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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솔거, 신라 리얼리티의 신화를 열다

기자명 주수완

황룡사 소나무는 불에 탔어도 죽지 않았다

신라 화가 솔거 담에 그린 소나무
새 날아왔다가 부딪쳐 떨어져
전통적 동양화 비사실적 보여도
사실성 추구하지 않은 건 아냐

법주사 앞의 소나무. 고찰마다 심어진 이런 소나무를 보고 솔거가 황룡사에 그린 것일까. 아니면 황룡사 소나무를 따라 사찰들이 소나무를 심은 것일까.

솔거(率去 혹은 率居)라는 신라의 화가가 황룡사 담벼락에 소나무를 그렸는데, 새들이 진짜 나무인줄 알고 날아와 앉으려고 했기 때문에 벽에 부딪쳐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실려있고, 신라시대의 그림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현실에서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는 매우 소중한 기록으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동양화는 사실적인 표현에 관심이 없었다고들 하지만, 미술이 사물과 자연을 그리는데 있어 어떻게 ‘닮음’을 추구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 이야기는 솔거의 그림이 얼마나 사실주의적인 그림이었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실제 이 설화처럼 당연히 동양의 화가들도 ‘닮음’에 관심이 많았다. 솔거의 이 설화는 마치 조르지오 바자리의 ‘르네상스 미술가 열전’에라도 나옴직한 설화처럼 들리는데, 바자리가 그토록 사실적이라고 칭했던 대부분의 르네상스 시대 화가의 그림들도 지금처럼 3D와 사진과 그래픽이 발전한 수준에서 보면 그저 그림일 뿐이다. 전통적인 동양화가 지금의 우리 눈에 비사실적으로 보인다고 해서 마치 그 당시부터 사실성을 추구하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한다면 오해다.

통일신라 전성기인 경덕왕대에 활약했던 솔거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는 재료를 살 돈도, 선생을 구할 돈도 없어 독학으로 연습을 했는데, 나무하러 가서는 나무뿌리로, 밭일 하러 가서는 호미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연습했다. 그가 그림을 잘 그리도록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하자 단군이 내려와 영감을 주었다는 믿지 못할 후대의 설화는 아마 ‘천부적인=자질’이라고 표현할 때처럼 그의 재능을 하늘이 내렸다는 칭찬의 뜻이었겠지만, 그는 천부적일 뿐 아니라 그보다 더한 노력파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가 리얼리즘 화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화실에서 선생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자연을 접하며 사생하는 능력을 키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수광(1563~1629)의 ‘지봉유설’에서는 그가 승려였다고도 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보다 정확한 기록으로 생각되는 ‘삼국사기’에는 그런 기록이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실제는 세속화가가 맞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불교회화를 많이 그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야기이거나, 혹은 그의 이름 ‘솔거’가 ‘도솔천에 가다(率去)’ 혹은 ‘도솔천에 머문다(率居)’는 불교적 의미로 해석되었기 때문에 뒤늦게 붙은 해석으로 생각된다. 만약 그가 정말 승려였다면 가난한 집 자식으로서 고생하며 그림을 배우지는 않았을 것 같다. 물론 화가로서 활약하다 노년에 출가했을 가능성 정도야 열어둘 수 있다.

황룡사 소나무 벽화 외에도 단속사의 유마거사상과 분황사의 관음보살상이 그의 대표작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전하는 것이 없다. 오도자처럼 전칭작으로 전하는 것조차 없으니 상상으로 추정해보는 수밖에 없다. 연구자들은 황룡사의 소나무 그림이 새들이 착각할 만큼 사실적이었다는 점에서 아마 정교하게 채색된 청록산수풍의 그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청록산수는 청·녹색, 그리고 갈색을 위주로 그린 채색화인데 실제 동양화의 소나무 그림을 보면 그런 색조를 띄는 것이 많으니 충분히 가능한 추정이다. 

경주 낭산에서 수습된 장승요 스타일의 석조관음보살입상. 솔거의 분황사 관음상도 이런 사실적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절에 소나무를 그렸을까? 요즘도 법당 벽화에 불교설화를 그리면서 배경에 소나무 그림이 들어가는 일은 흔하다. 그러나 소나무만 단독으로 그리는 일은 흔치 않다. 솔거가 배경의 나무 따위를 그린 것을 가지고 그런 전설이 생겨난 것은 아닐 것이다. 마치 실제 소나무가 서있는 것 같은 거대한 크기로 그렸을 것이다. 혹 그 아래에 스님들의 수행장면 같은 것을 그려넣거나 했을 수도 있지만, 중심은 어디까지나 소나무였을 것 같다. 

지금은 소나무 그림이 흔하지만,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당나라 시대의 돈황 막고굴에서 소나무 그림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소나무는 한국·일본이 원산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청록산수화풍으로 그렸다 할지라도 중국에서의 소나무 그리는 법이라는 것은 당시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황룡사의 소나무는 오롯이 솔거의 화풍이었을 것이며, 당연히 그가 산에서 밭에서 익힌 사생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군자도 아니고, 바로 소나무가 황룡사에 그려진 것은 어쩌면 경덕왕대의 문화적 자부심, 즉 중국풍이 아닌, 국풍(國風), 바로 우리 것을 동등하게 내세우기 위한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당시 지도층의 의지였다면,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었을 터. 그것을 뒷받침할 예술가가 바로 솔거였던 것이다. 참고로 고려 왕건의 능 내부 벽면에는 소나무 그림과 매화·대나무 그림이 각각 양쪽에 그려졌는데, 의례적 공간에 이런 소나무 그림을 그리는 어떤 전통이 솔거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의 다른 두 대표작인 분황사 관음상과 단속사 유마상은 본격적인 불화다. 여기에는 그의 화풍을 상상해볼 수 있는 작은 단서들이 있는데, 특히 그가 중국의 거장 화가인 장승요와 연관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즉, 어떤 기록에는 중국의 장승요가 신라에 건너와서 만들었다고 전하는 상이 다른 글에서는 솔거가 만들었다고 되어있는 식이다. 심지어는 장승요가 신라로 넘어와 이름을 솔거로 개명했다는 이야기까지 만들어졌다. 물론 장승요가 신라로 건너왔다는 이야기는 그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다만 장승요는 서역화법, 즉 요철법(일종의 음영법)을 구사하여 입체감 있는 인물화를 그렸던 것으로 유명한데, 솔거가 그린 그림이 그런 풍을 지녔기에 장승요와 비교되었던 것 같다. 결국 황룡사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사실적이었다는 이야기다. 

솔거의 황룡사 소나무는 시간이 지나 색이 바래 후대에 다른 사람이 새로 칠을 했지만,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마저도 몽골 침입 때 황룡사가 불타면서 함께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나라 사찰 곳곳에 솟은 큰 소나무들을 보면 혹 솔거가 그린 소나무가 튀어나와 진짜 소나무로 화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황룡사의 소나무는 불에는 탔어도 죽지는 않은 셈이다.

주수완 고려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505 / 2019년 9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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