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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테세우스의 배

장기와 뇌를 갈아 끼워도 같은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스인들도 윤회를 믿어
영혼이 몸 옮겨 다닌다 생각
사람 정신능력은 뇌의 산물
영혼, 있어도 없어도 허깨비 

고대 그리스인들은 생각 외로 깊은 생각을 했다. 그중에 ‘테세우스의 배(Ship of Theseus)’라는 것이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괴수(怪獸) 켄타우루스를 죽인 영웅 테세우스와 아테네의 젊은이들이 탄 배에는 서른 개의 노가 달려 있었는데, 아테네인들이 이 배를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유지·보수하였다. 그런데 부식된 헌 널빤지를 뜯어내고 튼튼한 새 목재를 덧대어 붙이기를 거듭하다 결국 모든 부품을 바꿔버리자, 철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어떤 이들은 배가 그대로 남아있다고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다른 배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 배의 옛 부품을 다 모아 배를 하나 만들면, 어느 배가 그 배일까? 새 부품들로 바꾼 게 그 배일까? 헌 부품들을 모아 조립한 게 그 배일까? 

현대 정치철학의 시조 토마스 홉스(1588~1679)가 제기한 문제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최후의 심판 때 사자(死者)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한다고 믿었다. 식인종에게 잡아먹힌 기독교인이 부활할 때, 신이 그의 몸을, 그가 잡아먹히기 전에 그의 몸에서 분리되어 밖으로 즉 자연계로 배출된, 원자들을 모아 조합해 만들면 그는 같은 사람일까?    

테세우스의 배에서, 그리스인들은 인간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는 일종의 무아론(無我論)으로서 부처님과 유사한 생각을 한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변하는 현상 뒤에 불변의 세계가 있다고 보았으며, 피타고라스 같은 그리스인들은 몸은 변해도 영혼은 불변이라고 생각했다. 영혼이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이주해 다닌다는 것이다. 소위 윤회론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도 윤회론을 믿었다. 이게 발전하면 참나(眞我 true atman)가 된다. 참나는 견문각지(見聞覺知)의 주인공이고 우주를 창조한다. 청담·서암·진제 등 한국 선사(禪師)들의 주장이다. 

테세우스의 배는 시공(時空)을 항해하는 생명체 특히 인간에 대한 비유이다. 먼 훗날 의학이 발달하여 심장·간장·위장·방광·폐 등 장기를 모두 갈아 끼울 수 있게 되면 어떻게 될까? 뇌도 부위별로 갈아 끼우면 어떻게 될까? 그에 따라 성격과 지능이 바뀌면 전과 같은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주변 사람들은, 설사 그의 영혼이 같은 영혼이라 해도, 그와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술·도박으로 폐인이 되면, 불타는 사랑으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사람도 그와 같이 살 수 없다. 설사 영혼은 변한 게 없다 해도, 그렇다. 이 점에서 영혼은 무용지물이다. 유한한 생을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 밖으로 나타나는 말과 감정과 행동이다. 영혼은 말과 감정과 행동에 별로 영향력이 없는 듯하다. 몸이 마약에 중독 되어도 영혼이 중독 되는 것이 아닐 터인데도 그렇다. 비물질인 영혼이 화학물질에 지나지 않는 마약성분에 영향을 받겠는가?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영혼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그러므로 영혼은 아무 기능도 못하는 허깨비와 같은 존재이다.

뇌는 모듈(module)들로 이루어져 있다. 모듈은 고유한 기능을 하는 집단이다. 1000억 개 뇌세포가 수많은 팀을 짜서 특정한 기능들을 하는 것이다. 기억, 사람 얼굴 기억, 동물 얼굴 기억, 사람 이름 기억, 단어 기억, 언어, 모국어, 외국어, 감정, 이성, 몸 관리·조절, 공간감각, 음악, 계산 등을 관장하는 기능이 있다. 모듈은 많게는 수억 개가 있다. 신은 몸도 없고 뇌도 없다. 그러니 모듈도 없다. 인간이 신의 모양을 따라 지어졌다면, 왜 신에게는 뇌가 없고 뇌신경세포가 없을까? 인간은 왜, 모델인 신에게는 없는, 뇌가 필요하고 뇌 신경세포가 필요할까? 예수가 인간의 몸을 가졌다면 뇌가 있었을 것이다. 뇌가 있을 때와 뇌가 없을 때, 예수의 사고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몸이 있어도 죽은 자를 살리고 물을 포도주로 만들고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다면, 뇌가 없이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예수의 몸은 십자가형을 받을 때 육체적 고통을 겪기 위한 것일까? 

옛날 사람들은 인식력이 변한다는 것을 몰랐다. 정신능력이 뇌의 산물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불변의 세계를 추구한 것이다. 신이 뇌가 없이도 생각하고 감정을 낼 수 있다면, 인간도 안 그럴 이유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503호 / 2019년 9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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