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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의 사표’ 월산 스님 삶과 사상 첫 조명

  • 교학
  • 입력 2019.08.22 18:53
  • 수정 2019.08.26 11:06
  • 호수 1502
  • 댓글 2

월산문도회·대각사상연 주최
9월1일, 경주 불교문화회관
중진 불교학자들 발표·토론
“월산스님 진면목 드러날 것”

불교수행자의 사표로 일컬어지며 조계종 총무원장과 원로의장을 역임하고 불국사 재건 및 법보신문을 창간했던 성림당 월산 스님(月山, 1913~1997)의 삶과 사상을 조명하는 첫 학술대회가 열린다.

불국사 월산문도회(대표 성타 스님)와 대각사상연구원(원장 보광 스님)은 9월1일 오후 1시 경주 불국사 불교문화회관에서 ‘월산 대종사의 생애와 삶’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월산 스님의 업적을 심층적으로 조명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좌표설정의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월산 스님은 함경남도 신흥이 고향으로 불교정화운동을 이끈 금오 스님의 전법제자이며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결사를 진행했던 선지식이다. 한국의 전통불교가 위기에 내몰릴 때면 언제든 종단의 안정을 위해 기꺼이 헌신했으며, 자신이 물러나야 할 때라 여기면 지체 없이 떠나는 선사로서의 면모를 한순간도 잃지 않았다.

스님은 사찰의 기능을 상실하고 관광지로 전락했던 불국사의 중흥을 이뤄냈으며, 그곳에 선원과 강원을 열어 수행풍토를 일신했으며, 조실을 맡아 후학들을 선의 깊은 세계로 이끌었다.

월산 스님은 전법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경주에 부인선원을 세워 재가자들의 참선수행을 지도하고, 1988년 5월 법보신문을 창간해 초대 발행인을 맡았다. 1997년 9월6일 불국사에서 세수 86세, 법랍 55세로 세연을 접었으며, ‘가난함을 즐기고 도에 즐거움을 붙이라(安貧樂道)’고 늘 강조했듯 입적 후 주장자와 몇 벌의 승복만 남겼을 정도로 일평생을 청빈하고 검소하게 살았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대각사상연구원장 보광 스님과 불국사 주지 종우 스님의 인사말과 함께 김상영 중앙승가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되며 불국사 회주 성타 스님이 기조발제를 담당한다. 이어 △금오문중의 위상과 성격(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월산 큰스님의 생애와 사상(김광식/ 동국대 교수) △월산 큰스님의 선사상(1)-수행 과정과 참구화두를 중심으로(보광 스님/ 대각사상연구원장) △근현대 불국사의 사격(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월산 큰스님과 불국사 선원(석길암/ 동국대 교수)이 발표된다.

토론자로는 진해 대광사 회주 운성 스님, 불국사 승가대학원장 덕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도업 스님, 동국대 경주캠퍼스 정각원장 법수 스님, 이재수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가 담당한다.

대각사상연구원장 보광 스님은 “월산 대종사의 생애와 삶, 사상, 수행과 포교에 담긴 참다운 업적을 재조명하게 될 것”이라며 “수행자로서 참으로 올곧게 사셨던 월산 대종사의 진면목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불국사 회주 성타 스님도 “월산 큰스님은 한국불교와 조계종단에 큰 영향을 끼친 고승이었다”며 “월산 큰스님의 사상이 냉철한 분석과 연구를 통해 정립될 수 있도록 학술사업을 적극 돕고 흩어진 자료를 찾고 정리하는 사업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평생 수행자의 삶을 산 월산 스님은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불국사를 찾은 김대중 신민당 총재와 악수하고 있는 월산 스님. ‘월산선사법어집’

“한국불교에 큰 영향 끼친 고승…불교대중화 실천한 보살행”

□월산 스님 주제 첫 학술대회 발제 및 발표 요지

성타 스님
성타 스님

“중도를 수행·실천 덕목으로 승화”
불국사 회주 성타 스님

월산 스님은 참다운 선사이었으며 대종사로서 한국불교 및 조계종단에 큰 영향을 끼친 고승이었다. 그 가르침은 조계종단, 경주지역, 불교계, 불국사 및 불국사 선원 등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월산 스님은 근대 대선사인 금오 스님의 정식 부촉인 전법게를 받은 법제자로 선원 정진은 물론 토굴에서도 정진한 철저한 수좌였다. 그러면서도 경전과 계율을 배척하지 않고 다 수용해서 온전한 균형적인 수행을 했으며 이런 점을 상좌와 후학들에게 일러주었다.

훗날 총무원장, 원로의장 등을 역임하셨지만 당신의 안위, 고집, 이익은 철저히 배격하고 문중을 위한 행보는 하지 않았다. 스님은 중도사상을 중시 여겼는데 이를 단순히 가치관으로만 보지 않고 ‘중(中)은 불사일법(不捨一法)이고 도(道)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이다’라고 하시며 수행과 실천의 덕목으로 승화시켰다. 또한 불국사, 경주불교, 경상도 지역불교에 기여한 점이나 불교언론의 기반이 척박한 시절, 법보신문을 창간한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김순석 수석연구위원
김순석 수석연구위원

“선풍 진작에 일생 바친 선승”
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금오 스님(1896~1968)은 조선시대를 거치며 단절됐던 선맥을 부흥시킨 경허 스님과 그 법을 이은 만공, 보월 스님을 계승해 선풍을 진작시킨 선승이다. 금오 스님은 문도들과 얼마 되지 않던 비구승들을 이끌고 일제강점기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만연된 불교계를 정화하고 조계종을 성립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금오 스님의 법을 이은 월산 스님 또한 스승을 이어 한국불교계에 선풍을 진작시키는 데 평생을 바친 선승이다. 관광객이 몰려드는 불국사에 선원을 만들고 수좌들을 받아들인 것은 불교의 생명이 선풍의 계승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치열한 열정이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 그리고 금오 스님과 월산 스님으로 이어지는 덕숭문중을 한국 불교계 제일의 문중으로 만들었다. 이 분들이 평생을 바쳐 한 일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불교의 대중화를 실천한 보살행이었었다.

 

보광 스님
보광 스님

“‘이뭣고’ 화두 잘못되지 않았다”
대각사상연구원장 보광 스님

월산 스님은 1945년 만공 스님으로부터 ‘이뭣고’ 화두를 받아 선문에 들었다. 화두를 참구하면서 처절한 정진 끝에 22년 만에 금오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월산 스님의 삶과 수행은 ‘이뭣고’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뭣고’는 화두가 아니라고 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뭣고’ 화두의 전제어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하고, 월산 스님도 전제어를 말하면서 ‘이뭣고’를 참구하라고 설법했다. 그런데 ‘이뭣고’는 화두가 아니라고 하는 학설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용성 스님은 ‘이뭣고’ ‘시심마(是甚麽)’ 화두가 육조혜능으로부터 그 연원이 있음을 밝혔다. 그러다가 서산대사 등을 거쳐 근세와 와서 경허 스님과 용성 스님이 활발하게 ‘이뭣고’ 화두로 제자들을 접인했다. 여기에는 반드시 전제어가 있으며, 이를 단순화시켜서 ‘이뭣고’하라고 지도했음을 알아야 한다. 월산 스님의 ‘이뭣고’ 화두법은 결코 잘못되지 않았으며, 치열한 수행으로 덕숭선맥을 계승한 선지식이었다.

 

김광식 교수
김광식 교수

“원로의장 지낸 조계종단 어른”
김광식 동국대 교수

월산 스님은 1944년 입산, 출가한 이후 10여년 동안 선원, 토굴 등에서 치열히 정진했다. 그 정진은 주로 화두 참선을 통한 운수행각이었다. 이는 월산 스님의 은사인 금오, 만공 스님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월산 스님은 불교정화운동 당시 운동 중심부에 적극 참여하고 활동했다. 이는 은사인 금오 스님이 정화운동을 진두지휘했던 연고에서 나온 것이었겠지만 그 자신도 토굴수행을 하면서 느꼈던 정화에 대한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월산 스님은 비구승대표자대회, 전국비구승니대회, 전국승려대회에 전부 참석했다. 대회에서는 주어진 역할을 하고, 종단 비구승 대표로 참여하고, 종회의원으로 선출됐다. 요컨대 월산 스님은 1950년대 중반부터 종단을 대표하는 수좌였다.

1969년 총무원장을 맡아 종단 개혁에 앞장섰으며, 1974년에는 불국사 주지로 취임해 복원불사를 진두지휘함으로써 불국사를 본사 사격에 걸맞은 도량으로 만들었다. 이후 월산 스님은 원로회의 의장으로 활동하고 종정에 거론되는 등 조계종단의 어른으로 떠올랐다.

 

한상길 교수
한상길 교수

“불국사 1970년대 위상 회복”
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불국사는 신라 창건 당시부터 호국사찰이라는 사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 위상은 고려, 조선시대에도 변함없었으나 19세기 이후 사세가 기울고 가람이 쇠퇴했다. 일제의 사찰령 하에서 30본산에 소속되지 못한 이유도 급격한 쇠퇴에 있다. 불국사가 사격을 본격적으로 회복하기 시작한 것은 1938년 전후 시기다. 불국사가 활발한 사회적, 불교적 활동을 전개하고, 본산 기림사와 소속 말사, 지역인사들도 힘을 모아 본산승격 청원을 개시했다. 비록 본산승격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때 절의 위상과 사격을 되찾는 계기가 됐다.

불국사가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70년대다. 박정희 대통령이 불국사 복원을 지시하고 직접 방문하는 등 관심을 보이면서 1973년 대복원 불사가 완성됐고, 다음해 6월 월산 스님이 주지로 부임해 불국사가 수행도량으로서의 전통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1995년 불국사와 석굴암이 우리나라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다.

 

석길암 교수
석길암 교수

“불국선원 개원 늦었지만 일시에 번성기”
석길암 동국대 경주캠퍼스 교수

정부에 의해 진행된 불국사 복원공사는 1969년 시작돼 1973년 7월에 마무리됐다. 그러나 월산 스님에게 있어서 그 복원공사는 미완성이었고, 오히려 그때부터 진정한 출발점으로 삼아 근현대 시기 본분종사들이 지녔던 한국불교의 전통을 복원하는 데서 마무리된다는 의식이었을 것이다. 월산 스님이 불국사 주지로 임명된 직후인 1974년 향곡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안거에 들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렇게 1976년 개원한 불국선원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범룡, 송담, 일타, 정일, 혜정 스님 등 여러 명안종사가 거쳐 가면서 선풍을 떨쳤다. 무엇보다 경허, 만공, 보월, 금오 스님으로 이어지는 덕숭선맥을 이은 월산 스님의 지도와 가르침으로 불국선원은 일시에 번성기에 들었다. 또 월산 스님의 부인선원을 개설해 재가자들이 전통에 걸맞은 수행을 하도록 이끌어낸 것에서도 한국불교 전통 복원에 대한 스님의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502 / 2019년 8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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