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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총림 통도사 주지 현문 스님

‘구법의 길’ 조성해 고결함 더한 성스러운 불보종찰 일굴 터

구하 스님이 건넨
찰떡에 15살 출가 

통도사 강원 졸업 후
선방서 20안거 성만

노인요양원·실버타운
제2 성보박물관 추진

무풍한송·암자길 이어 
고품격 명상 숲길 설계

“침묵 고요 속 숲길은
적정의 세계로 안내”

​​​​​​​“심신 다해 사부대중 외호
내 수행도 소홀치 않을 것”

현문 스님은 “심신을 다해 통도사 사부대중을 외호할 것”이라며 “저 자신의 수행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잘 살필 것”이라고 했다.

‘이 절을 창건하신 남산종의 종주 자장율사께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귀의하며 예를 올립니다(至心歸命禮 此寺創建 南山宗主 慈藏律師­).' (통도사 예불문 중)

643년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중국 유학에서 귀국한 자장 스님은 대국통(大國統, 왕이 임명한 스님의 가장 높은 지위)으로 임명됐다. 전국의 스님들에게 계(戒)를 내리고, 각 지역의 사찰을 순회 감독하도록 했으니 이는 승가의 지계청정을 도모했음이다. 그리고 중국 오대산에서 이운해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황룡사와 통도사에 봉안했다. 성스러운 적멸보궁이 이 땅에 처음으로 조성됐음이다. 아쉽게도 경주 황룡사는 사라졌지만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은 지금도 부처님께서 남기신 마지막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통도사 대웅전 4면에는 대웅전(동), 대방광전(서), 금강계단(남), 적멸보궁(북) 등 각각 다른 현판이 걸려 있다. ‘적멸보궁’ 현판 아래 기둥의 주련에 통도사의 신성함이 깃들어 있다. 

‘만대의 전륜왕이요 삼계의 주인(萬代輪王三界主)/ 쌍림에서 열반하신지 몇 년이던가(雙林示寂幾千秋)/ 진신사리 지금도 남아있으니(眞身舍利今猶在)/ 중생으로 하여금 예불을 쉬지 않게 하라(普使群生禮佛休).’

2019년 5월 통도사에 새 주지가 임명됐다. 현문 스님이다. 진산식에 필요한 일체 비용은 저소득계층을 위한 자비나눔 활동에 기부했다. “화려하고 권위적인 취임식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한 사회환원이 의미가 더 크다”는 게 이유였다. 주지 취임 일성으로 “복지에 전념하는 통도사”를 천명했다. 석남사가 운영을 맡은 울산시립노인요양원과 10년이 넘은 자비원을 축으로 요양원, 실버타운, 납골당 등을 점진적으로 설립하겠다는 구체적인 청사진까지 제시했다. 또한 제2의 통도사성보박물관 건립도 추진할 계획이다. 그리고 한국불교 최고의 총림을 지향하겠다는 원력을 피력했다.

“총림은 전통적인 수행가풍 위에서 서로를 탁마하는 종합수행도량입니다. 앞으로 우리 영축총림은 불교정신을 선도하는 계율근본도량으로서 한국불교의 종가집이자 대한민국 최고의 총림을 지향해 가는 수행공동체로서 거듭날 것입니다.”

천장, 벽 등에 흙이나 회(灰)를 바르는 미장일 하시던 부친은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 스님(鏡峰, 1892∼1982)과 가까웠다. 어느 날, 아버지가 물었다.

“너, 절에 가 살래?”
“예!”

아버지 손을 잡고 산문에 들어선 소년은 극락암에 닿았다. 경봉 스님이 부친에게 일렀다. 

“시봉은 나보다 사형이신 구하 스님에게 필요합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금강계단.

일제강점기에도 불교중흥을 위해 헌신했던 구하 스님(九河, 1872~1965)은 임시정부와 지사들에게 독립자금을 전하며 해방의 꿈을 키워냈던 선지식으로, 통도사의 사격을 일신함은 물론 학교를 설립해 인재양성에도 매진했다. 큰 절의 최고 어른스님을 시봉할 만한 그릇은 충분하다고 본 것이다.

경봉 스님이 써 준 추천서 한 장 들고 아버지와 함께 월하 스님에게 갔고, 월하 스님은 소년을 구하 스님에게 데려갔다. 현 주지실 옆 당우에서 처음으로 구하 스님을 친견했다. 소년의 눈에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로 비춰졌을 구하 스님이 찰떡 하나 조청에 찍어 소년에게 건넸다.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맛이었다.

‘와, 맛있다! 절에 살면 이 떡 실컷 먹겠구나.’ 

손을 놓고 떠나는 아버지를 향해 “안녕히 가세요”하고는 곧바로 뒤돌아섰다. 아버지는 절을 떠나며 한없이 울었고, 아들은 절 안에 들며 해맑게 웃었더랬다.

주지실(보광전)에서 만난 현문 스님은 용상치 않아 보였다. 불보종찰 총림주지로서의 자긍감과 고매한 여유로움이 빚어 낸 풍모일 터다. 현문 스님에게 통도사는 어떤 절?인지 여쭈니 창밖의 감나무로 시선을 돌렸다.

“15살 때 절에 들어선 이후 60년 동안 떠난 적이 없습니다. 통도사는 제 삶의 전부입니다.” 

국보 290호로 지정된 적멸보궁과 금강계단, 다보탑벽화(보물 1711호)가 그려져 있는 영산전(靈山殿), 석조봉발(보물 471호), 3층 석탑(보물 1471호) 등 현문 스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성보가 없을 터다. 

“저 감나무도 저와 함께 자랐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붉게 물들어 가는 감들 위로 시월의 달빛이 내려앉는 풍광은 참 보기 좋습니다. 무풍한송도 제 도반입니다.”

산문에서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1㎞을 숲길을 ‘무풍한송(舞風寒松)길’이라 한다. ‘춤추는 바람에 따라 차가운 기운의 노송이 물결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 ‘2018 아름다운 숲’에서 대상인 ‘생명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 숲길에는 100년에서 200년에 이르는 소나무가 즐비하다. 늘 걸었던 길이니 60년 지기의 도반인 셈이다.

“그 길을 산내의 모든 암자로 이으려 합니다.”

보광전 앞마당의 감나무는 현문 스님의 도반이다.

영축산에는 경봉 스님이 주석했던 극락암을 비롯해 사명대사가 금강계단을 수호하기 위해 모옥(茅屋)을 짓고 수도했다는 사명암, 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의 주석처이자 16만 도자기 대장경과 1만여 평의 들꽃 길이 조성돼 있는 서운암, 염불수행 처인 백련암 등 17개의 암자를 품고 있다.

“옛 선지식이 걸었던 숲길입니다. 산중에서 정진하고 계시는 대중스님들과 함께 낫 하나 들고 가지치기 하며 그 길들을 이어보려 합니다. ‘화엄경’ 속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 길을 떠났듯이, 우리도 옛 선지식이 남긴 법향(法香)을 따라 걷고자 합니다. ‘구법의 길’이요 ‘명상의 길’입니다.” 

길과 함께하는 다양한 명상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템플스테이 프로그램과도 연관시킬 것이라고 한다. 현문 스님의 계획대로라면 통도사만의 고품격 ‘걷기명상 숲길’이 조성될 듯하다.

“숲은 침묵과 고요를 선사합니다. 숲 속의 길은 우리를 적정(寂靜)의 세계로 안내 합니다. 평온과 평정을 이룰 수 있는 최적의 공간입니다.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내면으로 걸어들어 가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움튼 욕망들을 덜어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숲이 주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평생을 숲에서 살았다고 해서 꺼낼 수 있는 일성이 아니다. 혹, 선원에서의 정진을 통해 체득한 것일까! 통도사 강원을 졸업한 현문 스님은 영축총림 선원, 덕숭총림 선원, 조계총림 선원, 정혜사 능인선원  등에서 정진하며 20안거를 성만했다.

“‘대자유를 찾는 공부’라고 들었습니다. ‘올곧게 잘 사는 스님들이 모여 정진하는 곳’이라 들었습니다. 그 좋은 공부 ‘나도 해 보자’며 걸망을 맸습니다.”

큰스님들이 정진했던 선방을 가능한 많이 돌아보고 싶었기에 한 선원에서 한 철씩만 보냈다. 개인 처소에서 선방이나 큰 방을 오갈 때면 제일 먼저 당도하고, 제일 늦게 나왔다. 가행정진하려는 보리심의 발로일 터다. 그리고 섬돌에 놓인 신발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일을 빼놓지 않고 실천했다. 

오대산 문수선원에서의 감흥은 지금도 푸릇하다고 한다.

“벽 하나를 두고도 한겨울 산사에 내리는 눈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소리만으로도 이미지를 형상화할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문경 봉암사에서 본 소나기 한 줄기도 청량하게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선방 문을 열면 산 아래 저 먼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소나기가 보입니다. ‘온다, 온다!’ 하다보면 앞마당에 한 아름의 비를 쏟아붓고는 산등성이를 넘어갑니다. 정말, 시원합니다. 여러 생에 걸쳐 쌓인 업장마저 단숨에 쓸어버리는 듯합니다!”

봉암사에서 정진할 때는 현문 스님의 상좌 스님들도 와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상좌 두 명이 현문 스님 처소에 왔다.

“웬일이냐?”
“방 청소 하고자 들렀습니다.”
“이 도량에서 은사, 상좌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도반일 뿐이다. 청소는 내가 한다. 가거라!”

양말 하나도 스스로 빨았던 스승 월하 스님(月下, 조계종 9대 종정, 1915∼2003)으로부터 몸소 배운 생활지침일 터다. 은사스님 곁에서 새긴 가르침 하나를 여쭈니 ‘겸손’이라 했다.

“큰스님께서는 불자님들의 청에 종종 붓을 드셨습니다. 제가 ‘은사스님, 글을 아무에게나 써주지 마세요!’ 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월하가 뭔데? 내가 좀 피곤하면 될 일이다.’ 평생 동안 불자님들에게도 말을 놓지 않으셨던 은사스님이십니다.”

영축산에는 극락·서운·사명·백련·자장암 등 17개의 암자를 품고 있다.

태산에 거목이 있음을 새삼 알겠다. 10년 간의 선방정진 속에서 갈무리한 건 무엇일까?

“고금에 전하는 깨달음을 이 자리에서 논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수행이란 자신의 인품을 좀 더 고양시키려는 의지적 실천행이라 봅니다. 불자로서의 인격적 형성을 가능한 최고조에 올려놓는 겁니다. 선방 정진을 통해 새롭게 인식한 건 나눔과 균형입니다. 그 누구든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홀로는 설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서로 의지하고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무엇이든 가득 차면 덜고, 부족하면 채워가는 삶을 살아보려 합니다. 주지로서의 균형, 스님으로서의 균형, 한 인간으로서의 균형을 잡아보려 합니다. 그러다 보면 편견, 욕심, 집착도 조금씩 줄어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존의 고답적 인식을 깨고 새로운 삶의 이정표를 세웠음이다. 수행의 힘이다. 나눔, 복지, 정진, 구법의 길 모두 선방 정진에서 길어 올린 것이다. 주지 취임 직후 통도사 사부대중에게 전한 약속이 새롭게 들려온다. 

“저는 심신을 다해 영축총림의 정신적 사표이신 방장 성파 큰스님을 중심으로 통도사의 사부대중을 외호할 것입니다. 또한 저 자신의 수행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잘 살피려 합니다.”

통도사 무풍한송길.

구법의 길이 완성되는 그날, 영축산은 더욱 더 깊고도 숭고한 신성함으로 장엄될 것이다. 

이 우주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깨지지 않을 계단(戒壇)이 설치돼 있는 불보종찰에 현문 스님은 거룩함과 고결함을 더해보고자 한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현문 스님은
월하 스님을 은사로 1966년 사미계를 수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과 흥천사 주지를 역임했다. 통도사 강원을 졸업한 후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선원을 비롯해 문경 봉암사, 오대산 상원사, 정혜사 능인선원 등에서 정진했다.

 

[1509호 / 2019년 10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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