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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8대 총무원장 성수 스님

10·27법난 딛고 불교재건 앞장섰지만 불국사 갈등으로 좌초

1944년 성암 스님 은사로 출가
봉암사결사 참여 불교중흥 발원
1981년 첫 단일계단 설치·수계식
불국사주지 문제로 종회서 불신임
총무원장서 5개월 만에 물러나
1980년대 총무원장 수난사 서막

성수 스님(사진 앞줄 가운데)은 2005년 조계종 전계대화상에 추대돼 후학들에게 “지계가 수행의 근본”임을 역설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성수 스님(사진 앞줄 가운데)은 2005년 조계종 전계대화상에 추대돼 후학들에게 “지계가 수행의 근본”임을 역설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현대조계종사에서 1980년대는 격동의 시기였다. 1970년대 종단분규를 딛고 1980년 4월26일 새 집행부가 출범했지만 10·27법난으로 6개월여 만에 좌초됐다. 뒤이어 출범한 총무원 집행부도 주요사찰의 주지인사문제로 극심한 내부 갈등에 직면해야 했다. 이로 인해 조계종은 1981년 1월 18대 총무원장으로 선출된 성수 스님에서부터 1986년 8월 25대 총무원장에 의현 스님이 당선되기까지 5년 7개월간 여덟 번이나 총무원장이 바뀌는 혼란을 겪어야 했다. 이시기 총무원장의 평균 임기가 8개월여에 불과했다는 점은 1980년대 조계종의 혼란상을 대변한다.

성수 스님이 18대 총무원장에 선출된 것은 10·27법난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이었다. 1980년 10·27법난으로 월주 스님이 총무원장에서 물러나자, 조계종은 그해 11월5일 과도집행부인 정화중흥회의를 출범시켰다. 비록 신군부의 입김에 의한 것이었지만 정화중흥회의는 2개월여 간 활동하며 종단 수습책을 마련했다. 종헌개정을 통해 총무원장에게 종단의 대표권과 종무행정의 최고책임자로서의 지위를 부여했다. 중앙종회의원의 겸직금지를 강화했으며 총무원에서 분리된 호계위원회를 신설해 종단의 권력이 행정, 입법, 사법부로 분산되도록 했다. 원로회의의 법적권한도 강화해 중앙종회와 양원제 형태로 운영될 수 있도록 했다. 모든 종무행정은 종무회의를 거쳐 진행하도록 했으며, 본사주지 임명도 인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치게 했다. 10·27법난 당시 비리승으로 내몰려 징계를 받은 42명 가운데 27명을 선별해 사면복권도 단행했다.

종단 제도를 정비한 정화중흥회의는 새 집행부 출범에도 속도를 냈다. 원로회의는 1981년 1월10일 종정과 총무원장 인선에 착수했다. 개정된 종헌에는 총무원장을 중앙종회에서 선출하도록 했지만, 중앙종회가 구성되지 않은 이유로 1회에 한해 원로회의에서 선출하도록 했다. ‘불교신문(1981년 1월18일자)’에 따르면 이날 원로회의는 5시간이 넘는 마라톤회의 끝에 새 종정으로 성철 스님을 추대했으며, 성수 스님을 제18대 총무원장으로 선출했다. 성철 스님은 일찌감치 종정후보로 거론돼 왔기에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총무원장은 종무행정을 총괄하는 막중한 자리라는 점에서 긴 논의가 이어졌다. 당초 정화중흥회의 의장 영암(기종) 스님이 후보로 거론됐지만, 본인이 고사하면서 원로회의는 고심 끝에 성수 스님을 대안으로 내세웠다.

성수 스님은 조계사, 범어사, 해인사, 고운사, 마곡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1978년 조계종이 개운사·조계사 총무원으로 양분됐을 당시 조계사 측 총무원장을 맡은 경험도 있어 종무행정에 밝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문중세가 옅은 데다 원만한 성격으로 종단 내에서 특별히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던 스님들도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원로회의는 성수 스님이 종단 혼란을 조기에 수습할 적임자로 평가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성수 스님이 특정문중에 치우지지 않은 점은 종무행정을 공정하게 펼칠 수 있는 장점이 됐지만, 총무원장으로서 지지기반이 쉽게 흔들릴 수 있는 단점도 됐다. 성수 스님이 총무원장에 선출된 지 5개월여 만에 중앙종회로부터 불신임된 것도 확고한 지지그룹의 부족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았다.

성수 스님은 1923년 경남 울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또래들과 달리 동네에서 나이 많은 어른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해 ‘햇노인’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른들로부터 원효 스님과 관련된 일화를 듣고 자신도 ‘도인이 되겠다’는 뜻을 품었다. 한번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이뤄야 직성이 풀렸던 성격 탓에 어린 시절에도 몇 차례 집을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가족들의 반대로 출가 인연은 쉽게 닿지 않았다. 그러다 19세 되던 해 부친이 돌아가시자 다시 집을 나서 1년여의 만행 끝에 천성산 내원사에서 성암 스님과 사제 연을 맺었다.

출가자의 길에 들어선 성수 스님은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은사스님이 건네준 ‘초발심자경문’을 1주일 만에 익혔고, 49일간 10만독을 회향했다. 1948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한 이후에는 전국의 명안종사를 찾아 진리를 탐구했다. 의심이 해결되지 않으면 물러섬이 없었다. 약관의 나이에도 동산·효봉·성철 스님 등 당대의 고승들을 상대로 ‘법거량’을 시도할 만큼 스님의 구도행은 거침이 없었다. 1948년 봉암사 결사에도 참여해 쇠퇴해가던 한국불교에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그런 치열한 구도행은 성수 스님이 1969년 통도사 경봉 스님의 전법제자가 되는 계기가 됐다.

성수 스님의 총무원장 취임법회는 1981년 1월20일 서울 조계사에서 7대 종정 성철 스님의 추대법회와 함께 열렸다. ‘불교신문(1981년 1월25일자)’에 따르면 이날 법회는 정관계 인사와 신도 등 20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태고종 종정 두석 스님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태고종 종정이 조계종 행사에 참석한 것은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정화유시로 촉발된 비구·대처 갈등 이후 27년만이었다.

그러나 이날 법회에는 종정 성철 스님이 불참해 논란이 일었다. 종정추대식에 정작 주인공이 빠진 것이었다. 대신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짤막한 법어를 원로의장 영암 스님을 통해 발표했다. 종정추대 법회에 종정스님이 불참한 전례가 없었던 탓에 언론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동아일보(1981년 1월21일자)’는 성철 스님의 불참과 관련해 ‘종정의 권위를 찾기 위해선 잘한 일’ ‘아무리 두문불출하는 선승이라지만 종정으로서 불자들에게 법음을 들려줬어야 했다’는 교계 안팎의 양론을 상세히 소개하며 이날 법회를 주요뉴스로 보도했다. 언론은 성철 스님을 ‘은둔의 수행자’ ‘종정의 권위마저 내려놓은 청빈한 수행자’로 부각했다. 그럴수록 성철 스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커졌다. 이는 10·27법난으로 만신창이가 됐던 불교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배경이 됐다.

총무원장 성수 스님은 이날 “인재불사를 통한 불교재건”을 취임일성으로 내세웠다. 교육을 통해 전통적인 승려상을 구현하는 것이 실추된 한국불교의 위상을 재건하는 토대라는 점을 강조했다. 최소 3년 이상의 기본교육을 거쳐 정식 스님이 될 수 있도록 법제화하고, 법계고시와 연수교육을 제도화함으로써 스님들의 자질향상에 앞장서겠다고 약속했다.

성수 스님의 첫 행보는 개정된 종헌에 따라 1981년 2월27일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사미·사미니 합동수계식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조계종이 단일계단을 설치한 것은 종단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동안 출가한 스님들은 본사별로 혹은 은사 상좌간의 인연에 따라 수시로 계를 받았다. 이로 인해 무자격승려가 배출되고 스님들의 수계여부에 대한 논란도 끊이질 않았다. 때문에 조계종은 매년 1회 총무원이 지정한 사찰에 계단을 설치하고, 일정기간 교육을 거쳐 수계하도록 의무화했다. 이날 통도사에서 진행된 첫 단일계단 수계식에는 자운 스님을 계사로 남녀 행자 160명이 사미·사미니계를 받았다.

성수 스님은 태고종 등 18개 종단대표자가 참여하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도 발족해 초대 회장으로 피선됐으며,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대통령을 초청해 호국법회를 개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조계종도 모처럼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성수 총무원장 체제는 순탄하게 이어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불국사 주지 인사문제가 성수 스님의 발목을 잡았다. ‘동아일보(1981년 4월25일자)’에 따르면 불국사 주지논란은 그해 3월경 당시 주지였던 월산 스님이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빚어졌다. 월산 스님은 총무원장 성수 스님을 만나 고령을 이유로 자신의 상좌인 성타 스님을 천거했다. 이에 반발해 월산 스님의 사제인 월서 스님도 주지임명을 신청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성수 스님으로서는 종단의 원로이자 불국사 문중의 최고 어른이었던 월산 스님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성수 스님은 월서 스님을 배제하고 성타 스님을 인사위원회에 추천했다. 그러나 인사위원회는 성타 스님을 자격 미달로 결정했다. 당시 종무원법은 본사주지의 자격조건으로 세납 만40세 이상으로 규정했지만, 성타 스님은 여기에 4개월이 모자랐다. 인사위원회의 제동으로 성타 스님의 불국사 주지 임명은 보류됐다. 대신 총무원은 차기 주지가 임명될 때까지 총무국장을 재산관리인으로 임명했다. 이는 성수 스님이 성타 스님과 월서 스님 측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는 빌미가 됐다. 이 문제는 그해 5월28일 개최된 제66차 임시중앙종회에서 분출됐다.

‘7대 중앙종회회의록’에 따르면 이날 종회개원과 동시에 종회의원 성타 스님은 총무원 집행부를 몰아붙였다. 성타 스님은 “월산 스님이 불국사 주지를 사임하면서 후임주지는 당해 교구에서 추천하는 자를 임명하기로 약속해놓고 이를 어겨 불국사를 공백상태로 만들었다”고 질타했다. 이에 대해 성수 스님은 “후임주지를 꼭 성타 스님으로 발령하겠다고 약속한 사실은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자 종회의원 천장, 능혜 스님은 불국사 인사 문제를 거론하며 총무원 집행부를 압박했다. 이들은 대통령이 참석한 5월8일 법회에서 태고종을 비롯한 타종단 스님들이 단상에 배치된 이유 등 의전문제까지 언급하며 집행부에 책임을 물었다. 종회의원들의 강경한 발언들은 이미 총무원장 불신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격해지자 중앙종회는 휴회를 선언하고 오후로 연기했다.

그러나 이날 오후 회의 속개와 동시에 성타 스님은 불국사 인사문제를 비롯해 6개의 이유를 들어 총무원장 불신임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총무원장을 불신임할 사유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심지어 성타 스님은 “5월8일 법회에서 대통령이 ‘조계종도 사회복지사업을 해보면 좋겠다’는 제안에 대해 현재까지 대안이나 설계 청사진 하나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불신임 사유로 거론했다. 그럼에도 종회의원들은 누구도 성수 스님의 편에 서지 않았다. 다만 “총무원장의 자진사퇴를 권유해 보자”고 제안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성수 스님은 자진 사퇴를 거부했다. 그러자 중앙종회는 재적의원 27명 중 25명이 참석한 가운데 총무원장 불신임안을 상정하고, 거수투표를 진행해 찬성 24명, 반대 1명으로 가결했다. 이에 따라 성수 스님은 중앙종회에서 불신임된 첫 총무원장으로 기록됐다.

성수 스님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지만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성수 스님은 중앙종회의 총무원장 불신임 결의에 대한 인준여부를 결정하는 원로회의를 하루 앞두고 6월8일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자 중앙종회는 6월9일 67차 임시회를 열어 66회 임시회에서 결의한 총무원장 불신임 결의를 철회했다. 이에 따라 18대 총무원장 성수 스님은 중앙종회의 불신임이 아닌 자진사퇴로 최종 결정됐다. 성수 스님의 불명예퇴진은 1980년대 총무원장 수난사의 서막이기도 했다.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성수 스님은 수행과 후학양성에 매진했다. 1986년 오도선원을 시작으로, 1973년 법수선원, 1994년 황대선원, 2002년 해동선원 등을 잇따라 창건하고 조실로 주석하며 한국 간화선 전통복원에 매진했다. 2004년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으며, 2005년에는 조계종 전계대화상으로 추대돼 “지계가 수행의 근본”임을 역설했다. 구순 가까운 나이에도 새벽 2시30분에 일어나 새벽예불에 빠지지 않는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평생 치열한 구도열정으로 깨어있는 수행자의 면모를 보였던 성수 스님은 2012년 4월15일 통도사 관음암에서 세납 90세, 승랍 69세로 세연을 마감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00호 / 2019년 8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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