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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시간 의식-상

시간은 변화로 측정…감각·생각 끊기면 시간 못 느껴

아무 변화 없다면 시간 측정 불가
“신은 시공 밖 존재” 논리적 모순
불교, 인간 정체성= ‘의식의 흐름’

시간은 변화를 통해서 측정한다. 시계는 물의 운동, 해의 운동, 톱니의 운동을 통해서 또는 원자의 운동을 통해서 시간을 측정한다. 여기에는 같은 시간에는 같은 양의 운동이 일어난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그런데 만약 아무것도 없다면, 즉 아무 물질도 에너지도 없다면, 즉 변하는 게 하나도 없다면 어떻게 시간을 측정할 수 있을까? 아차, 시간을 측정한다는 것은 측정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므로 ‘아무 것도 없다’는 말에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시간을 측정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시간이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즉 아무것도 없을 때, 즉 변하는 게 하나도 없을 때 시간이 있다고, 즉 시간이 흐른다고 할 수 있을까? 만약 시간이 흐른다고 한다면, 무얼 기준으로 그리 말할 수 있을까? 신이 존재한다면 그리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신은 우주 밖에 존재한다’고 하므로 그조차 불가능할 것 같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우주 밖에 존재한다’는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 뜻을 정의해야 한다. 혹자는 ‘신은 시간과 공간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만약 신이 시공(時空) 안에 있다면 신이 만들기 전에 시공이 있었다는, 즉 신이 만들지 않은 시공이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신이 모든 것의 창조주라면 신이 창조하기 전에는 시공이 없어야 하고, 그때 신은 시공 밖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는 시간이 없으므로 시간이 흐를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는 마음 또는 의식의 종교라 할 정도로 마음과 의식을 탐구했다. 주관적으로도 탐구하고 객관적으로도 탐구했다. 그런데 의식은 흐름(stream)이다. 그래서 인간의 정체성을 ‘의식의 흐름’으로 보기도 한다. 중생 즉 의식이 있는 생명체는 끝없이 의식이 흐른다. 발달한 생물일수록 의식의 흐름이 활발하다. 거친 ‘폭류(暴流)’라 표현할 정도로 활발하다. ‘유식30송’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모든 감각이 차단당해도 혹은 아무 빛 소리 등이 없는 곳에 유폐되어도, 인간은 자신의 의식의 흐름 즉 생각을 측정도구로 삼아 시간을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과 생각의 사이가 하나의 시간 단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생각이 더디 나면 시간 자체가 더디 흐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다가 생각이 끊어지면, 시간이 아예 안 흐르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러면 그는 한 생각 후 다른 생각이 날 때까지 몇 년이 흘렀어도 그 시간을 못 느낄 것이다. (실제로 탄광 붕괴사고로 인해 깜깜한 지하 갱도에 갇힌 사람들은 한 달이 지나도 일주일 정도 지난 것처럼 느낀다. 사고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뇌 과학에 의하면, 사람들이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것처럼 느끼는 이유는, 해마에서 처리되는 정보량도 감소하고 단기기억 중 장기기억으로 전환되는 양도 감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감각과 생각이 끊어진 사람은 시간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의식이 끊어진 사람은 비록 몸이 살아있다 하더라도 시간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태는 아무 의지적인 활동을 못한다는 점에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옛 사람들이 이런 상태를 열반의 일종으로 보았지만, 문제는 ‘사람이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어도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설사 사고나 전투로 죽어도, 그리고 자연수명이 다해 죽어도, 새 몸을 받으면 의식이 돌아온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 업(業)이 남아있는 한 의식은 반드시 돌아온다고 믿었다. 즉, 의식을 업의 산물 즉 연기물(緣起物)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리고 의식이 있는 한 반드시 윤회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윤회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의식을 끊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영원히 끊어 다시는 삼사라(輪廻界)로 돌아오지 않게. 물론 이는 불교도들의 목표였다. 

반면에 힌두인들은 의식은 결코 끊어지는 게 아니라고 보았다. 개별아 아트만(Atman)은 우주아 브라흐만(Brahman)이고, 브라흐만은 의식(Turya)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힌두인들에게 시간은 항상 흘러간다. 브라흐만이 꿈을 꾸는 한 시간은 흘러간다. 상상을 초월하는 긴 시간이 흘러간다. 수겁, 수억 겁, 수십억 겁, 수백억 겁씩…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길고 긴 꿈속에서… 브라흐만이 한 번씩 뒤척일 때마다 우주도 같이 출렁거리면서…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505 / 2019년 9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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