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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최익현 초상’

기자명 손태호

망국의 위기 극복하려는 우국지사 의지 고스란히 표현

을사5적 처단하고자 의병 조직
일본군에 붙잡혀 대마도에 감금
왜놈 것 먹지 않겠다며 단식투쟁
돌아오지 못하고 대마도서 순국
조선 초상 중 유일한 털모자 상
최익현의 강한 의지·기상 의미

보물 제1510호 채용신 作 ‘최익현초상(모관본)’, 136×63.5cm, 비단채색, 1905년,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510호 채용신 作 ‘최익현초상(모관본)’, 136×63.5cm, 비단채색, 1905년, 국립중앙박물관.

요즘은 연일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경제 보복이 뉴스의 헤드라인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걸고넘어지더니 그것이 WTO 위반임을 깨달았는지 북한을 비롯한 적색국가에 전략물자를 팔아넘겼다는 주장을 펼치다가 우리 정부에서 제3국 주재 하에 공동조사를 하자고 하니 슬그머니 언론을 핑계되면서 사실은 무역시스템과 관행이 문제라고 말을 바꾸고 있습니다. 아마 일본은 이러한 거짓말을 한 100개쯤 만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계속 말 바꾸기를 하면서 경제제제를 고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더욱 분통 터트리게 만드는 점은 상호존중에 기초한 외교적 관행을 완전히 내팽개치고 일본 정부 수뇌부가 직접 조롱과 무시하는 언동을 일삼으며 일본 국민들에게 반한과 혐한의 감정을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설정한 화이트국가에서 제외하여 무역을 통해 엄청난 고통을 주겠다는 의사를 여과 없이 표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언행을 보면서 저는 참으로 어이가 없고 황당함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방구 낀 놈이 성낸다”는 말이 있듯 위안부와 강제징용공 문제의 가해자는 일본이고 피해자는 우리 국민임에도 가해자가 되레 피해자를 윽박지르는 후안무치한 처사에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동안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한 위기에 민족과 나라를 위해 치열하게 저항한 애국지사들이 있어 온 겨레가 독립을 포기하지 않고 저항하였습니다. 당시 본보기가 될 만한 훌륭한 항일애국지사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 좀 소외받고 관심이 부족한 분들이 바로 구한말 위정척사파 애국지사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1833~1906) 선생입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지만, 여러 점의 초상화를 남겨 조선회화 초상화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에서도 빠질 수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소개할 그림은 여러 초상화 중 최익현이 어떤 분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보물 1510호로 지정된 ‘최익현초상(모관본)’입니다.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털모자입니다. 이런 털모자를 모관(毛冠)이라 부르는데 주로 겨울철에 사냥꾼들이 추운 야외활동 시 쓰는 모자입니다. 그래서 이 초상화를 최익현 여러 초상화 중 ‘모관본(毛冠本)’이라 부릅니다. 이런 모자는 유학자의 복장인 심의(深衣)와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절대 이런 조합으로 실제 지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치 양복에 수영모를 쓴 것처럼 어색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왜 털모자를 쓴 유학자의 모습을 그렸을까요?    

최익현 선생은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비범하여 김기현(金琦鉉), 화서 이항로(李恒老, 1792~1868) 문하에서 공부했습니다. 소년이지만 그의 비범함을 알아차린 이항로는 다른 손님이 오면 최익현을 소개하며 “이 아이는 장래가 크게 기대된다”고 말하면서 아꼈다고 합니다.  

최익현은 23세 때인 1855(철종 6)년 별시 문과에 합격한 후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등의 여러 직책을 거치면서 강직한 관리의 모습으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가 얼마나 강직한 관리였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조선 14대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 묘역 순강원의 관리를 책임지는 수봉관(종9품)에 재직할 때 일입니다, 나라 의식을 관장하는 예조판서가 금지구역에 묘를 쓰는 것에 관여하자 직접 그를 찾아가 “어찌 나라 녹을 받는 대신께서 국법을 어기시려 합니까?”라고 호통을 친 일화입니다. 

최익현의 강직한 성품은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 1월 굴욕적인 조·일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도끼를 지니고 광화문 앞에 엎드려 조약 파기와 화의 철회를 요청하는 그 유명한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를 상소합니다. 이른바 도끼 상소로 상소를 받아드리지 않겠다면 자신의 목을 쳐달라는 강력한 의미입니다. 삶과 죽음에 개의치 않는 자만 할 수 있는 상소로 고려시대 우탁, 조선시대 최익현 등 역사적으로 몇 번 등장하지 않은 매우 드문 모습입니다. 

최익현은 이 도끼 상소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다가 1879년 풀려난 후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1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포천군 내 양반들을 모아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내 목은 잘라도 내 머리칼은 자를 수 없다’ 는 내용으로 유명한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리며 단발령 반대운동을 주도합니다. 그 활동으로 붙잡혀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후에도 일본 헌병대에 의해 수차례 구금과 강제송환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는 73세인 고령에도 불구하고 1905년 10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본격적인 반일항쟁과 을사5적을 처단하는 의병활동을 결심하게 됩니다. 

1906년 1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의병을 조직해 일제관공서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는 등 의병 무장활동에 돌입했습니다. 그의 의병대는 태인, 정읍, 곡성, 순창 등에서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환영을 받으며 한때 의병의 수가 900명이 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기초 군사훈련조차 받지 못한 의병 수준으로는 정규군과 일제의 무력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 해 6월 의병장 12명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고 그 후 일본군사령부로 넘겨져 끈질긴 회유와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대마도(對馬島)에 유배, 감금됩니다. 그곳에서 일본은 면암에게 친일과 단발을 강요하자 쌀 한 톨, 물 한모금도 왜놈의 것은 먹고 마시지 않겠다고 단식투쟁을 시작합니다. 고종의 만류로 단식을 중지했으나 그동안의 고생과 감옥생활로 결국 큰 병을 얻어 1906년 12월30일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대마도에서 순국하였으니 그의 나이 74세 때입니다. 

이제 초상화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림은 정면관의 허리까지만 그린 반신상입니다. 정면관은 당대 최고 초상화가인 채용신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정면관은 얼굴을 살짝 돌린 모습인 7,8분면 초상보다 얼굴의 굴곡과 명암을 표현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의복은 심의(深衣)로 유학자의 기본 복장입니다. 이 옷은 소매가 넓고 검은 비단으로 가를 두르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렇게 초상화에서 심의를 가장 많이 사용한 화가가 석지 채용신입니다. 특히 우국지사 초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같은 시기 초상화가에서는 보기 드문 의복입니다. 의복 표현기법은 선보다는 면을 강조하여 양감을 부각시켰고 고름과 띠의 입체감도 잘 살려 매우 박진감 넘치는 모습입니다. 

얼굴은 전통적 기법과 서양식 음영법을 둘 다 사용했는데 어두운 갈색을 기조로 윤곽과 이목구비는 좀 더 짙은 갈색으로 그려졌습니다. 눈썹은 얇고 성글게 그렸고 눈동자는 진채로 주변은 담채로 그린 것은 전통적인 기법이며, 눈 주위의 약간의 붉은 빛으로 인해 주인공의 답답함과 슬픈 분노감이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육리문에 입각한 무수히 많은 붓질로 안면을 그리면서 콧날과 광대뼈 부분은 붓질을 줄여 입체감을 높였습니다. 콧대와 눈두덩이를 다른 곳보다 밝게 그린 것은 서양화법에서 말하는 하이라이트 효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극세필을 이용하여 가는 주름살, 검은 반점까지 꼼꼼히 그려 털 한올라기도 틀리면 초상화가 아니라는 전통적 초상화에 충실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초상화의 특징은 앞에도 잠깐 언급했듯이 털모자에 있습니다. 아마도 조선시대에 그려진 초상화 중 유일한 털모자 초상화일 것입니다. 

화가는 왜 이런 털모자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을까요? 그림 우측상단에 ‘勉庵崔先生七十四歲像 毛冠本(면암최선생74세상 모관본)’의 기록으로 이 그림은 1905년에 그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좌측하단에는 ‘乙巳孟春上澣定山郡守蔡龍臣圖寫(을사맹춘상한정산군수채용신사)’의 기록으로 을사년(1905년) 음력정월 초순 정산군수 채용신이 그렸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순국한 것이 1906년이니 순국 한 해전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입니다. 음력정월은 한겨울이니 털모자를 쓴 것이 크게 이상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학자를 사냥꾼의 털모자를 쓴 모습으로 그렸을 때는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채용신의 의도는 유학자 최익현이 아닌 의병장으로의 면암의 풍모를 부각시키고자 그렸을 것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1905년 정월은 최익현 선생이 아직 의병활동을 시작하기 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최익현의 의병활동은 1906년 1월부터 시작하여 6월에 체포될 때까지 6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채용신은 초상화를 제작하기 위해 최익현을 만났을 때 아마 의병활동에 대한 강한 의지를 확인하였고 그의 기상에 걸맞게 털모자상을 그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초상화는 망국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우국지사의 순결하고 굳은 의지가 고스란히 표현된 초상화로 보물로 지정될 이유가 충분한 그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영향을 받아 이 작품 이후 채용신은 항일애국지사들의 초상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합니다.

최근 일본의 억지주장도 문제지만 더욱 문제는 그러한 주장에 동조하는 일부 언론과 정치인들입니다. 마치 한·일간 문제의 원인이 과거사에 억매인 정부에 있다느니, 일본을 홀대해서 생긴 문제라느니, 한술 더 떠 우리 정부가 실제 북한에 전략물자를 빼돌려서 발생한 것이란 일본 우익의 주장을 복사하여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실정입니다. 더욱 기가 막힌 부분은 우리가 힘이 약하고 경제가 어려우니 대한민국의 정부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논리는 일본이 강대국이니 일본의 보호 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구한말 친일파들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들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화가 되었기에 그나마 우리가 근대화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일본 군국주의 주장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통탄스럽고 개탄스럽습니다. 이런 논리들은 우리 국민의 화합과 단합을 저해하는 것들로 단호해 대처해야 합니다. 불교에서도 화합과 화쟁을 깨뜨리는 행위는 규율로 엄히 다스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한·일간의 마찰을 기회삼아 우리의 부족한 실력을 키우고 더욱 강건한 나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높은 기개와 의기로 무장하라” 이것이 ‘최익현 초상’의 형형한 눈빛이 우리들에게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다음은 최익현이 대마도 순국 직전 남긴 유언 ‘충국시(忠國詩)’입니다. ‘皓首奮畎畝 草野願忠心 亂賊人皆討 何須問古今(호수투견묘 초야원충심 난적인개토 하수문고금).’ 백발을 휘날리며 밭이랑에 일어남은/ 초야에서 불타는 충성코저 하는 마음/ 난적을 치는 일은 사람마다 해야 할 일/ 고금이 다를 소냐 물어 무엇하리오.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498호 / 2019년 7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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