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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민 경상대 교수 기고-어느 불교도의 ‘일체지’에 대한 이해를 보며

기자명 법보
  • 기고
  • 입력 2019.10.26 23:01
  • 수정 2019.10.29 18:46
  • 호수 1511
  • 댓글 20

붓다를 일체지자로 보면 안 된다지만
세계 유수 사전에도 ‘일체지자’ 표현
붓다의 무량한 지혜·복덕 찬탄한 것
전지자성의 유일신교적 이해는 오류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법보신문에 연재 중인 마성 스님의 법담법화10 ‘붓다는 전지자인가’를 읽고 이를 비판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전문 게재한다. 권오민 교수는 불타의 전지자성을 유일신교적으로 이해하여 그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 또한 불타를 욕보이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편집자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개인의 개성이 강조되는 시절이라지만, 자기 생각대로 마구 이야기할 수 없는 분야가 있다. 학계가 그러하고 종교계가 특히 그러하다. 학계에서의 담론은 반드시 자타가 인정할만한 논거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며, 종교계의 경우 수백 수천 년 이어 내려온 신조(즉 교리)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 무시할 수도 있다. 예수가 그러하였고 불타가 그러하였다. 불타는 당시 바라문과 사문들의 사상적 신조를 파기하고 새로운 종교를 탄생시켰지만, 불교 역시 2500에 걸쳐 또 다른 종교적 전통을 구축하였다.

우연찮게 법보신문 제1508호(2019년 10월16일 발행)에 실린 마성 스님의 ‘법담법화 10. 붓다는 전지자인가’를 읽었다. 불교학자, 아니 한 불교신자로서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이렇게 시작한다. “많은 불교도들은 붓다를 일체지자(一切知者) 혹은 전지자(全知者)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일체지자 혹은 전지자란 ‘모든 것을 다 아는 자’라는 뜻이다. 만일 붓다를 전지자로 이해하게 되면 신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붓다는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마성 스님은 ‘일체지자=전지자=신’이라는 전제하에 이 글을 썼다. 불타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일체지자’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성 스님 글에서 맞는 말은 ‘불타는 신이 아니다’는 사실뿐이다. 아니 그것마저도 틀렸다. 불타 스스로 신(deva, 대개 ‘天’으로 한역)이라 칭하지 않았을지라도 그의 제자들은 그를 ‘신 중의 신’으로 찬탄하였다. 대장경 검색 프로그램에 ‘천중천(天中天)’을 쳐보시라. 장아함을 비롯한 대소승 삼장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등장한다. 초기불전부터 불타를 신 중의 신으로 이해하였다니, 마성 스님 말대로라면 불교는 처음부터 심각한 문제를 잉태하고 있었던 셈이다.

어떠한 불교사전에서도 “일체지(sk. sarvajña, p. sabbaññu), 모든 것을 다 아는 자, 불타를 말함. 완전한 지혜를 지닌 전지자”, 이렇게 설명한다. 마성 스님 말대로라면 세계 유수의 불교사전도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고 해야 하겠다.

마성 스님 법담(?)에 필자가 경악한 까닭은, ‘일체지(一切智)’가 바로 불타의 가장 직접적이고도 성스러운 호칭(名號)이기 때문이다. 여래·응공·정변지 등으로 나열되는 불타의 호칭은 누가 정한 것인가? 불타 자신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일체지’는 성스러운 말이기 때문에, 마치 지혜를 ‘반야’라는 음역어로 호칭하듯이 원어 그대로 살바야(薩婆若, sarvajña)로 호칭한다. 이 말 또한 불교사전이라도 한번 찾아보시라. 나아가 ‘화엄경’에서는, 불타를 대도사(大導師)라고 한 것은 일체중생을 이끌고 살바야(薩婆若)의 도(道)로 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도사 역시 불타의 호칭이다.

스님은 혹 ‘화엄경’ 같은 이른바 대승경전은 수지하지 않는다는, ‘불타 직설(直說)’, ‘불교 원음(原音)’만을 추구하는 신념을 지녔을지도 모르겠다. 초기불교시대 이래 불교도들이 불타를 ‘일체지’ 혹은 ‘일체지자’로 찬탄한 것은 누구도 비할 수 없는 그가 쌓은 복덕과 지혜의 공덕 때문이다. 그러한 공덕 중 불타만이 갖는 공덕이 이른바 불공법(不共法)이다. (6신통 중 앞의 5신통은 범부도 가질 수 있는 공덕이다.) 주지하듯이 불공법에 18가지가 있지만 그 상수(上首)는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 등의 10력(力)이다. 여기서 10력에 대해 논할 여유가 없지만, 이는 일체지를 본질로 하는 것이다.

스님은 “붓다가 말한 일체(sabbaṃ)는 안·이·비·설·신·의를 통해 색·성·향·미·촉·법을 인식하는 것으로, 이때의 일체란 우리 인간은 육근을 통해 육식을 인식하는 것이 앎의 전부라는 뜻”이라고 하였지만(말이 이상한 非文이다), 아마도 스님은 이러한 12처(處)의 법문과 10력에서 말한 그야말로 우리 인간 삶에서 드러나는 광대무변의 종종(種種)의 양태에 관한 지력(智力)을 결부시켜 설명해 낼 수 없을 것이다. (12처를 일체라고 한 이상 일체지의 ‘일체’와 관련시켜 말로라도 설명해야 한다.) 그러하기에 남방 상좌부를 대표하는 핵심적 교리서인 ‘청정도론(비숫디막가)’에서도 연기법은 일체지지(一切智智, sabbaññuta-ñāṇa) 즉 일체지자이신 불타의 지혜로만 알 수 있고 성문 등의 다른 지혜로는 알 수 없다 하였고, 그들이 제3결집이라 한 (북전/티베트 불교에서 제3결집은 카니시카 왕 시대의 카슈미르 결집임) ‘논사(카타밧투)’에서도 ‘일체지’를 주요한 이슈 중의 하나로 삼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는 말한다. “성문은 일체지가 아니다.” (제10장 果智論, Phalañāṇakathā)

대소승의 불교에서 ‘일체지’를 절대 부정할 수도, 부정해서도 안 되는 것은 이로 인해 대비(大悲)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비 또한 18불공덕 중의 하나이다. 성문성자들의 비(悲)는 무진(無瞋)을 본질로 하지만, 불타의 비는 무치(無癡)를 본질로 한다. 그래서 ‘대비’이다. 다르마키르티(法稱) 이래 불교논리학파에서조차 불타의 일체지자(즉 전지자)성의 논증은 찰나멸 논증, 유신론 비판 등과 함께 주요 응용문제 중의 하나였다. 불타가 일체지자가 아니라면 그의 말의 권위를 어디서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의 단초였다. 불교는 기적을 통해 교조의 권위를 강조하는 종교가 아니다.

마성 스님이 불교에서 ‘일체지자’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로 제시한 주요논거는 맛지마 니카야의 ‘삼명경(三明經)’(MN.71)이었다. 거기서 불타는 “[자이나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붓다도 일체를 아는 자, 일체를 보는 자’라고 말한다고 전한 유행승인 왓차곳따에게 “그들은 내가 말한 대로 말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거짓으로 나를 헐뜯는 자이다”고 하여 자신을 ‘삽반뉴(一切知者)’라고 호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는 것이다. 나아가 스님은 위빠사나 수행을 5분만 해보아도 ‘일체를 아는 자’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하! 불타는 그 같은 호칭을 얻는데 5천년, 5만년도 아니고 3아승지겁에 다시 백겁이 걸렸다는데….

스님은 ‘삼명경’ 후반부는 읽지도 않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하면 불타가 말한 대로 제대로 말한 것인가?” 불타는 말한다. “사문 고타마는 삼명(三明)을 가진 자라 말하면 불타를 헐뜯는 것이 아니다.” 삼명이 무엇이든가? 전생을 아는 숙명지증명(宿命智證明), 일체 번뇌를 끊었음을 아는, 그리하여 더 이상 태어나는 일이 없음을 아는 누진지증명(漏盡智證明), 미래의 생사를 아는 천안지증명(天眼智證明)이 삼명이다.

자이나교와 불교는 일체를 설명하는 방식이 다르다. 기독교에서 일체[만유의 토대]는 두말할 것 없이 여호와이며, 그것이 바로 진리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의 일체[만유의 토대]는 무엇인가? 초기불전에서는 12처(處)나 18계(界), 5온과 같은 다수의 법(諸法 또는 一切法)으로 해설한다. (후대 ‘기신론’ 등에서는 이를 중생심 내부의 사태로 환원시켰고, 따라서 마음만이 진리였다.) 삼세에 걸친 제법의 생성과 소멸, 혹은 생사의 유전(유루)과 환멸(무루), 그것이 일체였고, 불타는 이를 통찰하였고 알았다. 그러므로 자이나교나 기독교에서 그들이 이해한 방식대로 불타를 일체지자라고 하였다면 그것은 불타를 헐뜯는 일이다. 불타의 전지자성(sarvajñatva)을 유일신교적으로 이해하여 그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 또한 불타를 욕보이는 일이다.

권오민 경상대 교수
권오민 경상대 교수

‘일체지자’는 자이나교에서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에, 전지자인 힌두교의 신을 의미하기 때문에 불타를 그 같은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세존(世尊)’이라는 말 또한 폐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존이 무엇이든가, 바가바드(Bhagavat), 박가범(薄伽梵)의 뜻 번역이 아니던가? 바가바드는 또 누구인가? 힌두교성전 ‘바가바드 기타(존경을 받을 만한 분의 노래)’의 바가바드가 아니든가? 그는 바로 마부 크리슈나로 화현한 비슈누였다. 불타(Buddha)도, 석가모니의 ‘모니(muni)’도, ‘응공(arhat)’도 당시 인도에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말이었다. “[고타마, 그분이] 세존으로 호칭된 까닭은 일체지를 증득하였기 때문이다.”(‘청정도론’ 7: 55)

자신들의 얕은 지식으로 2천년 불교전통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풍토가 곳곳에 벌어지고 있다. 시대가 바뀐 탓이고 기성불교에 대한 반동이겠지만, 참으로 우려스러운 오늘의 불교현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천 5백년 쌓아온 무량의 법장(法藏) 앞에서 우리는 좀 더 겸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1511호 / 2019년 11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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