師資閑向草中行(사자한향초중행)
野鴨飛鳴意忽生(야압비명의홀생)
鼻孔扭翻成底事(비공뉴번성저사)
新羅日午打三更(신라일오타삼경)
‘스승과 제자 한가롭게 풀 속을 거닐다가 들오리 날며 우는 소리에 문득 생각이 일어났다네. 코를 비틀면서 되려 이 일이 이루어졌으니 신라에서 정오에 삼경의 종을 친 격이로다.’ 불인지청(佛印智淸) 스님의 ‘게송(偈頌)’.
푸드득,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길을 걷던 두 승려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무심한 한 쌍의 들오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 스님이 스승인 마조(馬祖) 선사와 함께 길을 나섰다. 한가롭게 거닐고 있는데 문득 날아오르는 들오리 한 쌍을 보았다. 잠시 바라보던 마조 선사가 입을 열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들오리입니다.”
선사가 제자에게 어디로 갔느냐고 다시 물었다. 백장 스님이 날아갔다고 대답했다. 선사가 백장 스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코끝을 비틀자, 스님은 아픈 고통을 참으며 신음하였다. 선사가 말했다. “뭐 날아갔다고?”
‘벽암록’ 제53칙에 실린 글이다. 마조 선사와 백장 스님의 문답은 바로 이 자리에 있는 본래 마음을 다루고 있다. 마조 선사인들 하늘을 나는 들오리가 들오리임을 모를 리가 없다. 들오리가 어디로 가는지도 이미 보았다. 백장 스님에게 물은 “이것이 무엇인가?”와 “어디로 갔느냐?”라는 물음은 뻔한 상식적인 대답을 원한 것이 아니다. 마조 선사는 제자가 이 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말의 표면적인 의미만 붙잡고 있어서 코를 비틀어버린 것이다.
선사의 첫 물음은 들오리를 묻는 것이 아니라, 들오리에 관심을 두고 있는 백장의 마음을 물은 것이다. 백장이 아직 깨닫지 못하자, 다시금 어디로 갔느냐고 물은 것이다. 외형의 형상이 날아가거나 날아가지 않거나 이를 보는 자신의 본래 마음은 그대로이다. 성품의 자리가 명백하다는 말이다. 이는 어떤 경계와 외연을 만나도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마음을 말한다. 결국, 마조 선사가 코를 비틀자 스승의 의중을 깨닫게 된 것이다.
송나라 때의 승려 불인지청이 읊은 게송의 한 구절처럼, 정오에 삼경(밤 11시~새벽 1시)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서 실제로 삼경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정오의 빛을 보는 눈과 삼경의 종소리를 듣는 귀에 마음이 이리저리 끌려다닌 것이다. 이는 성품의 자리가 명백하지 않으며 마음자리가 경계와 외연으로 옮겨간 것을 의미한다.
지금 있는 이 자리가 곧 도량이다. 생사는 바로 이 자리에 있다. 불법도 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나 자신의 마음이 도량이며, 변함없이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 선사와 스님의 대화에 담긴 뜻이 이러하다. 명백하다.
김영욱 한국전통문화대 강사 zodiacknight@hanmail.net
[1502 / 2019년 8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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