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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 주지 효광 스님

“죽음 앞둔 절박함으로 기도해야 행복의 길 찾을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느끼는 모든 고통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과 같은 것
악몽서 깨어나면 공포 사라지듯
자신이 만든 허상에서 벗어나야

불교서 출세는 돈·명예 추구보다
욕계·색계·무색계서 벗어나는 것
언제 어디서나 수행에 전념할 때
비로소 행복에 다가갈 수 있어

효광 스님은 “마음공부의 가치는 시방세계에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며 “영원히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진리에 대해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김영각 대구경북지사장
효광 스님은 “마음공부의 가치는 시방세계에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며 “영원히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진리에 대해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김영각 대구경북지사장

오늘부터 백중 때까지 49일간 기도를 시작합니다. 백중은 잘 알다시피 ‘목련경’에서 목련존자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목련존자가 지옥에 빠진 어머니를 제도하기 위해 백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대중에게 공양한 데서 유래했습니다. 그런데 목련존자의 어머니는 목련존자와 같은 아들이 있어서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런 아들이 없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설령 지옥에 가더라도 스스로 걸어 나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가 49일간 기도를 하는 것은 지옥에 빠지더라도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함입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다가옵니다. 아무리 숨고, 숨어도 죽음이라는 손님은 기가 막히게 찾아옵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생각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스스로 공연히 죽음을 만들고, 자신이 만든 죽음 속에서 두려워하고 헤매고 쫓기고 있습니다. 죽음은 꿈과 같은 것입니다. 가끔 맹수와 악인에게 쫓기고, 절벽 같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꿉니다. 꿈속에서는 너무 두렵고, 공포스럽습니다. 꿈을 깨지 못하면 맹수와 악인에게 쫓겨서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두려움에 쩔쩔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많이 있지요? 그런데 꿈에서 딱 깨어나면 어떻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두려웠던 맹수도, 악인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런데 그 꿈을 누가 만들어 줬습니까? 바로 내가 만든 것이지요. 내가 만든 꿈에서 스스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가 만든 허상인 것이지요. 

우리가 하는 49일간 기도는 내가 만든 꿈에서 깨어나자는 것입니다. 죽음도, 공포도 없는 모두가 행복의 길로 가자는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3가지 관문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어나는 관문입니다. 바로 출생입니다. 태어나는 데는 2가지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자기가 태어나고자 하는 어떤 의지와 원력을 가지고 태어나고, 어떤 이는 자기의지와 관계없이 인연소생으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내가 태어나면서 받은 이 몸을 자기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내 몸은 내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빌린 것입니다. 그 어머니, 아버지는 그 위의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빌린 것이고, 다시 그 어머니, 아버지는 그 위에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빌린 것입니다. 수많은 손을 빌리고, 거기에 비와 바람과 물과 곡식과 햇살 등 보이지 않은 수많은 인연을 빌려서 내가 지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라는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은 것도 아닙니다. 모두 빌린 것이기에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몸뚱이를 철석같이 자기 것으로 믿고 삽니다. 자기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절대 내 것이라는 것은 누구에게 주고 싶어도 줄 수 없고, 다른 이가 훔쳐갈 수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몸은 말씀드린 것처럼 모두에게 빌린 것입니다. 빌린 것이기에 돌려줘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빌린 것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흔히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인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인간이라도 늑대나 원숭이 무리에서 자라면 늑대 혹은 원숭이 노릇을 합니다. 사람 가운데 살았어도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짐승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이 되기 위해서는 만물의 영장이 되는 매뉴얼이 작동해야 합니다. 사람 가운데에서도 늑대와 같은 매뉴얼이 작동하면 짐승 같은 인간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만물의 영장이 되는 매뉴얼을 익혀야 합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누구나 성현이 될 수 있습니다. 성현의 매뉴얼이 작동하면 그대로 성현이 되는 것입니다. 삶을 성현의 매뉴얼로, 성현의 길로 뚜벅뚜벅 갈 때 비로소 성현 같은 존경 받는 인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관문은 출가를 하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출가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출생이라는 관문을 통과한 이후 출가를 통해 세 번째 관문인 출세를 하기 위함입니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출세는 돈이나 명예, 권력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출세는 돈이나 명예,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삼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삼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해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절박함이 있어야 합니다. 화두를 들었다면 앉으나 서나 무엇을 하더라도 화두를 들어야 하고, 염불을 했다면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염불을 해야 합니다. 

절에서 영가를 위해 49재를 지냅니다. 그런데 49재에 참석한 불자들은 영가와 자신을 구분합니다. 그런데 영가가 있는 그 자리가 그 영가가 아니라 자신이라고 여기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자주 말씀드렸지만, 내일보다 내생이 먼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남의 일처럼, 강 건너 불구경하듯 살아갑니다. 저 영가가 있는 위패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내 일이라는 생각, 그 절박함으로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전에 도반스님 둘이 포행을 가고 있었습니다. 깊은 강물 사이로 다리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스님이 함께 가던 도반스님을 다리 아래로 밀었습니다. 다행히 그 스님은 다리 아래로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 같은 그 순간 어떻게 합니까? 당장 자신을 밀어낸 스님을 향해 욕을 하면서 소리를 쳤겠죠. 그런데 그 스님은 “이 사람아! 화두 놓칠 뻔 했지 않는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다리에서 떨어질 뻔한 그 순간에도 그 스님은 화두를 참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은 스님들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합니다. ‘아 저렇게 화두를 들어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라고 하면서요. 수행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화두를 든다, 마음공부를 한다, 모두들 말로만 합니다. 다리에 떨어질 수 있는 그 순간에도 화두나 염불이나 기도를 놓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제대로 마음공부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떨어지는 순간, 다리 위를 쳐다보면서 “이 사람이 누구를 죽이려고 그러느냐”고 화를 낸다면 그것은 제대로 마음공부를 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은 한참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좀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수행을 한다면 동정일여, 숙면일여가 되어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깊은 잠을 자고 있으면 전화벨이 울려도 듣지를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번 기도에 들면 전화벨이 울려도 들리지 않아야 하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전화벨이 울리면 바로 들리고, 화두를 들어도 금방 망상에 빠집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도도, 수행도 아닙니다. 깊은 잠에 든 것처럼 한 번 기도에 들어갔다면 주변에서 어떤 요동이 일어도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침몰하는 배에 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배가 침몰하는 위기의 순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떻습니까? 침몰하는 배 안에서 작은 의자 하나를 더 차지하겠다고 싸우고 있습니다. 배가 곧 침몰한다는 그 사실은 새까맣게 잊고, 작은 이익만을 좇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법당에 들어왔다면, 옆에서 누가 뭘 하더라도 이야기 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수행, 기도를 위해 묵묵히 가야 합니다.  

영원한 자유의 길로 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도도하고 고고한 정신세계를 가져야 합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출가하기 이전에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왕자였고, 가진 것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싯다르타 태자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공부를 위해 출가를 했습니다. 왜 했겠습니까? 그 마음공부의 가치가 시방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줘도 바꿀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공부를 하는 우리가 한낱 작은 것을 탐하고 시비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몸이 사대로 흩어지기 전에 영원히 자유롭게 행복해지는 진리에 대해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49일간의 기도를 하면서 여러분들은 저 영단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영원한 행복과 자유의 길로 가는 시금석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정리=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이 법문은 팔공총림 동화사 주지 효광 스님이 6월28일 ‘기해년 백중 49일 기도 대법회’ 입재법회에서 설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498호 / 2019년 7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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