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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김준근 ‘산제’

기자명 손태호

건강하고 자유로운 돼지의 세상을 꿈꾸며

예전부터 인간과 가까웠던 돼지
게으르다는 편견으로 작품 전무

19세기 풍속화가 김준근 것 유일
멧돼지의 강인함·날렵함 잘 표현
돼지열병 막아 강제 도축 없기를

돼지를 온전히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19세기 풍속화가 김준근의 ‘산제'.

추석연휴가 끝나자마자 조금 걱정스러운 뉴스를 접했습니다. 올해 동남아와 중국에서 발병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우리나라 파주의 한 돼지농장에서도 확인되었다는 뉴스입니다. 이 가축전염병은 아직 백신도 없고 치료제도 없어 걸리면 100% 사망에 이르는 무시무시한 병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에서 유입될까 공항에서 돼지고기가 조금이라도 포함된 모든 식품은 반입을 금지하였고 심지어 무단 반입 시 1000만원 이라는 큰 금액의 벌금까지 부과하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북한에서 유입될까 싶어 DMZ에서 남쪽으로 오는 멧돼지들도 전부 사살하라는 지침이 내려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예방 노력에도 불구하고 파주 돼지농장에서 발병하여 모든 사람들의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파주 옆 연천군과 김포, 인천에서도 발병 소식이 전해져 전국으로 확산될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2019년은 기해년으로 특별히 황색을 의미하는 기(己)와 돼지를 의미하는 해(亥)로 60년만에 돌아오는 ‘황금돼지해’이기에 우리나라에 좋은 일만 많이 생기길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는 돼지 전염병으로 현재까지는 백신도 없고 살처분 말고는 마땅한 방도가 없어 ‘돼지 수난의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돼지는 우리 역사와 민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십이지 동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십이지(十二支)는 땅의 도(道)를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 등으로 표시한 일종의 기호로 연/월/시와 방위를 기록하는데 쓰였습니다. 이러한 십이지 기호를 동물의 형상으로 표시한 것은 중국 서주시대까지 올라가는 매우 오래된 전통입니다. 십이지신은 동물 얼굴에 사람 몸의 형태로 이런 수수인신(獸首人身) 형상은 중국에서 수(隋), 당대(唐代)에 크게 유행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통일신라시대부터 조각상의 형태로 많이 만들어져 김유신릉, 성덕왕릉 등의 호석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 중 돼지는 부여 시대에는 관직 이름에 사용되었고, 고구려와 고려의 도읍을 정해주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예부터 우리는 제사 지낼 때 희생 제물로 사용해 왔고, 재물과 복을 가져다주는 상서로운 동물로 생각해 왔습니다. 이런 십이지상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경복궁 근정전 월대에도 남아 있습니다. 
 

가난하여 의복이 없는 이에게 옷을 전하는 선신인 궁비라대장.  

불교에서도 돼지는 십이지신의 하나로 불법을 외호하는 신이한 동물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중국 소설 ‘서유기’에서는 돼지가 현장 스님을 모시고 천축까지 불경을 구해오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특히 약사여래신앙과 관련하여 약사전 십이지신도 등에 등장하는 돼지는 해신(亥神) 궁비라대장(宮毘羅大將)입니다. 궁비라대장은 약사여래를 수호하는 십이야차대장(十二藥叉大將) 중 하나로 가난하여 의복이 없는 이에게 옷을 전하는 선신(善神)이라고 합니다(그림 2). 또한 십이지 해신도는 번으로도 제작되어 절에서 큰 행사를 할 때 잡귀의 침범을 막는 의미로 12방위 가운데 북서북에 걸기도 하였습니다(그림 3).

이런 상징 이외에도 실제 생활에서 돼지는 늘 가까운 동물이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농사를 도와주는 소를 중요시하여 조선시대 내내 소 도축을 금지하여 공식적으로 소고기는 먹기 어려운 육류였습니다. 물론 아무리 지엄한 국법이 있다 해도 양반들의 소고기 애호를 막지는 못했지만 평민 이하 일반 백성들에게 소고기는 결코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돼지를 통해 여러 제사음식을 만들고, 먹기 위해 키우고 기르는 일을 권장하곤 했습니다. 

또한 정월 첫해일(亥日), 돼지날 해시(亥時)에 술을 담고 둘째와 셋째 돼지날 세 번에 걸쳐 빚는다고 하여 ‘삼해주(三亥酒)’라 불렸던 술은 돼지가 동물들 중 가장 느려서 삼해주를 마시면 취기도 천천히 올라온다는 속설 때문에 양반들에게 인기 있는 고급 술이였습니다. 하지만 돼지 사육은 워낙 많은 곡식을 필요로 한 일이라 국가적으로 크게 늘지는 못했고 소고기나 닭고기에 비해 아주 좋아했던 고기도 아니었기에 많이 사육하지는 않았습니다. 19세기에 들어서야 비교적 흔해져 도성의 냉면과 국밥의 돼지고기에 대한 이야기가 문헌에 자주 등장합니다.

이처럼 늘 우리 민족과 함께 해왔던 돼지는 이상하게도 그림으로는 거의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도화서 화원이든, 선비화가든 돼지를 주제로 한 그림은 한 점도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사냥하는 수렵도에서 쫓기고 잡히는 멧돼지들뿐입니다. 집돼지는 정말 한 점도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돼지는 먹기만 하고 일은 하지 않는 게으른 동물이라는 이미지 때문일 것입니다. 
 

십이지 해신도는 절에서 큰 행사를 할 때 잡귀의 침범을 막는 의미로 걸어놓기도 했다.

돼지가 온전히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일한 그림은 19세기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의 ‘산제’입니다(그림 1). 그림속의 돼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돼지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뾰족한 대가리와 날카로운 눈, 근육질의 다리 등 날렵한 모습입니다. 온갖 산을 뛰어다니며 호랑이를 제외하곤 무서울 것이 없던 멧돼지의 강인함과 날렵함을 잘 표현한 그림입니다. 김준근은 그림의 제목을 한글로 ‘산제’로 적어 놓았습니다. ‘산 돼지’란 뜻인데 돼지는 저(猪), 해(亥)를 사용해야하는데 ‘제’를 사용했을까요? 그 이유는 이 시기에 ‘저’가 ‘제’로 변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저’가 아닌 ‘산제’라 적었습니다. 이런 변형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제육볶음’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집집마다 축사에서 몇 마리씩 키우던 돼지가 지금처럼 대규모로 사육하기 시작한건 1960년대 이후부터입니다. 사료용 작물을 재배하고 기름을 짜낸 옥수수나 콩 찌꺼기가 대량으로 공급되면서 돼지사육은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더욱 쉽고 빠르게 키우기 위해 몸도 움직일 수 없는 좁은 축사에 가둬 오로지 먹고 살만 찌우는 새로운 공장식 사육이 성행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위생시설이나 환경은 뒷전이 되었습니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의 문제입니다. 이런 상황이니 새로운 질병이 발생하고 돼지는 면역력이 취약해져 한 나라의 전염병이 전 세계로 쉽게 퍼져나가곤 합니다. 

돼지열병 농가가 확인되면 반경 3km 안에 모든 돼지는 살처분하게 됩니다. 8년 전 구제역 파동 때 수많은 가축을 매몰하여 온 나라가 가축들의 도살장이 되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무쪼록 돼지열병의 확산이 저지되어 수많은 생명들을 강제로 죽이는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돼지농가들의 시름도 빨리 사라지길 바랍니다. 가축과 동물들도 살기 어려운 곳에 어찌 인간이 잘 살 수 있겠습니까?  김준근의 ‘산제’ 멧돼지들처럼 자유롭고 건강하게 뛰어다녀도 아무 이상 없는 그런 나라이길 바라봅니다.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506호 / 2019년 10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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