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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례와 법고창신

  • 법보시론
  • 입력 2019.11.18 13:27
  • 수정 2019.11.19 11:28
  • 호수 1513
  • 댓글 0

며칠 전 어느 문중의 시제에서 참석자들에게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사상자를 낸 사건이 있었다. 문중 재산에 대한 갈등이 원인이었다. 이는 극단의 문제이지만, 시제 철을 지내면서 어떻게 시제의 전통을 유지해 가야 할지 고민한 문중이 많을 것이다. 선대부터 대대로 이어오던 풍속을 잘 이어가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현실적 여건은 간단치 않다.

그간 문중의 전통을 이어온 것은 시제와 족보 편찬이었다. 상강이 지나 입동이 가까워 오면 웬만한 집안에서는 정해진 날에 시제를 모신다. 4대조까지는 집안에서 기제사를 모시고 5대조부터는 묘소에서 시제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제를 지내는 가장 큰 목적은 조상의 덕을 잊지 않고 문중 구성원의 결속을 다지는 데 있다. 제례를 모신 후에는 음식을 나누며 위대한 조상의 이야기를 나눈다. 몇 대조는 어떤 벼슬을 지낸 어른이고 어떤 덕행을 베풀었는지, 조상에 대한 문중 어른의 현장교육이 이어진다. 훈시와 교육이 끝나면 항렬을 따져 서로의 동질감을 확인한다. 이런 가운데 가문에 대한 긍지는 공고해지고 자신의 내력도 분명해진다. 이 모든 과정은 문중의 일원으로서 자존감 향상을 위한 집안 교육이었다. 

시제에 참석하는 사람의 집안에는 족보 한 권쯤은 갖추고 있다. 손이 잘 닿는 곳에 두고 수시로 들추어보는 그런 책은 아니지만 소중하게 간직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사 다니면서 다른 책은 버려도 족보를 버리고 가는 집안은 없을 것이다. 족보에는 시조나 중시조의 내력부터 시작된다. 시조 묘소의 위치를 나타낸 지도가 앞에 배치된다. 시조에서 시작하여 세대 순으로 종계(縱系)를 이루며, 같은 항렬은 횡으로 배열하여 동일 세대임을 표시한다. 

이러한 족보는 보통 30년마다 새롭게 개간하여 후세 사람을 등재하게 된다. 부계 중심의 혈통을 중시하여 편찬된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불합리하다는 지적도 있다. 일찌기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그 시대 족보를 위조하여 판매하는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대의 내력을 이해하고 가문의 종횡 관계를 터득해 간다는 점에서 족보의 가치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시제나 족보가 문중을 기반으로 하고 자신의 내력을 이해하는 가운데 구성원 간의 단합을 꾀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그 이면에는 조상에 대한 경배와 고마움이 보이지 않게 내포되어 있다. 시제나 족보 편찬이 갖는 의의나 작용에 대하여 절대 부정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동족의 화합과 결속, 단결력 함양, 효심의 배양 등에서 나름대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왔기 때문이다. 

시대는 많이 변하고 있다. 가문 의식은 약화되고 생활의 중심은 가족 단위로 이루어지고 있다. 종손의 개념도 희박해지고 4촌이 먼 친척이 되어 가고 있다. 시제를 모시고 족보 편찬에 참여하는 것이 후손의 당연한 도리로 생각해왔지만, 이제는 무거운 짐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시제에 참석하는 사람은 나이든 어른이 대부분이고 해가 갈수록 참여 인원도 줄어들고 있다. 족보 편찬의 필요성은 낮아지고 심지어 새롭게 편찬할 경우, 이전 족보에 등재되어 있는 종친도 찾기 어려운 실정이 되었다. 종이 족보의 한계로 디지털 족보도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사람의 잘못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정성이 부족하다고 탓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법고창신이란 말이 여기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긍정적인 정신은 지켜나가되 형식은 바뀌어야 한다. 핵가족 시대에 문중이 갖는 장점은 크다. 이 장점을 살려 좋은 전통으로 이어 가기 위한 방안을 찾아가는 것이 바른 길이다.

이창경 신구대 미디어콘텐츠과 교수 ck56@shingu.ac.kr

 

[1513호 / 2019년 11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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