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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인간은 가변적인 존재

기자명 마성 스님

인간은 부처도 악마도 될 수 있는 불완전 존재

인간 출생은 본래 평등치 않아
신분과 능력에도 차별이 발생
노력 여하에 따라 향상 되거나
더 타락할 수 있는 가변적 존재

연못에는 아직 물밑에 있는 연꽃도 있고, 수면에 거의 올라온 연꽃도 있고, 물위로 올라와서 수면에 닿지 않는 연꽃도 있다. 인간의 능력에도 차별이 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연못에는 아직 물밑에 있는 연꽃도 있고, 수면에 거의 올라온 연꽃도 있고, 물위로 올라와서 수면에 닿지 않는 연꽃도 있다. 인간의 능력에도 차별이 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대승불교에서는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른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 그것이다. 불성이란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다른 말로 여래장(如來藏)이라고도 한다. 불성사상은 인간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는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에 토대를 두고 있다. 심성본정설은 인간의 지고선(至高善), 즉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인간관이다.

불성사상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을 자신 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들의 잔인함과 악독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 지구상에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본성에는 부처의 성품과 악마의 속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사실 인간은 부처가 될 수도 있지만,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는 불완전하고 가변적(可變的)인 존재다. 붓다는 적나라한 인간상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법을 설하기로 결심했으며, 또 그 사람의 근기에 따라 다르게 법을 설했던 것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성취한 후 4주째 되는 날, 부처의 눈(Buddhacakkhu, 佛眼)으로 세상을 살펴보았다. 붓다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 번뇌의 더러움이 적은 사람도 있고, 번뇌의 더러움이 많은 사람도 있으며, 근기가 예리한 사람도 있고, 근기가 둔한 사람도 있으며, 자질이 착한 사람도 있고, 자질이 악한 사람도 있으며, 가르치기 쉬운 사람도 있고,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도 있으며, 후세와 죄과에 대해 두려움을 알고 사는 사람도 있고, 후세와 죄과에 대해 두려움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MN.Ⅰ.169)

이를테면 연못에는 아직 물밑에 있는 연꽃도 있고, 수면에 거의 올라온 연꽃도 있으며, 물위로 올라와서 수면에 닿지 않는 연꽃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인간도 능력에 차별이 있음을 붓다는 보았던 것이다. 붓다는 물위에 올라와서 수면에 닿지 않는 연꽃과 같은 사람에게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설하면 그도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설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붓다는 인간의 능력에 차별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 인간의 능력에 차별이 생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중생들의 인내심이 다르고,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임이 다르고, 배움의 정도가 다르고, 다른 견해에 의지하고, 구하는 바 즐거움이 각기 다르고, 익힌바 업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T1, p.8b) 이처럼 인간 개개인의 능력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법문의 내용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붓다는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방의 수준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한때 세존께서 사왓티에 머물고 있을 때, 꼬살라국의 빠세나디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왕이시여, 세상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네 종류란 무엇인가? 즉 어둠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 어둠에서 밝음으로 가는 사람, 밝음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 밝음에서 밝음으로 가는 사람이 그것입니다.”(SN.Ⅰ. 93)

첫째, 어둠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이란 비천한 가문에 태어나 빈궁하게 살면서 몸과 입과 뜻으로 온갖 악행을 저질러 사후에 나쁜 세계에 태어나는 사람을 말한다.
둘째, 어둠에서 밝음으로 가는 사람이란 비록 비천한 가문에 태어나 빈궁하게 살면서도 몸과 입과 뜻으로 온갖 선행을 행하여 사후에 좋은 세계에 태어나는 사람을 말한다.
셋째, 밝음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이란 부유한 가문에 태어나 풍족하게 살면서 몸과 입과 뜻으로 악행을 저질러 사후에 나쁜 세계에 태어나는 사람을 말한다.
넷째, 밝음에서 밝음으로 가는 사람이란 비록 부유한 가문에 태어나 풍족하게 살면서도 몸과 입과 뜻으로 온갖 선행을 행하여 사후에 좋은 세계에 태어나는 사람을 말한다.

위에서 소개한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네 부류의 사람 중에서 가장 최상의 사람은 ‘밝음에서 밝음으로 가는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는 밝음에서 밝음으로 가는 사람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처음부터 모든 조건과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말로 표현하면 금수저를 갖고 태어난 자들이 이에 속한다.

반면 현재는 비록 어두운 환경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 밝음으로 가는 사람의 삶이야말로 가장 값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어쩌면 이 부류의 사람을 위해 설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른바 흙수저에서 금수저로의 변신을 의미한다.

이 경전에 담겨 있는 참뜻은 인간은 출생 성분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붓다는 다른 경전에서도 인간은 출생 성분에 따라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행한 행위에 의해 천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성자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인간의 출생은 본래 평등한 것이 아니다. 신분의 차별은 물론 능력에도 차별이 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에 따라 높은 위치의 인간이 될 수도 있고, 낮은 위치의 인간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번 정해진 인간의 위치가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인간은 점차 향상될 수도 있고 점차 타락할 수도 있는 가변적인 존재인 것이다.

만약 인간이 올바른 길로 나아간다면 부처에까지 이를 수도 있지만, 퇴보를 거듭한다면 점점 더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수도 있다. 밝음에서 어둠으로 갈 것이냐, 어둠에서 밝음으로 갈 것이냐는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 있다. 한마디로 인간은 부처가 될 수도 있지만 악마가 될 수도 있는 불완전하고 가변적인 존재임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ripl@daum.net

 

[1506호 / 2019년 10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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