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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마하리쉬의 힌두 명상 ①

기자명 김정빈

“진아, 행위 아닌 그대로 머무름으로써 드러나”

아픈 데라곤 없던 마하리쉬
어렸을 적 죽음의 공포 엄습
육체·죽음에 대해 깊이 사유
이후 진아에 대해 초점 맞춰 
한순간도 안놓치고 진아 몰입
본연상태 그대로 해탈 깨달아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현대 힌두 명상의 대가 라마나 마하리쉬(Ramana Maharshi, 1879~1950)의 어릴 적 이름은 벵카타라만이다. 그는 어렸을 때 한 번 잠이 들면 남들이 어떤 짓을 해도 눈을 뜨지 않는 특징이 있었다. 심지어 친구들이 그의 몸을 옮기거나 얼굴에 심한 장난을 해도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어릴 때 그의 마음속에서 ‘아루나찰나’라는 신비한 고동소리가 항상 울려 퍼졌다. 그는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집에 온 친척 한 사람이 아루나찰라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에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다. 알고보니 아루나찰나는 먼 곳에 있는 산의 이름이었다. 그는 나중에 그 산에 머물며 생활하게 된다.

고등학생이던 열일곱 살 때, 벵카타라만은 특별한 체험을 했다. 그때의 일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내 일생을 완전히 바꿔 놓은 그 거대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내가 영원히 마두라이(그의 고향)를 떠나기 6주 전쯤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집의 이층 방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나는 전혀 아픈 데라곤 없었으며, 그날도 건강에 이상이 없었는데, 갑자기 매우 강력한 죽음의 공포가 나를 엄습해왔다. 그 공포를 느낄 만한 신체적인 이유는 전혀 없었으며 나는 왜 공포가 생겼는지 그 이유를 따져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곧 죽을 것 같다’라고만 느꼈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의사를 찾아봐야겠다든가 윗사람 또는 친구들과 상의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겠다고 느꼈다.”

“그 죽음에 대한 공포는 나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일렀다. ‘자, 죽음이 왔다.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육체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는 나는 바로 죽음의 장면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나는 실제감을 느끼기 위해 내가 시체가 된 것처럼 생각하면서 팔다리에 경직 현상이 나타난 듯이 팔다리를 쭉 펴서 뻣뻣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숨을 죽이고 입술을 꼭 다물고서 아무 소리도 입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자, 됐다.’ 나는 혼자 말했다. ‘이 육체는 죽었다. 이 육체는 화장터로 옮겨져 장작더미 위에서 재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이 육체가 죽는다고 내가 죽는 것일까? 이 육체가 과연 나일까?’ 육체는 고요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육체와는 별개의 강력한 내 존재의 힘을 느꼈으며, 내면에서 울리는 ‘나’의 소리를 느꼈다. ‘나는 이 육체를 초월한 영(靈, spirit)이다. 죽어도 육체를 초월한 이 영은 죽음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나는 바로 불멸의 영이다.’ 이 모든 과정이 생각을 따라 전개된 것이 아니라는, 살아 있는 진리로서 섬광처럼 느껴졌으며 매우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그 ‘나’는 매우 실재적이었으며, 그 상태에서의 유일한 실체였다. 그리고 나의 육체와 연관된 의식적인 모든 행위는 그 ‘나’에 집중되었다.”

그 이후로 계속 그 ‘나’, 즉 ‘진아’는 강력한 힘으로 스스로에게 초점을 맞추었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이 진아에의 몰입 상태는 단 한순간도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다른 생각들은 악보의 음표들처럼 나타났다가는 사라져갔지만, 이 ‘나’는 마치 악보의 오선지처럼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육체가 말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다른 일을 할 때에도 나는 여전히 이 ‘나’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체험 이전에 나는 나의 ‘진아’를 전혀 알지 못했으며, 의식적으로 진아에 끌리지도 않았었다. 또한 그것에 대한 직접적이고 확실한 흥미도 없었으며, 그 안에서 영원히 살겠다는 생각은 더욱이 없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라마나 마하리쉬는 깨달음을 성취하기 전에 그 어떤 수행을 한 적이 없었다. 나중에 그는 말했다.

“나는 호흡법이나 자파(japa : 신의 이름을 부르는 명상) 등의 수행을 하지 않았고, 만트라(mantra) 수행도 하지 않았다. 또 명상이나 관조(觀照)에 대해도 몰랐다. 나중에 그것들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에도 그것들에 끌리지 않았다. 수행이라는 말 속에는 얻어야 할 어떤 대상과, 얻기 위한 수단이 암시되어 있다.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명상이나 지붕, 관조를 하면서 해야 할 일은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있는 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본연적인 상태로 있을 수 있다. 이 본연적 상태를 해탈·지혜 등으로 부른다.”

“사람들은 열심히 수행을 함으로써 어느 날 진아가 자신의 머리 위에서 거대하고 크나큰 영광으로 내려와 소위 말하는 깨달음을 얻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진아는 매우 직접적임에도 그것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떠한 행위를 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있는 상태 그대로 그냥 머무름으로써 진아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때의 체험을 통해 그는 ‘육체가 나’라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는 남다른 사람이 되었고, 그의 형은 그를 ‘성자’라느니 ‘요기(요가 수행자)’라고 부르며 놀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집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흥미를 잃고는 연필을 던지고 눈을 감았다. 그런 그를 그의 형이 나무랐는데, 그 나무람을 듣는 순간 그는 집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형에게 학교에 가야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서려 했다. 그러자 그의 형은 학교 가는 길에 자신의 대학 공납금을 갖다 주라고 하면서 아래층에서 5루피의 돈을 꺼내 가라고 말했다. 그는 5루피 중 3루피만을 갖고 나머지 2루피와 함께 다음과 같은 쪽지를 써서 남겼다.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나’는 지금 아버지를 찾아 이곳을 떠납니다. ‘이것’이 지금 하는 일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아무도 슬퍼하실 필요가 없고, ‘이것’을 찾기 위해서 돈을 허비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형의 공납금은 아직 내지 않았습니다. 여기 2루피가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벵카타라만은 신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고,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나’로 지칭하다가 중간부터는 일인칭인 ‘나’가 삼인칭인 ‘이것’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또 그는 서명을 할 부분에 밑줄 하나만 그려놓고 아무 글자도 적지 않았는데, 이는 그에게서 ‘나’라고 지칭할 만한 느낌, 또는 인식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나중에 그와 친하던 친구가 왜 자신에게 만이라도 집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지 그랬느냐고 묻자 그가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나? 나 자신도 몰랐었는데.”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505 / 2019년 9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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