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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발(制饔)

정치놀음 전락한 삭발

정치권에 삭발(制饔)열풍이 불고 있다. 조국 법무부장관 사퇴를 요구하며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소위 보수정치인들의 삭발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의 삭발을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까지 이어지면서 삭발의 의미가 희화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삭발하면 국민들은 불교를 떠올린다. 불교는 삭발의 종교다. 삭발은 출가정신의 상징이다. 출가수행자가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모두 깎는 것은 번뇌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단호한 결기의 표현이다. 불가에서 머리카락을 무명초(無明草)라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삭발이 꼭 불교에만 있는 전통은 아니다. 가톨릭에서도 7세기까지 가운데 머리카락만 미는 삭발식이 행해졌다. 이는 가시관을 쓴 예수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종교적 의미를 지닌 삭발이, 신념을 관철하기 위한 표현의 방법으로 우리사회에서 유독 자주 행해지는 것은 뿌리 깊은 유교적 전통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어떤 것이든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라는 오랜 관념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일관되게 유지되며 우리의 DNA에 축적됐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곧 목을 자르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누군가가 삭발을 하는 것은 곧 목숨을 내놓겠다는 선언이었다. 

과거 민주화운동의 여정에서, 혹은 삶의 벼랑 끝에 섰던 사람들이 마지막 저항수단으로 삭발을 택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최근 정치인들의 계속되는 릴레이 삭발로 그 의미가 크게 훼손되고 변질돼 버렸다. 삭발은 순수하고 결연했던 이미지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은 채 정치인들의 치졸한 이전투구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출가수행자의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서 느끼는 탈속의 결연함을, 삶의 벼랑 끝에서 핏빛 울음처럼 떨어져 내리던 머리카락의 전율을 이제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것만 같아 안타깝다.

김형규 대표 kimh@beopbo.com

 

[1505 / 2019년 9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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