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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에 내걸린 왜곡된 법계도

기자명 이재형
  • 데스크칼럼
  • 입력 2019.10.04 17:02
  • 수정 2019.10.09 06:25
  • 호수 1507
  • 댓글 7

가톨릭 순교정신 담은 작품에
의상 스님 법계도 그려 넣어
주어사·천진암 사례와 유사

바티칸 교황청에 기증된 나전칠화 '일어나 비추어라' 중 법계도 부분.
바티칸 교황청에 기증된 나전칠화 '일어나 비추어라' 중 법계도 부분.

며칠 전 전 세계 가톨릭 본산인 로마 교황청에 한국의 미를 담은 대형 나전칠화가 걸렸다는 기사들이 보도됐다. 가로 9m 60cm, 세로 3m의 이 작품은 여주 옹천박물관장 최기복 신부의 기획과 김경자 한양대 명예교수의 지도아래 3명의 무형문화재 전수자가 참여해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일어나 비추어라’는 제목의 나전칠화는 가톨릭 순교정신을 담은 것으로 2014년 가톨릭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순교자 124위 시복을 기념해 제작됐다. 로마 교황청은 이 작품을 전 세계에서 온 신학생을 가르치는 우르바노대학 로비에 설치한 뒤, “예비 사제들과 방문객들에게 한국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열정적으로 지켜온 영성과 신앙을 일깨워줄 것”이라고 밝혔다. 김희중 대주교도 “작품에는 평신도들에 의해 세워진 한국교회 신앙 선조들의 정신과 뜻, 이를 이어받아 순교정신으로 살겠다는 우리의 다짐이 담겨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데 이 나전칠화에 대해 불교계에서 불편한 목소리들이 잇따르고 있다. 가톨릭 순교정신을 담아낸 작품에 법계도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법계도는 신라 의상 스님이 ‘화엄경’의 핵심 교의를 담아 668년 지은 게송인 법성게를 그림 모양으로 만든 도인(圖印)이다. 화엄의 오묘한 경계를 드러내어 자기 마음이 곧 부처님 마음이고 자신이 바로 부처님임을 깨닫게 하는 고도의 상징체계인 동시에 불교수행법이다.

법성게가 만들어진 이후 지금까지 1351년간 수많은 사찰에서 매일 법성게를 수지독송하고 있으며, 그것이 담긴 법계도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각별한 문양으로 여겨져 왔다. 해인사, 고운사, 백양사 등 교구본사들을 비롯해 전국의 많은 사찰들이 법계도를 활용해 불자들의 불교 이해와 신앙심 고취를 위해 노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법계도가 뜬금없이 가톨릭 나전칠화 오른편에 큼직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다. 더욱이 법계도를 들여다보면 기가 막힌다. 맨 위의 가톨릭 성화 아래 작은 원들로 표현된 법계도는 중간 중간에 여백을 줘 마치 가톨릭의 묵주처럼 만들어놓았다. 원래 법계도가 중앙에서 시작해 54각을 돌다 다시 중앙으로 돌아오지만 나전칠화 법계도는 변형을 가해 종착점을 아래쪽으로 만들었고, 그곳에 가톨릭 상징물을 그려 넣었다. 얼마 전까지 명확한 십자가 모양이었으나 논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근래 약간의 변형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맨 위의 성화로 시작해 중간에 법계도를 거쳐 결국 십자가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의 기획자들은 법계도를 주변 십장생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문양쯤으로 간주했거나 법계도에 담긴 화엄사상을 통해 모두가 어우러지는 세상을 표현했다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핵심 주제는 순교정신이다. 순교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더라도 타협하지 않는 정신을 일컫는다. 그런 가톨릭 순교정신을 드러내는 데 불교 고유의 문양인 법계도와 화엄사상이 이용되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적절하지 않다.

편집국장
편집국장

작품 왼쪽에 등장하는 천진암과 주어사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스님들이 천주교도들에게 강학 장소를 제공했다가 폐사가 된 절이다. 그럼에도 가톨릭계는 이곳의 불교 역사를 지운 채 자신들의 성지로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오고 있다.

한국 가톨릭이 바티칸에 한국의 미를 강조하든 순교정신을 호소하든 불교계가 왈가왈부할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이 땅의 불교계가 오랜 세월 전승하고 신성시하는 상징체계를 자신들의 순교정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도구로 이용한 것까지 침묵할 수 없다. 이는 이웃종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저버린 행위로 여주 주어사나 광주 천진암 사례의 참담한 반복일 수 있다. 한국 가톨릭계는 자신들의 순교정신을 표현한 나전칠화에 법계도를 그려 넣고, 그것을 변형시킨 이유를 명확히 밝혀야 할 것이다.

mitra@beopbo.com

[1507호 / 2019년 10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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