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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톨스토이의 회심

기자명 김정빈

“나는 알았다 어떤 것을 성취해도 ‘무(無)’라는 것을”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소설가’
그 시대 러시아 귀족들과 같이
방탕삼매 취하고 살인도 저질러
결국 정신적 위기 다다르게 돼
고민에 고민 거듭하며 위기극복
세속적인 가치벗고 ‘무’ 깨달아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톨스토이(R. Tolstoy, 1828~1910)는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큰 영지를 가진 백작 가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들에 의해 교육되었으며, 카잔대학을 중퇴한 다음에 자신의 영지인 야스나야폴랴나로 돌아왔다가 1851년에 군인이던 형을 따라 카프카로 가서 자신 또한 군인이 되었다. 톨스토이는 첫 작품인 ‘유년 시절’로 평단의 큰 찬사를 받았다. 군대에서 퇴역한 후 그는 작가로서 더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중에서도 그가 서른다섯 살에 발표한 ‘전쟁과 평화’가 중요하다. 이 위대한 작품에서 그는 500여명이나 되는 많은 인물들을 동원하여 다양한 삶의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그려냈다. 

역사적인 문학 천재의 한 사람으로 그가 올린 성취는 그를 영광의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런 세속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크나큰 영적 고민을 안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어렸을 적 성적으로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었다. 그런데 그런 생활은 비단 톨스토이만의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거의 모든 러시아 귀족들이 그랬다. 심지어 여인들까지 그것을 부추길 정도였다.

톨스토이에게는 숙모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녀는 조카에게 “네가 유부녀와 관계하는 일 만큼 너를 위해서 믿음직한 일은 없단다. 버젓한 부인과 관계하는 일만큼 너를 교육하는 일은 없다니까”라고 말했다. 이로써 우리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가 요즘과는 아주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훗날 그 시절에 자신이 간음과 폭행을 일삼았으며 심지어는 살인까지 했다고, 자신이 ‘방탕삼매’에 빠져 있었다고 고백했다.

또한 그는 당시의 젊은이들을 휩쓸고 있던 신앙으로부터 이탈 대열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는 신에게 기도하지 않았고, 교회가 요구하는 형식도 따르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명예욕, 권세욕, 사욕, 애욕, 자만심, 분노, 복수심 등으로 버무려진 ‘정열’에 몸을 맡겼다. 젊은 톨스토이는 도박을 좋아했고, 질투심이 많았으며, 남들의 존경 어린 눈길과 세상이 자신에게 찬사를 퍼붓는 것을 즐겼다.

그러던 그에게 갑자기 정신적 위기가 찾아왔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좋다. 나는 6000제샤찌나의 토지와 300마리의 말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냐?’ 또 그는 생각했다. ‘나는 고골리, 푸시킨, 셰익스피어, 몰리에르와 같은 수준의 명성을 얻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어쨌다는 거냐?’

아는 것이 누구보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그 답은 중요했다. 그것을 얻지 못하고서는 그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었다. 당시 그는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한 삶은 그에게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 삶은 무엇인가, 나는 왜 사는 것인가,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 이 근본적인 질문에 맞닥뜨리게 되면 사람은 허무의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그로부터 구원받거나 그 중 하나에 이르게 된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당시에 맞닥뜨렸던 위기 상황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내 생활은 정지되었다. 숨을 쉬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자든지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참다운 의미의 삶은 없었다. 어떤 것을 성취한다고 해도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무(無)라는 것을 나는 알고 말았던 것이다.

‘인생은 무의미하다.’ 이것이 진리였다. 나는 인생의 길을 걸어 심연에 다다랐다. 나는 나에게 멸망 이외에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했다. 더욱이 나는 멈춰 설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나는 내 앞에 사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을 수조차 없었다.”

이 절망적인 상태를 톨스토이는 유명한 불교 설화인 안수등정(岸樹藤井) 이야기를 이끌어 와 다시 묘파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그는 사자에 쫓겨 우물 속으로 도망친 상태에서 등넝쿨을 잡고 벌통에서 떨어지는 꿀을 받아먹어 왔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붙들고 있는 등넝쿨을 쥐들이 갉아먹고 있었으며, 발밑에는 뱀들이 가득했다.

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결국 새사람으로 다시 일어섰다. 그는 전과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 세속적인 가치가 아닌 진정한 가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것을 찾아냈다. 그것은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욕망의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을 위해 사는 것, 즉 사랑의 길이었다. 그 이후 그는 그 길을 걸었다. 소설가가 아닌 구도자로서, 한 인간으로서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톨스토이만이 아니라 깊은 사상을 가진 모든 인간들은 톨스토이가 만난 ‘무’를 만나게 된다. 구약성서 ‘전도서’는 구약 시대의 가장 위대한 현자로 알려진 솔로몬이 지은 것인데, 그 맨 앞에 그는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톨스토이가 만난 삶의 ‘심연’ 그것이다.

그 헛됨을 만나게 되면 삶의 모든 것들이 빛을 잃어버리게 된다. 재산도 명예도 가족도 친구도 의미가 없어진다. 내가 죽은 다음에도 해는 여전히 떠오를 것이고, 내가 죽은 다음에도 사람들은 그게 뭐 대수냐는 듯이 웃고 떠들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나는 없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우리는 숨이 멎어버리는 듯한 허무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2500년 전에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 또한 그 심연 앞에서 고민했었다는 것을. 그리하여 그분은 약속되어 있는 왕관을 버렸다. 재산을 버렸고, 영광을 버렸고, 아내와 자식까지도 버렸다. 그런 다음 ‘무의 심연’과 대적했다. 그런 끝에 마침내 삶을 허무로부터 건져올리는 데 성공하여 부처님이 되셨다.

주위를 둘러보면 불교인들 중에 그 심연에 맞닥뜨려 본 이는 드문 것 같다. 그저 관습적으로 신봉되는 불교, 그것은 톨스토이가 회심하기 전에 그저 관습적으로 신에게 올리던 기도 같은 것이다. 그 관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생에 한 번은 무의 심연에 맞닥뜨려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를 이기고 일어서야 한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참다운 불제자의 길이 열린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510호 / 2019년 10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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