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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찰을 지키는 오도자의 귀신들

기자명 주수완

역동적 모습·필선 표현…동양 회화 표준 돼

동양의 미켈란젤로라 불린 오도자
당나라 현종 시기 높은 관직 받고
사찰 벽화 300점 이상 그렸지만
안록산 난으로 현재 남은 것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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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모습 잘 담아내 칭송받아
그가 만들어낸 불교신장 스타일
불변의 존재로 널리 퍼져나가
쇼맨십 통한 미술대중화도 앞장

오도자의 필적으로 전하는 ‘산귀도’(하북성 곡양 북악묘의 석각 탁본).

아마도 지난 글에 소개한 고개지가 초기 르네상스의 거장 지오토에 해당한다면, 지금 소개할 오도자는 동양미술사에서 미켈란젤로에 해당하는 화가가 아닐까. 최소한 문인화가들의 그림이 높은 평가를 받게 되기 이전까지 오도자(吳道子, 685~758?)는 그야말로 화성(畵聖)이라 칭송받던 최고의 화가였다. 

당나라 현종 시기에 활약한 그는 궁정화단의 말단 관직에 있었다가 현종의 명을 받고 사천성 가릉강 300리의 풍경을 보고와 하루 만에 대동전이란 전각의 벽면에 풀어냄으로써 실력을 인정받아 내교박사라는 높은 관직을 제수 받았다. 이후 중요한 작품들을 쏟아냈는데, 그가 그린 장안의 사찰과 도관 벽화만도 300점이 넘었다고 한다.

그는 중국 산수화의 시조라고 칭해질 만큼 산수화에도 뛰어났지만, 오늘 살펴볼 그의 면모는 불화 작가로서의 모습이다. 그는 도석인물화에도 뛰어났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귀신을 잘 그렸다고 한다. 귀신을 잘 그린다는 것은 지금의 관점으로는 다소 품위가 떨어지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종교화를 그릴 때 초월적인 신들의 모습을 담아내면서 얻은 칭송이라 하겠다.

그런 그의 그림은 크게 두 측면에서 묘사되고 있다. 하나는 ‘오대당풍(吳帶當風)’으로, 그가 그린 인물이나 신들의 옷자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역동적인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고개지의 ‘춘잠토사’ 스타일과는 다르게 역동적 필력이 여과없이 그대로 강렬하게 발산되는 화풍이었던 것 같다. 두 번째로는 ‘백묘법(白描法)’이란 필법이다. 오대당풍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채색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필선으로만 대상을 그리는 방식이다. 언뜻 동양화는 원래 그런 것 아닌가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그 일반적인 관념이 실상 오도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가 동양회화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아쉽게도 그의 그림은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가 활약했던 현종 시기는 당나라 문화의 최전성기로 일컬어지지만, 현종 말기에 일어난 안록산의 난으로 장안이 쑥대밭이 된 것은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것이다. 그 와중에 그가 그린 벽화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오도자가 그린 벽화의 가치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벽화를 절취해 피신시켰다가 난이 끝나고 나서 도로 붙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몇몇 작품은 살아남아 한동안은 후세에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세월이 흐르며 사라지고 그저 전설로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토록 칭송받던 화가의 작품이 어찌 그의 작품이 사라진다고 함께 소멸될 수 있을까? 이미 그가 남긴 영향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불교미술 속에서 변하지 않는 그의 족적을 읽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재 그나마 그의 흔적을 잘 간직하고 있다고 하는 ‘산귀도(山鬼圖)’라는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은 백묘법의 그의 작품을 그대로 돌에 새겨두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을 보면 그가 잘 그렸다는 귀신 그림이 어떤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이런 종류의 그림을 사찰의 문에 자주 그려주었다. 일종의 부적처럼 악귀나 불운이 절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찰을 청정하게 한다는 뜻이다. 현재 사찰의 입구에 금강문을 세우고 금강역사를 모시는데, 그 역할을 장안의 절에서는 이러한 오도자의 귀신 그림이 했던 셈이다.

물론 이 선각화가 얼마나 오도자의 필력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종류의 그림을 사람들이 오도자의 화풍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막 강풍을 타고 눈앞에 나타난 듯 휘날리는 머리카락,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팔과 다리,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내리누르는 듯 쳐다보는 시선, 춤을 추는 듯한 역동적인 자세. 그 섬뜩함으로 정말 다른 귀신은 발을 붙이지 못할 것 같다.
 

‘불공변색신변진언경’의 신장 그림(고려시대, 리움미술관 소장).

그가 사찰 문에 그린 그림들이 너무 인기가 많고 그로 인해 많은 돈도 받자, 그의 제자 중의 한명인 노릉가가 죽기살기로 스승을 흉내 내어 다른 절 입구에 이런 신장상을 그려주었다고 한다. 꽤나 정성을 들였기 때문인지 제법 스승 오도자의 포스를 뿜어내는 그림이 되었다. 오도자가 지나다 이 그림을 보고는 깜짝 놀라면서 “이 자는 자신의 모든 기운을 이 그림에 쏟아버렸구나”하면서 꿰뚫어 보았다고 하는데, 정말로 얼마 안가 기력을 다한 노릉가는 숨을 거두었다고 하니, 정말로 사람을 홀릴 정도의 전설적인 그림은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그릴 수 없는 것이었던가 보다. 노릉가의 정성도 대단하지만, 이 일화를 통해 오도자 역시 평소 얼마나 그림 속에 자신의 많은 기운을 불어넣어가며 작업했는가 엿볼 수 있다.

그가 사찰 문간에 그린 이런 그림은 일종의 표준이 되었다. 지금도 절 문에 이런 신장(神將) 그림이 그려지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으며, 고려시대 불교경전의 표지에도 불경을 보호한다는 의미로 이런 종류의 그림이 맨 앞에 그려졌다. 비록 오도자의 진작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가 확립한 불교신장의 스타일은 불변의 존재로 널리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런 신장 그림도 출발은 불교회화가 아니었을 수 있다. 그 당시에 배민(裵旻)이라는 장군이 칼춤을 잘 추었는데, 오도자가 이를 그린 바 있다고 한다. 어쩌면 ‘산귀도’ 같은 그림의 리얼리티는 그런 칼춤을 묘사한 그림에서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대중적 인기에는 약간의 쇼맨십도 있었다. 그는 그림을 다 그려놓고도 일부러 광배는 그리지 않았다. 비로소 공개행사가 열리던 날, 대중들 앞에서 컴퍼스도 없이 동그란 광배를 일필휘지로 그려내니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쇼맨십이지만, 한편에서는 그야말로 미술대중화에 앞장섰던 선구자가 아니었나 생각되어 놀랍기만 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자의 초상도 사실은 오도자가 연구하여 만든 표준영정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가 확립한 것이 불교회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후대의 평가는 이후의 모든 산수화나 불화는 오도자에 이르러 일신한 것이었다고 하니, 불교미술 역시 오도자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인가.

주수완 고려대 초빙교수 indijoo@hanmail.net

 

[1503호 / 2019년 9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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