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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풍경이 있는 여행 ① - 동은 스님

기자명 동은 스님

“안나푸루나서 ‘이만하길 다행’이란 진언 깨닫다”

도반 스님 그리고 불자들과 함께
네팔성지 안나푸르나트레킹 순례
순례중 몸 약해 정상 앞두고 포기

그럼에도 설산 곳곳 순례하면서
성지 깃들어 있는 성스러움 친견
발길 닿는 곳곳에는 불성 충만해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살다보면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다. 내겐 지난해 네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일명 ABC)’ 트레킹이 그것이다. 나는 사실 이 순례를 오래전부터 꿈꿔왔다. 선방 다닐 땐 지인들에게 “내게 연락이 끊기면 설산 어느 자락에서 살다가 간 줄 알아라”라고 이야기 한 적도 있었다.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 그 설산 양지바른 어디쯤엔가 토굴 하나 지어놓고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다가 가고 싶은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포카라에 갔을 때 안나푸르나 설산이 보이는 ‘오스트리아캠프’에서 하루 묵은 적이 있었다. 그때 멀리 산 아래 보이는 ‘코트 단다(Kot Danda)’를 보며 언젠가 꼭 저곳에 가보리라 마음먹었다. 그곳은 지금 인도 기원정사 천축선원 주지이신 대인 사형 스님께서 수행센터를 짓다가 사정이 생겨 중간에 그만 둔 곳이었다. 순례단은 도반 천호 스님, 강원대학교 부총장을 지내신 최선도 거사님과 아내 보덕행 보살님, 그리고 희귀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다 열심히 수행한 공덕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이채운 보살님으로 꾸려졌다.

설레는 마음으로 일정을 시작한 우리는 포카라를 출발하여 울레리를 거쳐 고레파니에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노을을 보러 푼힐에 올라갔다. 이곳으로 가는 계단은 일명 ‘지옥계단’이라 할 정도로 일직선의 급경사 계단이 끝없이 이어진다. 심장과 폐가 약한 나는 정상에 거의 다다를 쯤 숨이 가빠오면서 안색이 창백해졌다. 고산증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산하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위험하니 빨리 내려가라고 했다. 저 멀리 송신탑이 보였다. 잠시 망설였다. 이렇게 힘들게 올라왔는데 정상이 바로 저긴데 무리를 할 것이냐, 이쯤에서 포기하고 하산할 것이냐, 나는 결국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지금 무리하면 남은 일정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쉽고 안타깝지만 때론 미련 없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능력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한 일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될 때가 있다. 그럴땐 과감히 내려놓아야 한다. 멀리 인생 전체를 내다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잘 알아차려야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다음 날 설산의 눈부신 일출과 하얀 용들이 꿈틀거리는 듯한 준령들을 바라보며 타다파니에 도착했다. 설산 조망이 가히 압권인 이곳은 안나푸르나 사우스와 히운출리, 마차푸차레 영봉들이 한 눈에 보이는 곳이다. 마차푸차레는 ‘물고기 꼬리’라는 뜻인데 봉우리 모양이 그렇게 생겼다. 네팔에서는 이곳을 신성시해서 지금도 입산이 금지된 곳이다. 손을 내밀면 금방이라도 잡힐 듯한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하얀 설산을, 내 영혼 깊숙이 각인이라도 하는 듯 새겨 넣었다. 어쩌면 벌써 몸을 바꿨을 수도 있었고 허리와 무릎이 안 좋아 산책길도 조심해서 다니는 나로서는, 내딛는 걸음마다 불보살님의 가피를 실감하며 솟아나는 벅찬 기쁨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설산에서 수행하시는 부처님 꿈을 꾼 다음 날, 이번 순례의 하이라이트 코트 단다, 일명 ‘리틀 파라다이스(Little Paradise)’로 출발했다. 타다파니에서 리틀 파라다이스로 가는 길은 트레킹 코스가 아니라서 길을 아는 사람만 갈 수 있다. 울창한 밀림으로 난 오솔길을 가는데 어디선가 아름다운 향기가 났다. 둘러보니 온 산이 천리향 군락지였다. 이 설산에 천리향 군락지라니, 신기할 정도였다. 마치 천상의 화원에서 구름 위를 산책하는 것 같았다. 트레킹 하느라 힘들었던 모든 것을 다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그래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어야지. 일행들은 모두 즐거워하며 ‘파라다이스’로 가는 길목답다며 황홀해했다. 드디어 리틀 파라다이스에 도착했다. 생각했던 대로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가 병풍처럼 둘러친 천혜의 명당이었다. 옛날에는 구릉족 왕궁 터였는데 수행자들이 모여 들면서 점점 알려져 ‘리틀 파라다이스’로 불려지게 되었다. 사형 스님이 짓다 만 법당 터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어 마치 이곳이 신성한 수행처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과 감미로운 바람결, 눈만 들면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 영봉. 며칠 동안 입던 땀으로 절은 옷을 씻고 지친 몸과 마음을 모두 내려놓았다. 여기 오기까지 누구하나 불편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힘이 들수록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들이 순례길을 더 행복하게 했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한 고행의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간밤 양철 지붕으로 떨어지는 요란한 빗소리에 잠을 설쳤다. 아침에 방문을 여니, 아! 안나푸르나 여신이 우리를 위해서 밤새 온 산을 흰 눈으로 장엄해 놓으셨다. 사실 눈이 많이 녹아 제대로 된 설산을 못 본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었는데 그 부족함을 제대로 채워주신 것이었다. 리틀 파라다이스를 뒤로하고 안나푸르나 길목 마을인 간드룩으로 내려갔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성황당처럼 생긴 곳에 마니차를 만들어 놓았다. 내가 마니차를 돌리면서 “만사형통진언, 옴 노프러블럼 사바하”를 외우니 다들 재밌어하며 따라 하셨다. 이 진언은 지어낸 진언이지만 ‘플라시보효과’가 있다.

점심공양을 하고 차를 불렀다. 내내 흐렸던 하늘이 비를 쏟기 시작했다. 우린 비 피할 곳을 찾아 헤맸다. 겨우 찾아든 오두막집에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차만 하염없이 기다렸다. 인생은 참으로 다이내믹하다. 어제는 파라다이스에서 단 꿈을 꾸었는데, 오늘은 비 피할 곳도 없는 남의 집 처마 밑 객신세라니…. 그나마 안나푸르나 여신의 가피로 비라도 피할 수 있는 처마를 주심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더 안 좋을 수도 있었는데 이만하길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우리네 인생을 다채롭고 넉넉하게 한다.

트레킹을 하다보면 길옆에 짐꾼들이 쉬어갈 수 있는 쉼터가 있다. 여기 말로 ‘초우따라’라고 한다. 우리네 고락(苦樂)의 인생여정에도 ‘초우따라’가 필요하다. 몸이야 힘들면 절로 쉬어지지만, 영혼은 지쳐도 짐작하기 힘들다. 쓰러진 후에야 ‘아차!’ 할 뿐이다. 미리 알아차려야 한다. 이번 순례는 우리 모두에게 두 번 다시 오기 힘든 ‘내 인생의 초우따라’였다.

동은 스님 삼척 천은사 주지 dosol33@hanmail.net

 

[1499호 / 2019년 7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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