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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구방, 수월관음도의 표준이 되다

기자명 주수완

우아한 관음보살모습은 당·신라 교류로 탄생

고려 때 대표 수월관음도 남긴 서구방
직책 높지 않음에도 예술성 높이 평가
궁정미인도 풍모 엿보이는 작품에서
당나라 화가 주방의 의도 잘 드러나

서구방이 그린 수월관음도, 일본 센오쿠하쿠코간, 1323년.  

지난 글에서 끝에 언급한 바와 같이 ‘당조명화록’이란 책에 의하면 당나라의 화가 주방은 신라에서도 인기가 높았던지 신라 사람이 그의 그림 수십 점을 비싼 가격을 주고 사갔다고 한다. 곧 주방 스타일의 그림이 신라에서도 유행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왜 하필 신라 사람이 사갔다는 것을 특별히 기록했을까? 일단 이 기록을 통해 당나라 사람들의 신라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당의 문물이라면 누구나 좋아해서 어느 나라 사람이든 사고 싶어하고 배우고 싶어했을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주방의 그림을 사간 그 신라인도 그런 많은 다른 나라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더 나아가 신라인이 주방의 그림을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통해 은근히 주방의 그림이 그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즉, 신라의 문화적 안목이 그만큼 높았기 때문에 그 안목에 들었다는 것 자체가 주방의 예술성이 높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로 언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신라 사람들의 까다롭고 높은 평가 기준에 합격했다는 의미 정도라고나 할까.

여하간 수십 점이나 되는 주방의 그림이 신라에 유입되었으니, 지금 혹시 우리나라 사찰 구석 어디선가 주방의 진작이 숨어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꼭 그의 진작이 아니더라도, 그의 영향으로 생각될만한 그림들이 있으니, 바로 수월관음도이다. 특히 수월관음도의 기본 도상을 주방이 만든 것이라고 하니 일종의 주방의 대표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신라인이 사왔다는 수십 점 그림 중에 수월관음도도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아마도 우리나라 고려불화 중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일련의 수월관음도가 바로 그 영향으로 그려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비록 몇몇 연구자들은 ‘당조명화록’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실제 수월관음도 도상의 창안자는 주방이 아닐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중국에서 수월관음도가 유행한 것은 주방이 활동했던 연대보다 훨씬 내려오는 후대의 일이고, 또한 그 모습도 제각각이어서 주방이 창안했다는 수월관음도를 따라 그렸다고 보기에는 설득력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현존하는 중국의 수월관음도 불화들은 대부분 빨라야 당나라 말기의 작품들이고, 대부분 오대시기 정도로 올려볼 수 있는 정도이다. 또한 그 수준에 있어서도 고려시대에 유행한 수월관음도의 원형으로 보기에 부족함이 많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주방이 수월관음도 자체를 창안한 것이 아니라, 제각각이던 수월관음의 표현을 정리해서 대표적인 하나의 유형을 확립한 것이 아닐까 한다. 따라서 주방이 수월관음도를 창안했다는 기록을 현존하는 중국의 수월관음도만으로 판단해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흔적은 중국이 아니라 우리나라 고려 불화에 남아있는 것 같다.

중국과 달리 고려불화에 등장하는 수월관음도는 언뜻 같은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서로 닮았다. 가끔 관음보살이 앉아있는 방향이 반대이거나, 혹은 주변에 등장하는 선재동자나 용왕의 표현이 다른 경우는 있지만, 대체로 도상적으로 하나의 원형에서 출발한 것이 분명하다고 느껴질만큼 닮았다. 그 하나의 원형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바로 ‘당조명화록’이 이야기한 신라 사람이 사간 주방의 작품 중 하나였을 수월관음도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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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감숙성 돈황 출토의 오대시기 수월관음도.

그런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고려 수월관음도에 등장하는 관음보살의 모습이 주방의 미인도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는 것이다. 이런 우아한 관음보살의 모습은 결국 당과 신라의 국제적 교류 관계의 결과로 탄생한 셈이다. 특히 고려의 수많은 걸작 수월관음도 중에서도 대표적인 작품이 서구방이란 화가가 그린 작품이다. 그가 그린 수월관음도는 현재 일본 교토의 센오쿠하쿠코간(泉屋博古館)이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에는 화기가 남아있는데, “至治三年癸亥六月日內班從事徐九方畫棟梁道人六靜(지치3년계해6월내반종사서구방화동량도인육정)”이라고 되어 있어 내반종사라는 관직의 서구방이 지치3년, 즉 1323년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내반종사라는 직책은 또다른 고려 수월관음도를 그린 김우문이란 화가와 같은 직책인데, 결국 서구방이나 김우문은 그리 높지 않은 직책의 궁정화가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낮은 직책의 관리의 이름 석 자를 그림에 기록하게 한 것을 보면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고려는 예술가의 저작권을 무척 높게 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미술의 위대함은 바로 이런 예술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비롯되었음이 틀림없다.

서구방의 수월관음도와 중국 오대 시기에 그려진 수월관음도를 비교해 보면, 같은 수월관음도이지만, 일단 중국 수월관음도의 관음보살에서는 주방이 그렸음직한 궁중미인도 풍모는 엿볼 수 없다. 반면에 서구방의 그림 속 수월관음은 풍만하면서도 날씬한 오묘한 인체의 모습과 더불어 마치 푹신한 소파에 다소 요염하게 걸터앉은 듯한 자세 등에서 분명 궁정미인도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서구방은 아마도 그런 주방의 원래의 의도를 특히나 잘 살린 화가로 볼 수 있다.

과연 중국에서는 이런 주방 스타일의 수월관음도가 유행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마 일정 부분 유행했을 것이다. 신라인이 사간 주방의 그림도 지금은 전하고 있지 않으니, 당나라건 통일신라건 실제 그 당시의 모습을 엿보기가 어려울 뿐, 주방의 영향은 컸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려시대는 유독 오래전 주방 스타일의 수월관음도를 계속 그려내고 있었던 반면 중국은 새로운 유행으로 대체되어 더 이상 수월관음도가 인기있는 아이템이 아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번 전통으로 확립되면 잘 변하지 않고 그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나라 미술의 특징이라고 본 학자도 있다. 아마도 그런 영향이 아닐까? 마치 삼국시대 우리 미술의 흔적을 일본 아스카에서 찾아야하는 것처럼, 잃어버린 당 제국 장안의 화려함은 그 흔적을 담고 있는 고려불화 속에서 찾아야할지도 모르겠다.

주수완 고려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509호 / 2019년 10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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