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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0대 총무원장 법전 스님

‘힘의 논리’ 앞세운 중앙종회 반발에 밀려 3개월여 만에 사퇴

1941년 불갑사서 사미계 수지
봉암사 결사서 성철스님과 인연
‘도림’ 법호 받고 스승으로 섬겨
수행 뛰어나 ‘절구통수좌’ 별칭

종회의장 이어 총무원장 선출
의현 스님과 갈등으로 중도사퇴
조계종 제11·12대 종정도 역임

법전 스님은 봉암사결사에서 처음 만난 성철 스님을 평생 스승으로 섬기며 시봉했다. ‘누구없는가’ (김영사)

1981년 12월18일 조계종이 다시 요동쳤다. 중앙종회는 이날 19대 총무원장 초우 스님과 중앙종회의장 의현 스님의 동반사직을 결의하고 20대 총무원장으로 법전 스님을 선출했다. 1981년 들어 세 번째 총무원장이었다. 한해에만 3명의 총무원장이 선출되는 것은 조계종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10‧27법난의 그림자가 채 가시지 않았지만 조계종은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다. 

초우 스님은 전임 총무원장 성수 스님과 달리 중앙종회의 확고한 지지 속에 출발했다. 그렇기에 6개월여 만의 사퇴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초우 스님의 사퇴는 불국사‧월정사 주지 인사에 따른 종단혼란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중앙종회의장 의현 스님과의 감정대립이 직접적인 배경이 됐다. 의현 스님은 이 무렵 종단의 실세로 불리던 40대 중진그룹의 대표 주자로, 초우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당선된 67회 임시종회에서 중앙종회의장으로 선출됐다. 초우 스님과 의현 스님 모두 40대 중진그룹들의 신뢰를 받았다는 점에서 총무원과 중앙종회의 유기적 협력관계가 이어질 듯 보였다. 그러나 친밀했던 두 스님의 관계는 불국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한 문제를 두고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7대 중앙종회회의록’에 따르면 중앙종회는 1981년 9월4일 68차 임시회에서 신흥사, 낙산사, 불국사, 석굴암을 총무원 직영사찰로 전환했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불국사 주지 월서 스님이 “중앙종회의 결의가 부당하다”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관계자는 이 소송과 관련해 그해 10월12일 총무원을 찾아 현장조사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의현 스님은 “집행부에서 불국사 사격을 격하하는 안을 내놓았을 때 내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바람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총무원이 격앙될 수밖에 없었다. 사견임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현직 중앙종회의장의 이 발언은 재판에 영향을 미칠 소지가 다분했다. 이 발언 이후 초우 스님과 의현 스님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됐다. 여기에 총무원에서 의현 스님에 대한 개인비리를 내사하고 있다는 소문이 흘러나오면서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두 스님의 감정대립은 그해 12월16~19일 열린 70차 정기중앙종회에서 노골적으로 표출됐다. 의현 스님은 종단 예산으로 설립한 낙산어린이집의 공금횡령 의혹을 집중적으로 캐물었고, 총무원 측은 의현 스님이 법원관계자에게 말한 내용을 공개하며 맞섰다. 격해질 대로 격해진 양측의 감정대립은 비공개회의로 전환된 뒤에도 길게 이어졌고, 결국 12월18일 총무원장과 중앙종회의장의 동반사퇴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일로 의현 스님은 중앙종회의원직까지 사직했다. 

중앙종회는 이날 초우‧의현 스님을 대신해 50대의 법전‧녹원 스님을 각각 총무원장과 중앙종회의장에 선출했다. 이는 초우 총무원장 체제를 출범시키면서 종단 정치의 전면에 나섰던 40대 중진그룹들의 일시적 후퇴를 의미했다. 초우‧의현 스님이 대립하며 종단혼란을 초래한 것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40대 중진그룹들이 종단 권력을 50대 선배들에게 양보한 것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중앙종회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언제든 종단 권력의 중심에 나설 수 있는 구조였다. 그렇기에 법전 총무원장 체제가 오래갈 것이라는 전망은 많지 않았다. 더구나 법전 스님은 “산에서 나무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경향신문, 1981년 12월19일자)라고 말할 정도로 평생 수행에 전념했던 수좌출신으로 행정경험이 부족하고, 정치적 기반도 미약한 상태였다. 때문에 ‘동아일보(1981년 12월19일자)’는 “(법전 총무원장 체제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나무 위에 올려놓고 밑에서 흔드는 풍토’가 없어져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법전 스님은 1925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자서전 ‘누구 없는가(김영사)’에 따르면 스님은 열네 살 되던 해 불연을 맺었다. “절에 보내지 않으면 스무 살을 넘기기 어렵다”는 동네 한 주역가의 말에 스님은 장성 백양사 청류암에 맡겨졌다. 그곳에는 훗날 태고종 종정을 지낸 묵담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묵담 스님은 선과 율에 밝았고, 점안의식과 천도재 등 불교의식에 일가견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행자생활을 시작한 스님은 새벽 2시30분에 일어나 묵담 스님을 시봉하며 ‘초발심자경문’과 각종 불교의식을 하나하나 익혔다. 그러길 3년, 스님의 염불소리는 무르익었고, 절 생활도 익숙해졌다. 그렇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속가에 대한 그리움은 쉽게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3년 만에 찾은 아버지를 따라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속가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그렇게 동경했던 곳이지만 속가에서의 삶은 이미 훌쩍 커버려 팔다리가 다 드러나 보이는 속복만큼 부자연스러웠다. 결국 스님은 출가를 결심했다. 1941년 영암 불갑사에서 주지 설제 스님과 사제의 연을 맺었고, 대강백 설호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이후 백양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수료했으며 1947년 백양사 만암 스님이 주도한 고불총림에도 참여했다. 

스님이 봉암사 결사에 참여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스님은 1948년 빨치산의 잦은 출몰로 혼란이 이어졌던 백양사를 나와 해인사로 향했다. 그 길에서 ‘봉암사 결사’ 소식을 접하고 봉암사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평생 스승이었던 성철 스님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스님은 “한눈에 머리가 밝아 보이고 아는 게 무궁무진해 보이는” 성철 스님에 매료됐고, “정진하는 대중들의 반듯한 모습”에 감화됐다. 스님은 봉암사에 방부를 들였다. 봉암사에서의 하루하루는 치열했다. 18개 항으로 구성된 ‘공주규약’은 누구에게나 엄격했다. 이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수좌들도 적지 않았다. 공양하고 울력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대부분 ‘화두’에 온 정신을 쏟아부었다. 행여 졸거나 잡념에 빠지면 어김없이 성철 스님의 호통과 죽비세례가 이어졌다. 몸은 고됐지만 수행의 깊이는 깊어졌다. 하루하루 법열(法悅)을 만끽했다. 스님은 훗날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꼽으라면 스물네 살에 스승을 만나 훌륭한 선지식들의 회상에서 공부했던 봉암사 시절”이라며 “무엇보다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결정적 시기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의 여파로 봉암사 결사는 해제됐다. 그러나 법전 스님은 경남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성철 스님을 시봉하며 수행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흐르자, 성철 스님은 ‘도림’이라는 법호를 내리고 처음으로 법제자로 인정했다. 법전 스님은 성철 스님을 시봉하면서도 원적사, 갑장사, 대승사 묘적암, 홍제사 등에서 정진하며 일대사 해결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번 앉으며 붙박이처럼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절구통 수좌’라는 별칭이 따라다닐 정도였다. 1969년에는 한국전쟁으로 폐사 위기에 놓인 김천 수도암을 복원해 선원을 열기도 했다. 

법전 스님이 종단의 전면에 나선 것은 1981년 1월19일 개원된 7대 중앙종회에서 의장에 선출되면서부터였다. 7대 중앙종회의원에 당선되기 전까지 종무행정의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초선의원이 중앙종회의장에 선출된 것은 이례적이었다. 평생 출가자로서 본분을 잊지 않으려 했던 법전 스님의 삶이 배경이 됐을 수 있다. 

‘경향신문(1981년 12월19일자)’에 따르면 법전 스님은 총무원장에 당선된 직후 기자간담회를 통해 “모든 종무행정은 공론을 모아 진행하되, 화합에 바탕을 두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법전 스님은 총무원장 당선과 함께 시련에 봉착했다. 전임 두 총무원장을 낙마시켰던 불국사 문제가 법원 판결로 다시 점화됐다. 대구지법 경주지원은 그해 12월22일 불국사 주지 월서 스님이 제기한 ‘조계종 제11교구본사 관할지정효력정지 가처분’ 신청과 관련해 월서 스님의 손을 들어줬다. 불국사를 총무원 직영사찰로 전환한 68차 임시종회 결의가 부당하다는 판결이었다. 이는 7대 중앙종회를 구성하면서 종헌상 연령이 부족하거나, 10‧27법난 때 징계를 받은 스님이 복권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종회의원으로 당선된 것이 원인이었다. 당시 조계종의 종무행정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법원의 이 같은 판결로 조계종은 다시 소용돌이쳤다. 당장 중앙종회의원에 대한 자격심사를 다시 진행해 새롭게 중앙종회를 구성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럴 경우 앞서 7대 중앙종회에서 결의한 내용이 모두 부정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했다. 종무행정에 큰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때문에 법전 스님은 불국사 직영사찰을 철회하고 월서 스님이 스스로 소송을 취하하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불국사 문제 해결에 가닥을 찾은 법전 스님은 종단의 체질개선에 착수했다. 종단 사상 처음으로 행자등록신고제를 실시했다. 각 본말사로 출가한 모든 행자들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행자등록신고제는 단일계단 시행 이후 자격이 없는 자의 수계를 막고 체제적인 행자교육을 진행하겠다는 취지였다. 종단이 점차 안정을 되찾자 종단재건을 희망하는 불자들의 시주도 늘어났다. ‘누구 없는가’에 따르면 법전 스님 취임 초기 텅 비어 있다시피 했던 총무원 통장 잔고는 퇴임 무렵엔 2억9000만원에 달했다. 

그러나 법전 스님이 총무원장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법전 스님 역시 당시 종단의 주도권을 쥔 40대 중진그룹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번에도 의현 스님과의 갈등이 빌미가 됐다. 의현 스님은 70차 종회에서 전임 총무원장 초우 스님과의 갈등으로 종회의원에서 사직했지만 자신의 사직으로 개최된 은해사 중앙종회의원 보궐선거를 통해 다시 종회에 복귀한 상태였다. 

‘7대 중앙종회회의록’에 따르면 의현 스님은 3월24일 71차 임시회 개원과 동시에 총무원장을 몰아붙였다. 의현 스님은 “당초 원장스님께서 자기에게 대권을 맡겨주면 재벌의 협조를 받아 각 도에 불교회관 1개씩과 유치원도 설립하겠다고 했다”며 “(그래서) 다른 스님들과 뜻을 같이해 원장스님으로 받들었던 것이다. 회관과 유치원 설립이 어떻게 추진됐는지 설명해 달라”고 따져 물었다. 취임 3개월도 안 돼 업무파악도 쉽지 않았던 총무원장에겐 과혹한 질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자 법전 스님은 “내가 원장 시켜 달라고 한 적도 없고, 재벌의 돈을 갖다 회관과 유치원을 설립하겠다고 말한 적도 없다”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스님은 이어 “의현 스님을 부원장으로 선임하기로 의원스님들과 약속했으나 그 이면에는 여러 문제가 있고, 화합에 중점을 둔 이상 통도사 쪽도 신경을 써야 한다”면서 “그 외 말 못할 사항들이 있다”고 밝혔다. 의현 스님은 “말 못할 사유가 뭔지 공개하라”고 다그쳤다. 결국 법전 스님과 의현 스님의 갈등은 총무원 부원장 선임 문제가 직접적인 배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스님의 대립이 격해지자 종회의장 녹원 스님은 추후 비공개회의에서 논의하기로 제안하면서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법전 스님의 마음은 이미 총무원을 떠나 있었다. 법전 스님은 이튿날 속회된 종회에서 “부덕한 사람이 원장 직책을 맡아 그 동안 여러 의원스님들께 흡족하게 못한 것과 처리 잘못으로 마음을 불편하게 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5부장들과 함께 사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갑작스런 사퇴발표에 의장 녹원 스님이 만류에 나섰지만, 법전 스님은 사퇴 선언과 함께 회의장을 떠났다. 1982년 1월8일 종정 성철 스님으로부터 총무원장 임명장을 받은 지 채 3개월이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훗날 법전 스님은 총무원장 재임 시기를 “젊은 시절 공부가 되지 않아 애를 먹었던 것 다음으로 심적으로 힘들었던 때”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중앙종회와의 갈등으로 또 다시 총무원장이 물러나자 조계종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은 싸늘했다. 언론은 “철마다 바뀌는 조계종 총무원장”이라고 조롱하는가 하면, 이전투구로 치닫는 조계종을 냉혹하게 비판했다. ‘경향신문(1982년 3월26일자)’는 “조계종 중앙종회가 ‘불교 제2정화(10‧27법난)’를 통해 재출범했지만 2년도 안 돼 구태의연한 종권다툼의 무대로 환원되고 있다”며 “법과 제도만으로는 조계종의 고질적인 병을 고칠 수 없음이 입증됐다”고 했다. 대화와 협력보다는 힘의 논리를 앞세운 정치대립으로 조계종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법전 스님은 다시 ‘절구통수좌’로 돌아갔다. 1983년 자신이 복원한 수도암에서 후학들과 함께 결사를 진행했고, 1984년부터 해인총림 선원 수좌를 맡아 스승 성철 스님과 함께 후학들을 지도했다. 1996년에는 성철 스님의 뒤를 이어 해인총림 방장에 추대됐다. 뛰어난 수행력과 혜안이 없었다면 백양사 문중이었던 법전 스님이 해인총림 방장에 오르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법전 스님은 2000년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을 거쳐 2002~2012년 제11‧12대 종정에 추대돼 조계종의 수행전통을 선양하는 데 앞장섰다. 그렇게 평생 수행자로서 본분을 잊지 않았던 법전 스님은 2014년 12월23일 법랍 73세, 세납 90세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04 / 2019년 9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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