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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무명홀기설

기자명 이제열

“무명은 홀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인문학자 무명홀기설로 강의
언젠가부터 일어났다고 소개
현재 떠난 무명발생론 한계
무명은 늘 중생에 깃들어있어

인터넷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상물들이 존재한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굳이 강의실이나 법회에 가지 않아도 각양각색의 불교를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최근 한 인문학자의 불교 강의를 듣게 됐다. 주제는 무명홀기설(無明忽起說)이었다. 무명홀기설이란 진여의 부처 마음자리에서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홀연히 무명이 일어나 중생이 되었다는 이론이다. 그는 이 이론에 대해 마치 고요한 바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파도가 일어나 어지럽게 된 것처럼 중생의 마음도 그와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모든 중생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무명이 일어나기 이전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또한 그는 부처의 마음을 체(体)로, 중생의 마음을 용(用)으로 설명한 뒤 체는 움직이지 않지만 용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갖가지 업을 짓는다고 했다. 이른바 ‘선불성 후무명론(先佛性後無明論)’이었다.

이 같은 그의 설명이 크게 잘못됐다고 보지는 않는다. 진여의 부처마음을 체로 보고 중생 마음을 용으로 보면서 체에서 용이 홀연히 일어났다는 설은 이미 ‘대승기신론’에서도 언급돼 있다. 다만 그의 설명에서 아쉬운 것은 무명홀기설에서 무명의 발생을 현 찰나에 두고 설명하지 않고 어느 때부터인가라는 추상적인 시간 개념을 두고 설명한다는 점이다. 즉 부처 마음인 불성에서 무명이 일어난 시점을 중생들이 알지 못하는 아득한 과거로 설명하고 있다. 본래 완벽했던 부처 마음이 어느 날 무명이 일어나서 중생마음으로 변했다는 것인데 이런 식의 해석은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이는 완전 상태가 까닭도 없이 갑작스레 불완전 상태로 변했다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부처님도 언젠가는 중생으로 전락한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명홀기는 현 찰나의 마음에 적용해 설명해야한다. 즉 현재 일어나는 마음 그 자체는 청정해 부처님 마음과 동일한 것인데 찰나 간에 무명이 개입해 갖가지 분별과 번뇌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중생의 마음은 일어나는 순간 부처마음이지만 깨닫지 못한 까닭에 곧바로 중생의 마음으로 변한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부처마음인 심체(心體)는 영원하고 중생마음인 심용(心用)은 변한다는 견해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마음인 심체 역시 자체성품이 없는 공이라 영원하지도 않고 생멸하지도 않는다. 영원한 불변의 마음에서 생멸의 변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실체가 없는 심체가 인연을 따라 심용으로 바뀐 것이다.

마음은 일어난 것을 마음이라 하지 일어나지 않은 것은 마음이라 하지 않는다. 심체건 심용이건 일어나야만 마음이다. 예를 들어 밤새 잠을 자다가 잠에서 깨어 눈을 뜰 때에 안식(眼識)이 일어난다. 이때 안식은 곧 심체이면서 청정한 부처의 마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안식은 곧 무명이 개입해 촉(觸:접촉), 수(受:느낌), 상(想:생각), 사(思:의도), 작의(作意:의지) 등의 심용을 불러온다. 이는 안식만이 아니라 모든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들도 마찬가지다.

중생의 마음은 일어나는 찰나에는 청정한 부처이지만 오랜 세월 익혀온 무명의 발로로 청정성을 상실하고 중생으로 전락한다. 그러므로 홀연히 일어나는 무명은 지금의 일이지 알지 못하는 과거의 일이 아니다. 사실 무명은 홀연히 일어났다기보다 늘 중생에게 깃들어 있다. 마음은 일어나는 순간에는 청정하나 곧바로 무명을 불러일으켜 실상을 등지게 한다. 우리가 마음을 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심체에서 일어나는 촉, 수, 상, 사, 작의 등을 관찰하다 보면 무명의 발생을 보게 되고 무명을 보면 마음의 본성인 진여 부처 마음을 깨닫게 된다. 참고로 초기불교에서는 진여의 마음을 인정하지 않고 무명은 진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조건으로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제열 법림선원 지도법사 yoomalee@hanmail.net

 

[1499호 / 2019년 7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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