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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역사왜곡” 주장이 부당한 이유

최근 개봉한 ‘나랏말싸미’는 신미 스님(信眉, 1405?~1480?)이라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워 한글 창제 과정을 새롭게 접근한 영화다. 억불숭유의 시대에 가장 높은 곳의 임금과 가장 낮은 곳의 스님이 만나 협력하고 갈등하면서도 ‘모든 백성이 문자를 읽고 쓰는 나라’를 꿈꿨던 세종의 이상이 어떻게 현실로 구체화됐는지를 펼쳐낸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 영화가 역사 왜곡 프레임에 발목을 잡히면서 흥행에 큰 차질을 빚은 것은 물론 이 영화의 상영 및 해외 보급을 금지하라는 청원까지 등장했다. 역사적 근거가 빈약할 뿐 아니라 세종대왕을 무능한 왕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몇몇 언론의 문제 제기로 시작된 역사 왜곡 논란이 확산되면서 이 영화를 옹호하거나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에게까지 모진 비판을 쏟아지고 있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영화에서 창작과 상상력이야 필연적이지만 이러한 영화 자체가 만들어져서는 안 될 정도로 거짓이라는 주장은 지나치게 과도하다. 영화 첫 머리에 자막으로 명시하고 있듯 이 영화는 한글창제설과 관련된 유력한 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 한글 창제에 협력자 있었다고 추정

한글 창제 과정이 비공개적으로 진행됐다는 것은 정설이다. 실록에는 한글이 언제부터 추진됐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글자가 만들어졌는지, 누가 참여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러다 세종실록 25년(1443) 12월30일 기사에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했다’고 나온다. 이 기사 또한 정확한 날짜를 기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달(是月)’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또 세종 26년(1444)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중심으로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조근 등이 올린 상소문에도 세종이 아무런 논의 없이 한글을 만든 것과 반포에 대한 비난과 우려가 나온다. 이는 세종의 한글 창제가 집현전의 실무담당자인 부제학조차 모를 정도로 은밀히 진행됐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럼 한글은 세종이 단독으로 만들었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까.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의 ‘전하창제’에 근거해 세종이 홀로 만들었다는 견해들이 많다. 그러나 훈민정음 연구 권위자인 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원로 언어학자 김완진 서울대 명예교수와 안병희 서울대 명예교수 등 많은 학자들이 한글을 세종과 협력자들의 창제로 간주한다. 더욱이 세종은 1437년(세종 19년)부터 두통, 이질, 당뇨 등 병이 심해 정사를 돌보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기력이 쇠해지고 기억력도 감퇴됐다. 노쇠현상이 일어나 백발이 생기고 백내장이 심해졌고 심지어 1439년에는 즉위년부터 지속해오던 경연(經筵)조차 열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이런 이유로 세종 홀로 한글을 만들었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견해들이 많았으며, 자연스레 누가 세종을 도왔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적지 않았다.

한때 집현전 학자들이 도왔다는 게 정설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KBS역사스페셜 ‘한글은 집현전에서 만들지 않았다’에서 이기문 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가 “세종 25년 만들어진 한글 스물여덟 자는 그들(집현전 학자)의 공로라고 볼 수 없다”거나 여증동 경상대 국문과 명예교수가 “세종께서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면 무덤 속에서 통탄할 것이다” 등 집현전과 한글 창제의 무관함을 역설한다.

한글 창제와 불교 관련설은 15세기말부터 등장

한글 창제와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불교계 인사들이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모티브로 삼고 있는 산스크리트어(梵字)-티베트어 기원설도 그 중의 하나다. 조선 최고의 만물박사라는 성현(1439~1504)이 한글 반포 50여 년이 지나 쓴 ‘용재총화’에서 “그 글 자체는 범자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어음문자(語音文字)로써 표기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 막힘없이 기록할 수 있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이수광(1563~1628)도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언서(諺書)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를 본떴다”고 했으며, 황윤석(1729~1791)도 ‘운학본원(韻學本源)’에서 “우리 훈민정음의 연원은 대저 여기에 근본 하였으되, 결국 범자의 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또 근대의 석학 이능화도 ‘조선불교통사’(1932년 간)에서 범자와 언문글자의 꼴과 소리가 서로 비슷한 것 몇 가지를 실례를 들어가며 두 언어의 비슷함을 주장했다.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외국학계에서도 상당히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중 주류는 국내 학계와는 달리 범어나 티베트어 기원설에 상당히 무게를 싣고 있는 추세다. ‘외국인의 한글 연구’(태학사)에 따르면 일본의 금택장삼랑(金澤庄三朗, 1900, 1911), 러시아권의 이스트린(1965), 라시예프(1966), 콘체비치(1973) 등을 비롯해 서구 언어권의 레뮈자(1820), 쿠랑(1894, 1895), 헐버트(1892, 1896), 호프(1957), 에카르트(1960), 필(1983) 등 범어나 티베트어 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외국학자들도 “한글은 범자 영향”…근래엔 각필부호설도 등장

근래에 제기된 한글 기원이 고려불경의 각필부호와 관련 있다는 주장도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각필은 고대문헌에 뾰족한 도구를 사용해 한자 옆에 점과 선, 글자를 새겨 넣어 발음이나 해석을 알려주는 양식이다. 2001년 각필부호설을 제기한 이승재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에 따르면 고려시대 불경을 조사한 결과 각필 중 한글의 글자 모양과 무려 17개가 일치하고, 자음과 모음의 체계까지도 대단히 유사함에 따라 한글의 기원이 각필이라는 주장이 당시 일간지를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더욱이 한글 창제 후 곧바로 편찬된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을 비롯해 불교 관련된 문헌이 대다수라는 점도 불교와의 깊은 관련성을 보여준다.(김종명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은 ‘용비어천가’도 불교와 관련된 문헌으로 분류한다.) 세종의 한글 편찬 사업은 조선의 건국이념 및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으며 당시 지배계급인 지식계층과도 분리됐던 사업이다. 이런 이유로 국어학자 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한글창제의 배경과 불교와의 관계’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약 24권으로 추정되는 방대한 양의 불경(석보상절)이, 한글이 창제된 지 얼마 안 되는 기간에, 즉 한글이 세종 28년 9월에 정식으로 반포된 것으로 본다면, 석보상절은 한글이 정식으로 반포도 되기 전부터 한문본이 편찬되고 이어서 번역까지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완료된 셈인 것이다. 이것은 이러한 사업을 위하여 한글 반포 이전부터 불교에 정통하고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의 운용법과 표기법에 통달하고 있던 인사들이 있어서 이 사업을 추진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와 같은 큰 사업이 그렇게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김광해 전 서울대 교수 “훈민정음 창제는 불교 보급 목적”

김광해 서울대 국교과 교수도 ‘한글창제와 불교신앙’이라는 논문에서 이와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불교의 신성수 ‘108’과 관련된 일련의 가시적 증거들을 제시함으로써 결국 훈민정음 창제 당사자들은 훈민정음이라는 새로운 문자 창제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불교를 보급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이 사업을 진행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나랏말싸미듕귁에달아…’로 시작하는 한글 어지(御旨) 108자와 ‘國之語音異乎中國…’으로 시작되는 한문 어지는 108의 꼭 절반인 54자로 이루어져 있고 이는 의도적으로, ‘더부러’ 등을 고의적으로 누락하는 등 적어도 4글자 이상이 탈락됐다는 것이다. 또 한문 어지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종결어미 ‘而己矣’를 사용하지 않고 ‘耳’를 사용하고 있는 등 글자 수를 맞추려는 자의적인 노력이 담겨 있음도 분석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108글자의 세종 어지가 실린 ‘월인석보’ 제1권의 장수(張數)가 108쪽임도 주목했다. 다른 권들과는 달리 1권은 일련의 이야기를 중간에 잘라 별도의 권으로 만들면서까지 쪽수를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또 현재 국보 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의 경우 불교적인 우주관을 상징이라도 하듯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광해 교수는 이들 경우 외에 다양한 사례를 하나하나 제시하며 “훈민정음의 창제 당사자들이 일련의 주도면밀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불교 보급의 목적이 담겨 있다”며 “그러한 종교적 염원이 숫자를 조절하는 은밀한 방법으로 나타났다”고 결론 맺고 있다.

국어학자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도 한글 창제에 불교계가 참여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는 ‘한글의 발명’(2015)과 최근 펴낸 ‘동아시아 여러 문자와 한글-한글창제의 비밀을 밝히다’에서 한글 창제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불가의 학승들이었으며, 훈민정음 언해본이 불서(佛書)인 월인석보에 부재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이렇듯 많은 학자들이 한글 창제가 협업으로 이뤄졌으며 불교계 인사가 적극 참여했으리라는 주장도 적지 않다.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스님을 협업자로 등장시킨 것도 충분히 개연성 있는 설정이라 할 수 있다.

신미 스님이 상주했던 속리산 복천암.
신미 스님이 상주했던 속리산 복천암.

학계, “신미 스님은 없었다면 상당수 한글 문헌 없었을 것”

그렇다면 신미 스님이 한글 창제와 관련성이 전혀 없다는 영화 비판자들의 주장은 어떻게 봐야 할까. 신미 스님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한글 연구자들에게는 결코 낯선 인물이 아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뒤 신미 스님은 세종과 문종의 여러 불사를 도왔을 뿐 아니라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전을 번역, 간행했을 때 이를 주관하는 등 뛰어난 학승이다. 신미 스님은 범어를 비롯한 인도어와 티베트에도 정통했으며, 불교경전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던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석보상절’의 편찬을 이끌었고, 230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원각경’을 비롯해 ‘선종영가집’ ‘수심결’, 몽산 등 고승법어집을 훈민정음으로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따라서 만약 신미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오늘날 전하는 상당수 한글문헌은 없었을 것이 학계의 평가다.

여러 언어와 불교에 대단히 밝았던 신미 스님이 한글 창제 과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정말 없을까. 신미 스님이 실록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한글 창제 이후인 세종 28년(1446) 5월로 ‘세종은 일찍 집현전수찬 이영서 등에게 명해 성령대군 집에서 니금사경하도록 하고 수양·안평 양대군에게 감독하게 했는데, 수십 일이 지나 마침내 완성되자 대자암에서 전경법회(轉經法會)를 열었다. 여기에 참석했던 숭불론자인 정효강이 신미를 이르러 “우리 화상은 비록 묘당(廟堂)에 처하더라도 무슨 부족함이 있겠는가?”라고 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특히 문종실록에는 문종이 “세종이 신미를 안 것은 병인년인 28년(1446)이고, 세종 32년(1450)에는 신미를 친견하여 우대했던 것이다”는 기록이 나온다.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신미 스님의 등장을 부적절하다고 비판하는 측의 근거도 여기에 있다.

세종과 신미 만남, 1446년 이전일 가능성 충분
세종, 신미 친동생 김수온 총애…세종 아들 광평대군 부인도 신미 친척

그러나 세종이 신미 스님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결코 적지 않다. 신미 스님의 친동생으로 시문에 능한 문장가로 일세를 풍미했고 훗날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괴애 김수온(1410~1481)이 그 중간자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이호영 단국대 사학과 교수 등 연구에 따르면 김수온은 세종 20년(1438) 진사과에 급제했고, 23년(1441)에는 문과에 급제해 교서정자(校書正字)로 있었으며, 세종은 그의 재주 있음을 듣고 집현전에 근무토록 특명을 내렸다. 그리고 세종은 때때로 집현전의 여러 유생들에게 시문을 짓도록 했는데 여기서 김수온은 여러 번 장원이 되어 세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김수온이 언어와 불교에 밝은 친형 신미 스님을 추천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앞서 세종이 신미 스님을 알게 된 배경에는 신미·김수온 형제의 부친인 김훈(金訓)의 이력과 활동이 관련돼 있을 수 있다. 김훈은 태종실록에서 성종실록에 이르기까지 37회나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며 이 가운데 24회가 세종실록 기록이다. 문과에 급제한 김훈이 태종 2년 원자(元子)를 교육하는 좌우동시학(左右同侍學) 직책을 거쳐 태종 16년(1416) 옥구진병마사를 지낼 때 조모상에 가지 않고 수개월간 한양에 머무르며 정종의 처소를 드나들었다는 사실이 죄로 몰렸다. 형제의 난을 겪으며 위기의식이 강했던 태종의 측근들에 의해 이 사건은 불충불효의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면서 곤장 100대와 함께 지방으로 좌천당한다.

이런 그가 다시 실록에 자주 언급되는 것은 세종 원년(1419) 대마도 정벌과 관련해서다. 당시 총책임을 맡았던 이종무가 문관이면서 무예에도 뛰어난 김훈을 데려갔고 그곳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종무가 미리 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김훈을 데려간 것을 문제 삼아 사간원과 몇몇 유신들이 김훈과 이종무를 엄벌할 것을 청했고 그 결과 하옥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두고 오랫동안 논란이 끊이질 않았고 세종 13년 5월 김훈은 재산을 몰수당한 채 지방으로 내쫓겨났다. 당시 사헌부에서 반역죄 운운하며 김훈을 영동의 관노로 만들어야 한다고까지 청했지만 세종이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일은 김훈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갔지만 오히려 그것이 죄가 돼 패가망신하게 된 셈이다.

비운의 인물 김훈 세종실록에 24회 등장…그 맏아들이 신미 스님

그런데 이런 비운의 삶을 살았던 김훈의 큰아들이 바로 신미 스님이다.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 공부하며 학문적으로 대단히 촉망받던 그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출가했던 것도 이 무렵이다. 신미 스님이 오랜 세월 논란의 한 가운데 섰던 인물의 큰아들이었고 중앙에서 공부했던 유능한 젊은이가 돌연 삭발염의한 뒤 출가자로 살아간다는 얘기를 처음 들은 것이 세종의 만년(1446)이라는 기록을 곧이곧대로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자신이 총애하던 신하 김수온의 친형이기도 했다.

그런데 성종실록에는 김훈 사건의 반전이 이뤄진다. 성종 12년 6월 김수온이 세상을 떠났을 때 ‘贈領議政(金)訓之子也’라고 하여 김훈에게 영의정을 추증한 것으로 돼 있다. 이는 김훈을 둘러싼 불충불효 논란이 결국 정치적인 사건에 불과했으며 세종, 문종, 세조는 물론 성종도 김훈과 그의 집안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와 함께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 부인 신씨가 신미 스님과 김수온의 친척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성종실록에는 1471년 신씨가 전답 등을 사찰에 보시하려고 할 때 김수온이 문권(文券)을 집필해주었고, 이에 사간원에서 신씨가 보시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면서 김수온과의 관계를 묻자 성종은 “수온과 신씨는 친척으로 그 집필에 대해 논할 사항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광평대군이 신씨와 결혼한 것이 1434년 1월이고, 김수온의 문과 급제가 1441년이니 이러한 정황들로 볼 때 세종이 신미 스님을 한글 창제 이전에 알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상정해볼 수 있다.

세종이 신미에 ‘우국이세 혜각존자’ 법호 내린 것도 '대사건'

그리고 무엇보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신미 스님 관련 기록들을 간과할 수 없다. 문종이 즉위한 해 7월 세종은 유언을 통해 문종으로 하여금 신미 스님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렸다.

사실 이 법호는 세종이 신미 스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즉 세종은 신미 스님을 선과 교를 이끌 역량을 지녔으며, 은밀히 불교의 바른 법을 전했고, 자비와 지혜를 동시에 운용할 줄 알았으며, 나랏일을 도와 백성을 이롭게 했으며, 매사 원만하고 걸림 없는 인물이었으며, 지혜와 깨달음을 갖춘 거룩한 존자로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온갖 찬탄이 담긴 법호는 불교가 국교이던 고려시대에도 찾아보기 어렵다.

더욱이 ‘존자’라는 명칭이 큰 공헌이나 덕이 있는 스님에게 내리는 칭호고,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祐國利世)’는 문구를 포함시켰다는 점은 결코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사사로이 ‘우국이세’라는 말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밀전정법'과 '우국이세'의 표현은 신미 스님이 세종의 한글 창제를 도왔기 때문에 이러한 법호를 내렸다고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만약 한글 창제 후 불경을 한글로 번역한 것 때문이라면 ‘석보상절’의 앞부분에 언급돼 있는 것처럼 신미 스님 말고도 수미, 설준, 홍예, 효운, 지해, 해초, 학열, 학조 스님 등도 큰 공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세종 31년에 세종이 신미 스님이 머무르던 복천암 불사를 직접 지원하는 한편 승하하던 해인 32년 1월 26일에 세종은 신미 스님을 침실 안으로 맞아들여 법사(法事)를 베풀게 하였으며, 그것도 ‘높은 예절’(尊禮)로써 대했다고 세종실록에 나온다.

억불의 시대에 왕이 승려를 침실로 불러 신하로서가 아니라 법사로서 설법을 청한 것은 엄청난 사건으로 이는 세종이 신미 스님을 크게 신뢰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와 함께 세종 31년 11월 20일 궁내에 내불당이 준공되면서 신미와 김수온 형제가 ‘삼불예참문(三佛禮懺文)’을 엮었는데 그때 신미 스님은 대자암 주지로 나온다. 대자암은 세종이 즉위한 후 억불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도 원찰처럼 여겨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찰로 이곳의 주지를 신미 스님이 맡고 있음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세종이 신미 스님을 깊이 신뢰하고 극찬한 이유가 무엇인지, 또 ‘밀전정법 우국이세 혜각존자’라는 특별한 법호를 내리려 한 별도의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 이상 한글 창제와 연결짓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따라서 세종의 뜻을 받들기 위해 신미 스님을 옹호했던 문종과 신미 스님을 간신으로 폄하하려는 신하들 사이에서 오고간 ‘세종이 신미 스님을 만난 것은 1550년이었다’는 문종실록의 내용은 곧이곧대로 믿어야할 게 아니라 당시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속리산 복천암의 신미 스님 부도.

이숭녕 서울대 명예교수 “흔적 안 남기고 스스로 역사 속으로 걸어간 인물”

신미 스님은 세종, 문종, 세조 등 3대 임금의 신임을 받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 있으며, 심지어 언제 태어나 언제 입적했는지조차 정확하게 알 수 없을 정도다. 고 이숭녕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미는 불경의 번역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 그것은 잘 밝혀지지 않고 있어 오늘날 신미의 행적은 뚜렷하지 않음도 그의 처세의 일단이 아닌가 한다. 세종, 문종, 세조의 두터운 신임과 후원을 받은 고승이 후세에 남긴 법어, 시, 글 한편 없었다는 것은 너무도 적막한 생애를 스스로 걸어간 것 같고 속세의 허무가 신미로 하여금 그 자취를 남지지 않게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고 밝히기도 했다. 자신이 드러날수록 한글과 한글 문헌에 대한 유신들의 반발과 탄압이 커질 것을 우려해 스스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는 얘기다. 실제 세종이 신미 스님을 판선교종(判禪敎宗)에 제수하려 했으나 스님은 병을 내세워 사양했다고 실록에 전한다.

신미 스님이 한글 창제에 협력했다는 직접적인 명시는 없다. 하지만 한글의 모양과 음운학, 또 훈민정음 창제 후 곧바로 실시된 불경간행에서 한글에 대한 신미 스님의 깊은 이해를 엿볼 수 있다. 억불의 시대에 신미 스님은 자신의 공덕을 숨기고 한없이 낮춤으로서 한글 창제와 불경 언해라는 대불사를 일궈내는데 큰 역할을 했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뛰어난 음운학자인 세종이 한글창제의 주역이라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세종의 애민정신과 새로운 문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었다면 애초 한글 창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이폰이 완성되기까지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었겠지만 세상 사람들이 총 책임자인 스티브 잡스의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조철현 감독이 거듭 강조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신미 스님에게 비난은 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숙명?’

영화 ‘나랏말싸미’는 기존 연구들에 역사적 상상력을 입혀 만든 영화다. 또한 조선 초기 복식이나 의례는 물론 음식과 의술에까지 전문가들의 꼼꼼한 고증을 거친 정성스런 영화다. 여기에 해인사 장경판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 곡성 태안사, 순천 송광사 국사전 등 사찰과 옛 건축의 아름다움을 영상에 담았으며, 송강호(세종대왕), 박해일(신미 스님), 전미선(소헌왕후) 등 배우들의 열연도 단연 돋보인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여 수많은 볼거리와 메시지들이 외면당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개인적으로도 2004년 한글날 특집으로 신미 스님을 법보신문 1면과 2·3면(773호)에 비중 있게 다뤘고, 그 인연으로 그해 11월 한국불교문화학회가 주관한 학회에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와 신미의 역할’(불교문화연구 제4집 게재)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었기에 이번 논란을 지켜보는 안타까움이 더 큰지도 모르겠다.

이재형 국장
이재형 국장

 

지금 신미 스님이 등장하는 영화에 쏟아지는 비난들은 600여년 전 비슷했을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그 시대에는 성리학이라는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기존의 통념과 이미지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혹독한 비난과 멸시가 뒤따른다. 그것이 예나 지금이나 신미 스님과 이 땅의 불교가 겪어야할 숙명인 걸까. 더욱이 영화를 만든 이들까지 감수해야 하는 불명예나 경제적 손실은 참으로 가혹하다.

그렇더라도 이 영화 말미에서 신미 스님이 말하듯 우리는 복숭아 속에 씨가 하나인 줄은 알지만 그 씨앗 속에 복숭아가 몇 개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영화의 시작은 고난으로 시작됐지만 이 영화가 훗날 어떤 평가를 받을 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한글 창제 과정에 대한 이해를 넓힌 ‘나랏말싸미’가 이제라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관객의 발길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mitra@beopbo.com

[1499 / 2019년 8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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