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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고대불교-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㉛ 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⑩

성골과 진골에 얽힌 신라 골품제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진덕여왕 최후 성골왕 기록

진덕여왕 당시 정국주도권
김유신과 김춘추 이미 장악

김유신은 가야왕실 후예로
진골 편입됐지만 차별 존재

김유신‧김춘추 인척관계 중첩
김유신 귀족대표 상대등 올라

진덕여왕과 무열왕의 교체를
성골‧진골 신분교체로 주장

​​​​​​​골품제 향한 추측성 주장 난무
새로운 접근법으로 변화 시도

사적 제21호 김유신 장군묘.
사적 제21호 김유신 장군묘.

27대 선덕여왕(632~647)이 즉위 16년(647) 1월 상대등 비담(毗曇)의 반란 중에 사망하자, 사촌 자매인 승만(勝曼)이 왕위를 이어 28대 진덕여왕(647~654)이 되었다. 승만이라는 이름은 대승경전의 하나인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불경(勝鬘獅子吼一乘大方便方廣佛經)’의 주인공인 승만부인(勝鬘夫人)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고, 그의 아버지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 國芬 또는 國眞安葛文王)의 국반이라는 이름은 석존의 삼촌인 곡반왕(斛飯王)의 이름에서 따온 것임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리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진덕여왕이 성골왕(聖骨王)의 최후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는데, 성골의 실체성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게 될 것이다.

진덕여왕은 여왕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대가 만만치 않은 분위기에서 즉위하였는데, 우선 왕권의 안정을 위해서는 귀족세력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위한  직후 최초의 인사로서 2월 이찬 알천(閼川)을 상대등으로 임명한 것은 바로 그에 대응한 조처였다. 알천은 선덕여왕 초기부터 장군으로서 고구려・백제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선덕여왕 5년(636) 장군 알천은 선덕여왕의 명을 받들어 필탄(弼呑)과 함께 독산성(獨山城)에 잠복하고 있던 백제장군 우소(于召)가 이끈 500명의 군사를 모두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이 사건은 선덕여왕의 예지력을 설명하는 유명한 지기삼사(知幾三事, 선덕여왕이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일)의 하나이었다. 다음해에는 대장군으로 승진하였으며, 선덕여왕 7년(638) 9월 고구려의 침공을 받은 칠중성(七重城, 경기도 적성 감악산 지역)의 주민을 안정시키고, 11월 그 성 밖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진덕여왕 즉위 당시에는 정치계의 최고원로의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마침내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에 오르기에 이르렀다. ‘삼국유사’ 권1 진덕왕조에서는 알천이 최고귀족회의에서 수석(首席)에 앉아 있었다는 설화를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여)왕의 시대에 알천공・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호림공(虎林公, 본 이름은 武林公으로 慈藏의 아버지)・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이 있었는데, 이들은 남산 우지암(于知巖)에 모여 나라의 일을 의논하였다. 이때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좌중에 뛰어들었다. 여러 공이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았으므로 수석에 앉았으나, 여러 공들은 모두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하였다. 신라에는 사령지(四靈地, 네 곳의 신령스런 장소)가 있어서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대신들이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의논하면 그 일이 꼭 이루어졌다.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요,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于知山)이요. 셋째는 서쪽의 피전(皮田)이고,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다.” 

이 최고귀족회의는 6부대표회의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서 진덕여왕대에도 이러한 귀족회의에 의해 크게 왕권이 제약을 받고 있었는데, 알천이 상대등으로서 귀족세력을 대표하여 수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위에 인용한 설화를 통해서 실제적인 실권은 이미 알천에서 김유신에게 넘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알천의 위상은 진덕여왕 말년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어 왕이 사망하자 귀족들에게 섭정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결국 김유신의 지원을 받고 있던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자 가운데 제1순위의 인물이었음은 물론이다.

진덕여왕대 알천이 귀족세력의 대표자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정국운영의 실제적인 권력은 김유신과 김춘추 2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김유신은 군사권을 장악했고, 김춘추는 김유신의 무력지원을 받으면서 정치와 외교의 권력을 장악하여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2인 가운데 김유신은 본래 본가야(금관국) 왕실의 후예였다. 법흥왕 19년(532) 10대 구형왕(구해왕)이 신라에 귀부하여 진골귀족의 신분을 부여받고, 6부체제의 사탁부(뒤의 사량부)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3인 가운데 무력(武力)이 특히 장군으로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 진흥왕 15년(554) 백제의 성왕을 죽이는 관산성(管山城) 전투에 참여한 바 있었다. 무력의 아들인 서현(舒玄)도 장군으로 활약했는데, 특히 숙흘종(肅訖宗)의 딸인 만명부인(萬明夫人)과 결혼하여 신라의 김씨왕족의 인척이 되었다. 숙흘종의 아버지인 일종갈문왕(日宗)은 22대 지증왕의 아들이자, 23대 법흥왕의 아우로서 사탁부의 수장이 됨으로써 법흥왕대 제2인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일종갈문왕의 아들 삼맥종을 24대 진흥왕으로 즉위시키고, 또한 그의 딸인 만호부인(萬呼夫人)을 동륜태자(銅輪太子)와 결혼시켜 26대 진평왕을 출생케 함으로써 신라 중고기의 왕통(王統)을 잇게 하였다. 

그런데 본가야 왕실의 후예인 서현과 신라 김씨왕족 출신의 만명부인은 같은 진골귀족의 신분에 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혼인을 ‘야합(野合)’이라고 하여 숙흘종이 완강하게 반대하였던 것을 보면 본가야 출신은 상당한 차별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현과 만명부인 사이에서 출생한 문명부인은 25대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의 아들 김춘추와 결혼하였는데, ‘삼국유사’ 권2 태종춘추공조에 의하면 파란을 겪은 끝에 선덕여왕의 중재를 거쳐서 비로소 공공연히 혼례를 행하였다는 사실을 보아 역시 신분의 차등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김춘추과 문명부인이 실제 혼인한 시기는 선덕여왕 때가 아니고,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사이에서 7인의 아들과 1인의 딸이 출생하는데, 그 가운데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이 출생한 때가 진평왕 51년(629)이었음을 보면, 결혼 시기는 그보다 몇 년 앞섰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었고, 35세 때인 진평왕 51년(629)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발탁되고 용수와 서현 등이 지휘하는 신라군의 고구려 낭비성 공격에 참여하여 군공을 쌓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많은 전공을 세우며 신분의 불리한 점을 극복해 나갔다. 특히 선덕여왕 11년(642)에는 당과의 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이 뺏길 위기에 처하고, 서쪽 국경의 요충지인 대야성(大耶城)이 백제에게 함락되자,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하러 갔던 김춘추가 오히려 억류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때 김유신은 1만의 결사대로 고구려를 위협하여 김춘추를 무사히 귀환케 하였다. 

김유신은 이후 선덕여왕 말년까지 알천에 이어 군권을 장악하고 백제와의 수많은 전투에 전념하여 집에 들릴 겨를조차 없었다. 선덕여왕 말년(647)에는 비담의 난을 진압하여 진덕여왕을 즉위시키는데 공을 세웠고, 진덕여왕 8년(654) 3월 매부인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면서 대각간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655)에는 무열왕과 문명부인(김유신의 둘째 여동생) 사이에서 출생한 지소부인(智炤夫人)과 결혼하여 중첩적인 인척관계를 맺게 되었다. 삼국통일의 계획은 김유신과 무열왕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수립되고 실행되었다. 무열왕 7년(660) 김유신은 마침내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이 되었다. 그리고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고, 백제가 멸망한 뒤 신라를 치려는 당의 계획을 탐지하여 무산시켰다. 문무왕 즉위년(661)에는 평양 근처에 도착한 당의 소정방 군대의 요청으로 군량을 수송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리고 문무왕 8년(668)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전투에는 고령으로 직접 참여하지는 못하였으나,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으로서 삼국통일의 원훈(元勳)으로서의 임무를 완수하고, 마침내 문무왕 13년(673)에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용수(용춘)는 진지왕의 아들이면서 왕위를 계승하지는 못하였지만, 진평왕대부터 신라 왕실의 실력자의 한 사람으로서 진평왕 44년(622) 내성사신(內省私臣)이 되어 왕실의 재정을 총괄하였고, 선덕여왕 14년(645) 황룡사의 9층목탑 건립의 감군(監君) 책임을 맡았던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용수는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과 혼인함으로서 진평왕과 4촌형제이면서 사위이자, 선덕여왕의 제부가 되었다. 용수는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원년조에서는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한 뒤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되었다는 사실만을 전하고 있으나, ‘삼국유사’ 왕력 제29 태종무열왕조에서는 “각간(角干) 문흥갈문왕(文興葛文王)”이었다고 하여 다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로 보아 용수는 원래 문흥갈문왕이었는데, 죽은 뒤에 아들인 김춘추가 즉위하면서 문흥대왕으로 추봉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선덕여왕, 그리고 사촌자매인 진덕여왕은 성골(聖骨)신분을 소지하였던 반면 그들과 당숙질 사이이자 처형 제부 사이인 용수는 성골보다 낮은 신분인 진골(眞骨) 신분을 소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선덕여왕의 자매인 천명부인과 용수 사이에서 출생한 김춘추도 진골 신분으로 만족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날의 역사학계에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백정(진평왕)-덕만(선덕여왕), 국반(진안갈문왕)-승만(진덕여왕)의 혈통은 성골 신분이고, 용수(문흥갈문왕)-춘추(태종무열왕)의 혈통은 진골 신분으로 구분하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데, 과연 타당성이 있는가? 나아가 성골과 진골의 개념 차이는 무엇이고, 신분 구분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28대 진덕여왕에서 29대 태종무열왕으로의 왕위 교체를 곧 성골에서 진골로의 신분 교체로 볼 때 그 이유와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역사학계에서는 골품제의 문제를 신라국가의 지배체제와 사회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주제로 인식하여 수십 편의 저서와 논문을 쏟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추측성의 주장만 난무할 뿐 설득력 있는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역사학계의 실정에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새로운 접근방법을 시도해 볼 생각이다. 다음 호에서는 하나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김춘추가 김유신의 후원을 받아 집권하게 되는 진덕여왕대(647~654)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사상의 변화 내용과 의미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05 / 2019년 9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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