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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 주지 초격 스님

‘평생 수행’ 담보 할 승려복지 토대 탄탄히 다져 놓을 터 

고2 때 무진장 스님 초청 
대전상공회의소 대성황

대의 스님 만나 포교원력
월운 스님 찾아 봉선사 행 

천막법당 8개월 정진하며
광명선원 개원·포교 첫걸음

두문불출 천일 관음기도
“내 안의 관음보살 확인” 

격식 뛰어넘은 대장부 ‘초격’
월운 스님 가르침 평생 간직

​​​​​​​“타인에게는 자비롭게
자신에게는 냉정하게”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라는 게송을 지침으로 삼는 초격 스님은 “평생 동안 미소만은 잃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여기 어디쯤일터인데!’

봉선사 16대 주지 임명장을 받고 운악산을 올랐다. 깊은 산 속의 토끼가 ‘너무 맑아 세수는 못하고 입술만 살풋 대고 갔다’는 그 옹달샘 어제도 찾아 나섰지만 허사였다. 오늘도 벌써 두 시간째 운악산을 헤매고 있지만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옛 기억을 떠올리면 고작해야 큰법당에서 서쪽으로 20여분 거리의 산기슭에 있을 법한데 눈에 띄지 않는다. 하긴 행자 시절 단박에 뛰어 넘은 작은 나무들도 30여년을 더했으니 그 가지들이 오목한 작은 샘 하나 가려 숨기는 건 헐할 것이다. 

물맛이라면 큰법당 옆 샘물이 일품이다. 보기엔 흐릿해도 바가지로 떠보면 아주 맑은 물이다. 지금은 방치돼 있지만 한 때 봉선사 대중스님들의 다관을 채웠던 샘이다. 절에 갓 들어온 행자는 이른 아침이면 주전자 들고 옹달샘으로 달려갔더랬다. 역경보살로 칭송 받는 월운(月雲, 현 봉선사 조실) 스님에게 ‘특별한 찻물’을 드리기 위함이다.

행자의 어머니는 대전 심광사(心侊寺) 신도였다. 매월 초하룻날이 되면 절일 본다고 하루, 이틀 정도는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동네 시장 사람들이 건넨 공양물도 대신 받아 부처님 전에 올렸다고 하니 화주보살이었던 듯싶다. 초등학교 6학년. 엉덩이에 예방주사 한 대 맞았는데 앉거나 걸을 때마다 욱신거렸다. 담임선생님이 진학을 상담해야 하니 어머니를 모시고 오란다. 어머니는 절에 가있고, 전화기도 없었다. 산으로 뛰어 올라갔다. “엄마, 선생님이 내일 학교 오시래요!” 큰 숨을 몰아쉬며 앉으니 엉덩이가 다시 욱신거렸다. “마음을 놓아서 아픈가? 뛰어 올라올 때는 왜 안 아팠지?” 

아들의 혼잣말에서 어머니는 무엇을 직감했던 것일까! 아들을 대의 스님께 데려갔다. 상원사, 마하연, 표훈사, 범어사, 백담사, 망월사, 통도사 백련암, 법주사 복천암, 수덕사 등에서 수십 안거를 성만하며 조계종 정화불사에도 앞장섰던 대의 동원(大義 東元. 1901∼1978) 스님이다. 

처음 본 스님이었지만 그냥 좋았다. 학교 파하면 곧장 절로 가 아궁이에 불도 넣고, 비질도 하며 절 일을 거들었다. 주말이나 방학 때면 아예 절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어머니도 아들을 보려면 절로 와야 했다. “어린이가 미래의 부처님이요 불교의 희망”임을 주창했던 대의 스님이 주석한 심광사는 어린이·청소년 포교의 요람으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또래의 친구들이 유독 많이 찾는 절이라는 점도 소년의 절집 삶을 윤택하게 했다. 

큰법당 옆에 자리한 샘을 복원할 계획이다.

심광사 중등부 불교학생회를 이끈 경험을 살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대전불교학생회장을 맡아 대작불사도 해냈다. ‘무진장 스님 초청 대법회’를 대전 상공회의소(商工會議所)에서 봉행한 것이다. 불우이웃돕기 일일찻집을 열면 대성황을 이뤘다. 초격 스님은 물론 대전지역 불자 학생들의 자긍심은 하늘을 뚫고도 남았을 터다. 

군 복무를 마치고 심광사를 다시 찾았다. 대의 스님이 없는 절은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부전을 보던 스님이 넌지시 묻는다.  

“왜 그리 서성이시오!”
“출가해서 절에서 살고 싶습니다!”
“봉선사에 학덕 높으신 스님이 계십니다. 월운 스님입니다!”

1986년 여름, 월운 스님을 찾아 봉선사로 떠났다. 

은사는 문중에서 정하는 법. 법명은 월운 스님이 지어주었지만 은사는 경암 스님과 맺어졌다. ‘스님답게 살면 격(格)을 뛰어 넘는(超) 대장부가 될 것이고, 스님답지 못하게 살면 격(格)에 어긋나는 졸장부가 될 것’이라는 의미로 ‘초격(超格)’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직계 상좌는 아니었지만 초격 스님에게 쏟는 월운 스님의 정성은 남달랐다. 초격 스님 또한 3년 동안 시봉할 정도로 월운 스님을 존경했다. 스승은 제자를 불교학자로 키워내려 무던히도 애썼으나 제자는 출가 전부터 포교 원력을 굳건히 세워 놓았던 터였다. 자신이 정한 길을 가려 중앙승가대학교(사회복지학과)에 원서를 냈다. 이른 새벽 월운 스님을 찾아뵈었다.

“오늘 일이 있어 세간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라!”

이른 아침 버스를 타고 중앙승가대로 향했다. 면접실에 들어섰다. 

“아니, 초격. 일 있다고 나간다더니….”

월운 스님이 면접관일 줄은 꿈에서라도 예상치 못했다. 옆에 있던 보각 스님이 눈치를 채고는 일렀다. 

“너는 이리 와서 면접 봐라. 거기 있으면 혼만 더 난다.”

저녁에 월운 스님을 찾아뵈었다. 그리고 대의 스님으로부터 들은 일언을 고했다. ‘아무리 훌륭한 법이 있다하나, 믿고 의지하고 닦는 이가 없으면 그 법은 죽은 것이다. 부처님 법을 널리 알리는데 힘써라.’ 심광사에 머물 때 이미 가슴 한 편에 ‘포교’라는 심인이 찍혔던 것이다. 

“네 뜻이 정녕 그러하다면 그리해라. 홍릉에 보살님이 일궈가는 포교당 하나 있다. 학교는 거기서 다니거라.”

통학 편의를 봐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포교에 뜻을 세웠다면 일찌감치 현장에 뛰어들라는 뜻이기도 하다.  

하얀 찻잔에 담긴 연잎 향이 그윽하다. 산속 옹달샘은 찾았을까?

“예. 며칠 전에 찾았습니다. 행자 때 본 옹달샘과는 많이 다르더군요. 거의 막혀 있어 다시 쓰기는 어렵겠습니다. 그러나 대웅전 옆의 샘은 복원하려 합니다.”
유독 샘에 마음을 두는 연유가 궁금했다.
“정신을 맑게 하는 차는 수행인의 도반입니다. 찻잎이 품고 있는 맛과 향을 올곧이 내려면 좋은 물을 만나야 합니다. 옛 선지식들도 인정했던 천혜의 샘물입니다.”

그리 높지 않은 운악산임에도 저 샘물만은 마르지 않는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가평 현등사 3층석탑 사리를 30년만에 제자리로 돌아오게 한 장본인이 초격 스님이다. 현등사 주지 당시 삼성문화재단이 사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현등사 3층석탑 사리구 반환소송’을 제기했다.(2005) 삼성문화재단은 ‘사리는 문화재’로 본 반면, 초격 스님은 ‘사리는 성보’라고 주장했다. 

1년여의 소송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문화재청이 “사리는 문화재와 거리가 멀다”는 의견을 내며 새로운 국면을 맞았고, 협의 끝에 삼성문화재단이 현등사에 사리를 영구 기증하는 형식으로 매듭지어졌다.(2006) 

“사리는 무여열반의 경지를 전하는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입니다. 또한 부처님을 향한 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극히 경배해야 할 성보입니다.”

사리를 향한 신심은 스님이었으니 그 누구보다 충만할 수 있다. 그러나 삼성문화재단을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담대함은 어디서 비롯됐는지 궁금했다. 초격 스님은 방배동 천막법당과 광명선원에서의 일화 한 토막을 전했다.

봉선사에도 가을이 들어찼다.

중앙승가대를 다니면서도 포교당 돌보는 것은 물론 정농도서관 공부방을 위탁 받아 운영할 만큼 남다른 행보를 보인 초격 스님에게 월운 스님의 새로운 명이 떨어졌다.

“방배동에 보살님이 일궈가는 봉선사 포교당이 있다. 가 보거라!”

내키지 않았다. 포교당 운영에 관한한 자신과 보살의 의견이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홍릉에서 경험했기 때문이다.

“보살님이 운영하는 포교당에는 왜 자꾸 가라하십니까?” 
“보살님께 머리 숙이는 게 그리 어려워? 포교한다더니 아직 멀었구나!”

방배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포교당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포교를 사업처럼 여기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기에 ‘봉선사 포교당’ 현판을 떼어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신도 소유의 4층 건물 옥상에 천막을 치고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목탁 소리가 크게 들리면 주민들이 불편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천막 문을 닫은 채 예불을 모셨다. 절을 하며 거친 숨 한 번 내쉬면 먼지가 한 움큼씩 솟아올랐다. 한 여름의 폭염에도 천막 속 기도는 끊이지 않았다. 신도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공양은 제때 하는지, 더위에 쓰러지지는 않았는지. 그렇게 8개월이 흐르는 동안 신도들의 정성이 모아져 광명선원이 개원됐다.(1993) 개원 직후 청년회부터 창립했고, 불교교양대학도 열었다. ‘초격만의 포교’ 첫 걸음을 뗀 셈이다. 

그리고 1995년 천일 관음기도에 들어갔다. ‘기도하다 죽어도 좋다. 이 한 몸 바쳐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겠다’는 원력으로 입재한 천일기도였다. 두문불출 한 채 하루 8시간 사분정근에 임했고, 오후 2시면 어김없이 1천배를 올렸다. 회향을 앞둔 어느 날,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이 밀려들어오더니 이내 어떤 형체가 자신에게로 다가왔다. 그 형체가 무엇인지를 확인한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초격 자신이었다. 놀라움은 이내 환희로 승화됐고, 그 자리서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이 땅에 실현시키자는 원력을 세웠다. 

“‘도로 아미타불’을 흔히 ‘물거품’ 정도의 헛된 노력으로 해석하는 데 아닙니다. ‘도로’는 ‘원래의 상태’, ‘이전과 다름없이’라는 말이니 ‘원래의 아미타불’을 뜻합니다. ‘10년 공부 도로 아미타불’이란 10년 동안 수행을 해서 자신이 ‘본래 아미타불’임을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또한 자신 안에 존재합니다. 내 안의 관세음보살을 찾아 확인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봅니다. 타인의 얘기를 많이 들어 주고 살펴 주세요. 그 또한 관세음보살의 마음입니다. 이것만 되어도 나와 상대방 모두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남을 위하는 마음에서 오고, 모든 불행은 이기심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초격 스님은 주지 부임 직후 복지국장을 임명해 봉선사만의 승려복지 청사진을 그려가고 있다.

“봉선사 본말사 재적승의 인원과 현 상황을 상세히 살피고 있습니다. 국가와 종단으로부터 받는 복지 혜택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그에 따른 대책을 세우려 합니다. 승가 특유의 전통적 시봉체계를 최대한 되살리겠지만 수행과 전법에 매진할 수 있는 기본 토대를 다지려 합니다. 나이가 좀 드신 스님이라고 해서 정진 의지가 약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실이신 월운 큰스님은 지금도 틈만 나면 경전을 펼치십니다. 현 시대에서 승려복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이전 주지스님들의 노력으로 도량 정비는 거의 마친 듯싶습니다. 다만 선원 하나는 새로 지으려 합니다. 얼마 전에 신숙주(申叔舟)가 머물렀다는 암자터를 매입했습니다. 봉선사 곁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중스님들이 동의해 주시면 그 자리에 선원을 건립해 보고자 합니다.”

평소 지침으로 삼는 경구를 부탁드렸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라 했습니다. 평생 동안 미소만은 잃지 않으려 합니다.”  

상좌들에게 틈만 나면 당부하는 말이 있다고 했다. ‘타인은 자비롭게 대하고, 자신은 냉정하게 대하라.’ 율장의 한 구절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초격 스님은 월운 스님에게 건당했다. 그때, ‘포부를 실현했으니 한 곳에서 성을 쌓고 살라’는 의미로 ‘서성(逝城)’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월운 스님이 내린 법명·법호를 따라 납자의 길을 걸어 온 초격 스님이다. 청량한 가을바람이 봉선사 연지를 스쳐간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초격 스님은
1986년 봉선사로 출가. 1987년 사미계 수계. 중앙승가대 사회복지학과 졸업. 중앙종회의원 5선(13∼17대). 중앙종회 수석부의장, 총무원장 특보단장, 현등사 주지·보광사 주지·한국문화연수원장·불교신문사 사장 역임.

 

[1511호 / 2019년 11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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