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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급조된 법좌

기자명 이제열

“나는 경전 설하러 온 법사입니다”

선원에서 ‘화엄경’ 해설 요청
가보니 법좌 급조해 따로 마련
승속 차별의식에서 벌어진 일
“화엄 가르침에 어긋나” 지적

한 선원에서 경전강의 부탁을 받고 법회에 갔을 때 일이다. 그곳은 교계에서 제법 여법한 단체로 알려졌고 선원장 스님도 남다른 원력과 수행력으로 모범이 될 만한 분이었다. 그 선원에서는 내게 1년간 매주 한차례 ‘화엄경’ 해설을 요청했다. 경전 분량이 방대하고 의미도 깊은 ‘화엄경’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소신껏 풀이해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던 차였다.

나는 시간에 맞춰 선원에 도착해 공부하는 불자들 안내를 받아 법당에 들어섰다. 그런데 법당에 들어서는 순간 경전을 강의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경전 강의를 위해 급조된 법좌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불단 앞에 엄연히 기존의 법좌가 자리하고 있었음에도 보잘 것 없는 법좌를 따로 만들어 놓고 나를 앉도록 했던 것이다.

이래저래 씁쓸함에도 나는 일단 다시 마련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경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법당 한편에서 법문을 듣기 위해 앉아있는 신도회장에게 물었다. “나를 이 법좌에서 설법하라고 한 것이 회장님입니까? 아니면 선원장 스님입니까?” 내 질문에 법당은 술렁였고 신도들은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신도회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제가 그렇게 준비했습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신도회장에게 다시 물었다. “내가 알기로 이 도량의 법주이신 스님은 평소 ‘법에는 고하가 없고, 승속이 없으며, 차별이 없다고 늘 법문을 하시는 줄로 알고 있는데 이런 자리를 따로 만들어 놓은 이유가 무엇인지요?”하고 물었다. 신도회장은 한동안 말을 못하다가 “그 자리는 스님만 앉으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하고 말했다.

나는 신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도량에 온 것은 속인으로 온 것이 아니라 경전의 말씀을 설하는 법사로 온 것입니다. 내가 속인 법사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법문을 청하고 법문을 듣는데 승과 속을 나누고,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을 나눈다면 이는 세간법이지 불법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공부하실 ‘화엄경’은 중생과 부처가 동체이며, 번뇌가 곧 보리이고, 아비지옥 그대로가 청정한 비로자나 법신의 몸임을 깨닫게 하는 경전입니다. 그래서 ‘화엄경’ 법회를 일명 평등법회라고 합니다. ‘화엄경’에서는 일체 중생이 이미 일체여래의 법좌에 올라 성불했다고 가르치며, 여래의 삼보가 중생의 마음 가운데에 골고루 갖추어져 있다고 설합니다. 이런 최상의 법문을 듣는 도량에서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자 모든 신도들이 박수를 쳤고 기존의 법좌에 올라 설법해달라고 청했다. 옆구리 찔러 절 받는 꼴이 됐지만 나는 기존의 법좌에서 경을 강의했다. 그 일로 인해 법회 분위기는 좋아졌고, 그 뒤 1년 동안 경 강의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한국불교는 대승의 가르침을 믿고 받든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불교는 말로만 대승이지 소승만도 못한 모습들이 적지 않다. 말로만 중생을 부처님처럼 받들라고 할 뿐 실제로는 승과 속의 구별이 너무 심한 것이다. 과거 종단에서 중앙포교사 직분을 지니고 활동했던 선진규 법사님이 털어놨던 얘기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하루는 종단 포교원에 출근했는데 내 책상이 없어진 거야. 머리 기른 속인이 법문하고 다니는 것이 못마땅하다고 어떤 스님이 들어와 책상을 치워버렸다고 했어. 기가 막힌 일이지. 그러니 불교가 어떻게 발전하겠나?”

‘화엄경’을 해설하러 갔던 수행단체에서 일어난 일도 결국은 승과 속의 지나친 차별의식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재가불자가 스님을 보든, 스님이 재가불자를 보든 법으로 서로 평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과 멀어지는 것이며, 불교의 앞날도 밝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이제열 법림선원 지도법사 yoomalee@hanmail.net
 

[1511호 / 2019년 11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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