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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갑사 주지 만당 스님

오대암자 길 잇고 연실봉에 부처님 모셔 불산(佛山) 조성할 터 

교통사고·부친 별세 후
방황하며 ‘생사’ 고뇌 

달마선원서 불교 진수 매료
법전대신 경전 품으며 정진

사법고시 준비 위해 찾은
불갑사서 수산 스님과 인연

‘불갑산고적기’ 탐독 후
“복원불사 해내겠다” 출가

건물 7동 불갑사 현재 32동
법성포 마라난타사도 창건 

“절은 자비·해탈 일깨우는
성스런 신행·수행 공간”

산 정상 부처님 마주할
높이 80m 9층목탑도 계획 

만당 스님은 “불갑사에 이른 그 누구라도 잠시 닫혔던 마음을 열며 자비를 떠올릴 수 있다면 100m 높이의 탑이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간다라 초타 라호르(Chota Lahore. 파키스탄 북서지역)의 ‘길리 마을’ 바라문 집안에 성스러운 아들이 태어났다. 거듭된 유산에도 스님을 간호한 공덕으로 낳은 마라난타(摩羅難陀) 스님이다. ‘분드 마을’의 절에서 수행하던 스님은 368년 고향을 떠나 대장정에 올랐다. 간다라에서 시작된 발길은 스왓트(Swat), 길기트(Gilgit)를 지나 천산산맥(天山山脈)을 넘어 쿠처(Kucha, 현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돈황(敦煌), 동진(東晋)을 거쳐 16년 만인 384년 호남의 한 항구에 닿았다. 백제 땅에 처음으로 법음이 전해졌음이다. 

대성(大聖)이 모악산으로 들어서니 절이 세워졌다. ‘으뜸 절’ 의미의 불갑사(佛甲寺)다. 산 이름도 어느새 절을 따라 모악산(母岳山)에서 불갑산(佛甲山)으로 변했고, 최고봉(516m)은 연실봉(蓮實峰)으로 명명됐다. 예나 지금이나 배가 닿은 지역은 영광(靈光), 항구는 법성포(法聖浦), 마을은 법성리(法聖里)로 불린다. 항구, 마을, 절, 산 이름만 되뇌어도 법음을 새기는 듯하다.

불갑사에 주석하고 있던 수산지종(壽山知宗, 1922∼2012) 스님은 사법고시 준비를 위해 절에 머물고 있는 청년을 칠일이 멀다 하고 찾았다. 신심 깊었던 청년도 기쁜 마음으로 친견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큰스님은 절의 역사를 담은 ‘불갑사고적기(佛甲寺古蹟記)’를 건넸다.

어느 날 청년이 여쭈었다.

“위풍당당했던 절이 어찌 이리 초라해졌습니까? 이대로 놔두어서는 안 될 듯싶습니다.”
“인연이 닿아야 해!”
 

대규모 피안화 군락지를 조성한 것도 만당 스님이다.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에 선 불갑사였지만 사명에 걸맞은 위상이 세워진 건 고려 말에 이르러서다. 충정왕은 당대 선지식 각진(覺眞, 1270∼1355) 스님을 왕사로 책봉(1350) 하고 불갑사를 하산소(下山所, 왕사로 책정되어 산에서 내려올 때 머무르는 곳)로 지정했다. 충정왕(재위 1348~1351)에 이은 공민왕(재위 1351년∼1374)도 각진 스님을 왕사로 임명했다. 왕사 책봉과 하산소 지정을 계기로 불갑사는 500여칸의 거찰로 거듭나며 면모를 일신했다. 승방만도 70여원이었고, 회랑의 기둥이 400여주, 누각의 높이가 90척(27m)이었던 불갑사는 이때부터 불지종가(佛之宗家), 해동의 무쌍보계(無雙寶界)로 칭송됐다. 각진 스님이 왕사에 책봉된 건 입적 5년 전인 만년에 이르러서다. 연로한 스승 곁에서 세 번째 중창(三重創)에 해당하는 대작불사를 이끈 스님은 각릉(覺稜) 스님이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사찰이 그러했듯이 임진왜란 때 절 대부분이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인조 때 이르러 법릉(法稜) 스님이 네 번째 중창을 주도해 절을 일으켰고, 숙종 때 해릉(海稜) 스님이 다섯 번째 중창을 지휘해 팔상전, 팔상탱화 등을 봉안하며 절의 사격을 더했다. 각릉 스님 때의 불갑사 규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으뜸 절’을 수호하기 위한 신심과 전법원력을 생생하게 엿볼 수있는 대목이다. 불갑사에서는 각릉, 법릉, 해릉 세 스님이 일으킨 불사를 일컬어 ‘삼릉불후지사(三稜不朽之事)’라 일컫는다. 직역하면 ‘오래도록 빛날 각·해·법릉의 불사’다. 여기에는 한 사람이 세 번 환생하여 불갑사를 중창했다는 의미도 함축돼 있다. 절이 어려울 때마다 출현한 3릉이기 때문이다.  

하여, 수산지종 스님이 말한 ‘인연’에는 3릉(三稜)이 품은 원력을 이을만한 인물을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가슴 깊이 새겨 두었던 ‘출가’ 두 글자가 다시금 꿈틀댔다.

지리산 화엄사 아랫마을 마천리에서 태어난 소년은 부친 따라 화엄사 금정암(金井庵)을 오르며 신심을 키워갔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이 무심코 낸 중3 수학 문제를 직관으로 풀어낼 정도로 비상함을 보인 소년은 6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기 이틀 전 서울로 전학했다.
 

불갑산 연실봉에서 바라본 불갑사.

중1 때인 11월25일. 실업팀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한 형님이 지역단체로부터 공로패를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구례를 찾았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나니 날은 어두워졌고, 보슬비도 내렸다. 7살과 3살의 조카 둘을 데리고 택시를 잡아 고향 집으로 향했다. 구례에서 하동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부근을 지나는데 차 한대가 자신을 향해 돌진해왔다. 좌우 양 쪽에 앉아있던 두 조카를 팔로 ‘콱’ 움켜잡았다. 두 조카는 무사했으나 자신의 이마는 함몰됐다. 당초 의사도 포기했던 큰 수술이 진행됐는데 부처님 가피였던 듯 생명은 건졌다. 죽음을 직면한 가슴에 형언하기 어려운 파문이 일었다. 고려대 법대에 진학한 그 해, 자신을 끔찍이 아껴주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구례 사고와 아버지의 죽음이 중첩되며 파문은 다시 일었고, 그 파문은 생채기를 내었다. 방황의 날이 지나갈수록 생채기는 깊어져 갔는데 아물게 할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당시 유행했던 단(丹)에도 심취해 보았으나 허한 마음을 채울 수는 없었다.

대학교 2학년 때, 교정에서 나누는 동기생들의 대화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러기에 ‘부모가 낳아주기 이전의 내 본래면목을 알아야 한다’고 하잖아!”
“달마가 혜가에게 말했지. ‘불안해하는 그 마음을 가져와 봐라.’ 다 내 마음에 달려 있는 거지.”

본래면목! 마음! 

가슴을 후벼왔던 칼날처럼 예리한 파문이 잦아드는가 싶더니 희망이 솟는 듯 했다. 친구들을 따라 서울 제기동 한약상가 거리에 자리한 달마선원으로 향했다. 당시 달마선원에서는 탄허·관응 스님 문하에서 공부한 윤덕해 거사가 재가불자들을 대상으로 토·일요일 저녁에 법을 전하고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금강경’ 강의였는데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이어지는 ‘원각경’, ‘대승기신론’에도 흥미를 느꼈다. 포교당의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빨강색 표지의 ‘한글대장경’에 눈길이 꽂혔다. 보물을 품듯 하숙집으로 가져와서는 다시금 펼쳐 보았다. 밤 11시가 되면 12시까지 염불도 독송했다.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아무도 없는 달마선원으로 들어가 홀로 예불 올리며 정진했다. 도서관에서 앉아 법전을 폈지만 이내 그 자리는 ‘한글대장경’이 차지하고 있었다. ‘아함경’ 보며 넘기는 침은 달았는데, ‘형사소송법’ 보며 넘기는 침은 썼고, ‘금강경’ 볼 때는 배도 안 고팠는데, ‘민사소송법’ 볼 때는 허기졌다.  

달마선원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한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지난 날 행한 자신의 과오를 참회한 뜨거운 눈물이었는데 무려 한 달 동안 멈추지 않았다. 그 이후 신비로운 광명이 청년을 감싸 안았다. 웬만한 번뇌는 다스려지는 듯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솟아나는 미세한 번뇌는 어찌 할 수 없었다. 더 깊은 수행이 아니면 이 번뇌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하니 예전부터 염두에 두었던 출가가 다시금 수면위로 떠올랐다. 법대 졸업을 앞두고 갈등했다.

‘지금 출가할까? 아니다. 시골에서 올라 와 법학까지 전공했는데 사법고시는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일단 사법고시 합격해 놓고 출가하자.’

졸업 후 치른 사법고시에서 1차는 합격했으나 2차에서는 아쉽게 떨어지고 말았다.(1991)

‘내년에 다시 도전하자.’

지리산 종주를 작심하고 구례로 향하던 중 전주지검에 있는 6촌 형을 찾았다.

“잊어라. 더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는 게 좋아.”
“난, 합격해도 출가할거야.”
“영광 불갑사에서 공부해 보는 것은 어때? 내가 그 절에서 공부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했어.”
 

성불의 뜻을 간직한 해불암.

처음으로 마주한 절이었음에도 천왕문에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가을 정취가 스민 도량 곳곳을 살피는데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방 한 칸을 얻고 법전을 폈다. 수산지종 스님과 차 한 잔하며 ‘그 옛날의 불갑사’를 두고 담소를 나누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불갑사와의 인연은 그렇게 조금씩 깊게 맺어져 갔다. 어느 날, 우연찮게 절로 배달된 불교계 신문을 집어들어 펼쳤는데 ‘행자교육’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숙고 끝에 수산지종 스님을 찾아뵈었다.

“제가 출가해서 불갑사를 복원하겠습니다.”

수산지종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만당(滿堂) 스님은 그 이후 불갑사를 떠나지 않고 복원불사에 매진했다. 특히 주지 소임(2001)을 맡으면서 박차를 가했는데 일주문, 금강문, 조사전, 극락전, 보장각, 청풍각, 범종루, 영월루, 설선당, 일광당, 향적당, 성보박물관 등을 새로 지었고, 양진당, 백운당 등을 증·개축 했다. 한국 현존 최대의 사천왕상을 품은 천왕문을 원래의 자리로 이전한 장본인이 만당 스님이다. 복원불사 청사진에서 남은 건 ‘관음전’ 한 동뿐이다. 출가 전 7동이었던 건물은 현재 32동에 이른다. 

이 뿐만이 아니다. 절 아랫마을을 정리하며 신행·편의공간을 확대했고, 일반인들에게는 금선화(金仙花) 불리는 피안화(彼岸花) 군락지를 대규모로 조성했다. 이로 인해 가을철이면 엄청난 인파가 불갑사로 밀려든다. 또한 영광군과 함께 법성포 일대의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 성역화’ 사업을 이끌었고, 그 중심에 마라난타사(摩羅難陀寺)와 사면불을 조성했다. 출가 전에 다진 원력을 변함없이 펼쳐 보이고 있는 만당 스님이다. 아울러 불갑사 불교교양대학을 개설해 지금까지 35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경전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재가불자들의 뜻을 수렴해 올해 봄 ‘영광불교대학원’도 열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던 청년에게 ‘불갑사고적기’를 자꾸 보여준 수산지종 스님의 의중이 자연스레 읽혀진다. 

“불갑사 불사를 위해 출가한다고 말씀 드렸을 때 흐뭇해 하셨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말과 행동이 늘 일치하셨던 선지식이셨습니다. 은사스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누구는 어떻고, 저렇고’ 하시면 ‘까치 뱃바닥같은 소리 하지말고 너나 잘해라’ 하시곤 하셨습니다.”

혹, 기존의 복원불사 외에 또다른 불사를 계획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만당 스님은 ‘불갑사 5대암자 순례길’과 불갑산 정상에 부처님을 조성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5대 암자란 수도(修道)·오진(悟眞)·해불(海佛)·전일(錢日)암과 불영대(佛影臺)를 이른다. 

“다섯 암자에 팔상도(八相圖) 의미가 농축돼 있습니다. 열심히 정진하여(修道), 참되게 깨닫고(悟眞), 보림에 전념하여(佛影), 성불하면(海佛), 열반에 이른다(錢日)는 의미입니다. 2시간30분이면 완주할 수 있는 길이니 마음 편히 나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갑산 최고봉인 연실봉(蓮實峰)에 부처님을 모시려 합니다. 경전 속 ‘연꽃 부처님’을 불갑산에 형상화하는 불사입니다. 다섯 암자 순례길이 완성되고 연실 위에 부처님이 앉으시면 불갑산은 명실상부한 불산(佛山)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정진과 성불을 넘어 열반에 이르는 길 끝에 연꽃 위 부처님을 마주한다니 상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이다. 만당 스님은 이어서 놀라운 불사 계획 하나를 털어 놓았다.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요, 으뜸 절인 불갑사를 상징하는 높이 80m의 9층목탑을 꼭 세워보고 싶습니다. 아직은 계획 단계지만 9층목탑이 서면 방만도 130여개가 나옵니다. 사부대중의 신행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9층에 법당을 조성할 것입니다. 불갑산 정상의 부처님을 친견하는 공간입니다.”

불갑산 정상은 516m.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80미터의 탑에서 정상에 계신 부처님을 친견한다면, 대웅전에서 수미단의 부처님을 향해 합장하듯 거의 마주보는 것으로 느껴질 터다. 생각만해도 환희가 밀려온다. 

“절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담고 전하는 성스러운 공간이요,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불갑사에 이른 그 누구라도 잠시 닫혔던 마음을 열며 자비를 떠올릴 수 있다면 100m 높이의 탑이라도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M 엘리아데의 저서 ‘상징, 신성, 예술.’의 한 대목이 스쳐간다.

‘종교는 초월적 체험의 계열에 관한 문제이며 상징을 통해 궁극적인 사실에 참여하게 된다. 종교건축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신성성을 확보하고 불교철학이 표현되는 사찰건축은 배치와 공간구성, 많은 조형과 장엄들을 통해 불가의 사유와 불교적 세계관을 드러내며 깨달음을 통한 해탈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상징체라고 할 수 있다.’

만당 스님의 원력대로 피안의 꽃들 사이로 9층목탑이 솟아오르면 더 깊은 숭고미가 불산에 깃들 것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만당 스님은

고려대 법학과 졸업 후 1991년 수산지종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92년 백양사서 서옹 스님 계사로 사미계. 중앙승가대학원 불교학 석사과정. 백양사 기획국장, 총무원 기획국장, 정광학원 이사, 총무원장 기획문화특보, 종교평화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불갑사 주지, 중앙종회의원(15·16·17대)이다.

 

[1513호 / 2019년 11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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