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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주방, 궁중미인으로 화현한 관음보살

기자명 주수완

자신의 예술관보다 여론 반영하며 경계 허물어

인도서 표현된 보살은 꽃미남 스타일
당나라 주방이 아름다운 이미지 확립
대중들 의견 수렴에 의미 두고 작업
관객 참여는 현대적 창작방식과 유사 

주방의 작품으로 전하는 ‘잠화사녀도’의 부분. 중국 요녕성 박물관.

불교미술, 특히 보살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을 보면 많은 분들이 물어보신다. “보살은 여성입니까?” 혹은 “보살은 남성인데 왜 여성으로 표현됩니까?” 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은 있지만 뚜렷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언뜻 불교미술의 발상지인 인도에서도 보살은 여성처럼 묘사되고 있으니, 단지 동아시아에서만 보살이 여성처럼 묘사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인도에서부터 그런 전통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도에서 표현된 이런 여성형 보살은 사실은 여성이 아니라 꽃미남 스타일에 더 가깝다. 지금도 힌두교에서는 쉬바나 비슈누 신이 마치 여성처럼 묘사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는 천진난만한 모습의 미소년을 모델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나 중국의 보살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염도 자란 남성이 분명하다. 그러나 분명 부처님을 표현할 때 드러나는 남성성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이를 여성성이라고 하기보다는 엄밀하게 말하면 남성 성징이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소년과 같은 모습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여하간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초기에는 보살상이 지닌 미소년과 같은 모습이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지만, 점차 여성적 모습이 부각되면서 당나라 시기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여성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 여성성이라는 것은 사실 얼굴에서보다는 자세에서 더 부각되는 것 같다. 즉, 얼굴 자체만 보면 앳된 소년의 얼굴일 수도, 혹은 꽃미남 얼굴일 수도 있어 여성적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서있는 자세를 보면 분명 여성을 표현할 때의 자세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허리를 살짝 비튼 듯한 자세나 손가락을 섬세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 등은 전통적으로 남성보다는 여성을 표현할 때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모습이다. 
 

돈황 막고굴 제199굴의 서벽에 그려진 보살 벽화. 8세기 중반~9세기 전반.

불교 보살 이미지에 있어 이런 아름다운 자태의 이상형의 전형을 확립한 작가가 바로 당나라 덕종(재위 779~805) 연간에 활약한 주방(周昉)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주로 궁중 여인들의 자태를 잘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던 화가였는데, 그런 그가 불화를 잘 그린 것으로도 유명했으니, 틀림없이 아리따운 자태의 보살상을 그렸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는 공식적인 궁중화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주경현의 ‘역대명화기’에 의하면 그는 관직에 오른 관리였지만 그림은 아마추어 화가로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황제 덕종은 티베트와의 전쟁에서 무공으로 이름을 날린 주방의 형 주호를 불러 자신이 중수한 장경사라는 절의 벽화를 특별히 주방에게 맡기고 싶으니 동생에게 잘 말해달라는 당부까지 했다. 만약 그가 궁정화가였다면 그냥 일을 시키면 될 일인데, 이렇게 주방의 형에게 부탁한 것은 지체 높은 관리에게 그림을 부탁하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림을 맡기고 싶어했다는 것은 그가 프로 화가 못지 않은 뛰어난 그림으로 명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주방이 여느 고집스런 예술가들과는 좀 달랐다는 것이다. 장경사 벽화를 주방이 그린다는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 과정을 구경했는데, 우선 지금 같으면 가림막이라도 쳐놓고 했을 작업현장을 모두 볼 수 있게 개방한 상태에서 진행을 했고, 거기다 사람들이 이건 잘 되었고, 저건 잘 못 된 것 같다고 왈가왈부하는 것을 주방은 흘려듣거나 무시하지 않고 여러번 대중들의 여론을 반영하여 고쳐가며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잘 그렸다는 미인도 역시 대중적 취향의 장르이니만큼 그는 자신의 예술관을 앞에 내세우기보다는 그림으로 대중들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는데 더 의미를 두었던 것이 아닐까. 이처럼 인터랙티브한 창작은 언뜻 작가와 관객의 경계를 허물고 작품에의 참여를 요구하는 현대적 창작방식과도 유사한 면이 있는 듯하다.

그가 남긴 불화는 남아있는 것이 없어 구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지만, 그가 그렸다고 전하는 ‘잠화사녀도(簪花仕女圖)’를 통해 그가 어떤 불화를 그렸을지 추정해볼 수 있다. 장언원의 ‘역대명화기’에서 주방의 인물화는 “채색이 부드럽고 화려하며, 옷매무새는 날렵하고 단정하다”고 했는데, 실제 그런 모습이 엿보인다. 더불어 몸은 가냘픈 것 같으면서도 얼굴은 통통한 미인형이다. 아마 장경사 벽화처럼 주방의 미인도 역시 당시의 여론이 수렴된 미인도였을 것이다. 주방은 그런 대중적 시각으로 보살을 그렸다. 그는 불화로서의 고매함과 신성함도 추구했겠지만, 더불어 세속적 미감을 반영한 대중성도 함께 고려했던 것이다. 불화의 종교회화로서의 엄격함만을 강조하는 현재에서 당나라 때 이루어진 이런 자유분방한 대중적 취향은 불교회화가 결코 고답적인 그림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돈황 막고굴 199굴에 그려진 보살 벽화는 주방의 미인도 풍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확연히 여성형으로만 표현된 것은 아니다. ‘역대명화기’는 그의 보살 그림이 “단정하고 엄중하다”고 했는데, 비록 미인도 유형이지만, 보살의 캐릭터에 맞게 좀 더 무게있게 그렸다는 것이다. 아마 그 잔영이 바로 199굴 벽화 같은 예가 아닐까.

그는 특히 수월관음도의 도상을 창안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그의 그림을 신라 사람이 비싼 가격을 주고 사갔다고 하니, 그의 화풍이 신라에 영향을 주었음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주수완 고려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507호 / 2019년 10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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