)이요, 그래서 그것이 인도 전통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브라흐만의 음성을 르싀가 들었다’고 일컫는 것이 아니라 ‘브라흐만의 음성이 르싀에 의해 들려졌다’라고 표현한다. 이는 완벽한 브라흐만에 비해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이인 중생을 감안할 때 당연하고도 적절한 표현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다분히 유아(有我)적인 그러한 표현이 무아(無我)를 내세운 불교경전에도 그대로 쓰였으니, 경전의 서두에 보이는 ‘여시아문(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실은, 나에 의해 이와 같이 들려졌다가 정확한 번역)’이 대표적인 문장이요, 그리고 이 성문(聲聞)이란 명칭 또한 같은 유형에 속한다. 다만, 브라만교에선 브라흐만의 절대성을 나타내는 유아적인 이유로 그런 표현과 명칭이 사용되었다면, 불교로 건너와선 성인이자 가르침의 스승인 부처님에 대한 존경의 표현으로 전용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496호 / 2019년 7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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