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3. 진리

우리는 진리란 말을 함부로 쓸 수 있는 것일까?

진리는 시공간을 초월한다지만
자연법칙도 특정 시공간서 성립
진리는 우리 의식·인식력과 관련
‘절대적 진리’ 외치는 것은 망상

우리는 진리(眞理 truth)라는 말을 쓴다. 자연과학도 종교도 진리를 추구한다. 거짓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없다. 심지어 사기꾼들도 사기술의 진리, 즉 사기에 숨겨진 법칙을 찾는다. 진리란 무엇일까? 사람들이 말하는 진리란 ‘절대적인’ 진리를 말한다. 예외 없이 성립하는 진리,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성립하는 진리, 즉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공간과 특정한 환경에 관계없이 성립하는 진리이다. 그런데 어떤 진리가 시공에 관계없이 성립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항상 어디서나 성립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자연법칙조차 그러한지 증명하는 것은 지난한 일로 보인다. 아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다중우주론(多重宇宙論 multiverse theory)에 의하면 우리 우주 말고도 다른 우주들이 있으며, 이 우주들에서는 우리 우주에서 성립하는 자연법칙들이 성립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 경우 우리 자연법칙은 시공을 초월하는 진리가 아니다. 우리 우주에서만 혹은 몇몇 다른 우주에서만 성립하는 진리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특정 시공간에서 성립하는 진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전 우주에서 혹은 가능한 모든 시공간에서 성립하는 진리를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 진리가 있는지 실험할 길도 증명할 길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란 특정 시공간에서의 진리이며 그중에서도 특정 조건하에서의 진리이다. 즉, 특정 조건하에서 항상 성립하면 진리라고 치는 것이다. 그런 진리에는 우리 우주의 진리도 있고, 지구의 진리도 있다. 남자에게 성립하는 진리도 있고, 여자에게 성립하는 진리도 있다. 초식동물에게 성립하는 진리도 있고, 육식동물에게 성립하는 진리도 있다. 예컨대, 생존하려면, 초식동물은 육식동물 멀리 살아야 하고, 육식 동물은 초식동물 가까이 살아야 한다.

‘진리란 유용한 것이냐?’ 아니면 ‘유용하기에 진리냐?’ 하는 논쟁이 있다. 실용적인 진리는 실용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그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을 진리라고 하면 된다. 왕정이 진리일까? 공화정이 진리일까? 과연 미개한 북경원인이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게도 공화정이 답일까? 그렇다면 침팬지에게도 공화정이 답일까? 불교적 진리관에는 실용적인 면이 있다.

시공간을 벗어난 진리를 논하는 것은 안 될까? ‘존재의 집’은 꼭 우리가 아는 시공간이어야만 할까?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은, 심해 물고기가 혹은 열수공(熱水孔)에 사는 미생물이 심해와 열수공을 모든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삶의 터전으로 아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실제 삶에 있어 시공을 초월하는 진리는 필요 없다. 100년도 살기 힘든 인간에게 그런 진리는 분에 넘치는 일이다. 그런 진리를 찾는 것은 마치 1만년 지속되는 집을 지으려고 엄청난 돈을 들이는 꼴이다. 겨우 한 대륙 한 나라에 사는 인간이, 지구를 벗어나 살 수 없는 인간이, 그리고 가까운 장래에 미리내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 전 우주에 성립하는 진리를 찾을 이유도 없다. 

종교적 진리란 무엇일까? 종교인들에게 절대적 진리란 무엇일까? 사실은 그런 진리는 없는데, 그게 공공연한 비밀인데, 다들 쉬쉬하며 서로 속이는 것일까? 상실의 아픔이 너무 크기에(?) 종교인들은 끝없는 망상을 피웠다. 지구라는 좁은 시공간에서도 틀리는 이론을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했다. 아무 증거도 없이 선언만 했다. 심한 경우는 반대하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였다. 왜 진리는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고 자기에 반대하는 자들을 추종자들을 시켜 도살할까?

진리는 우리 감각기관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진리를 찾는다. 그러므로 진리란 감각기관이라는 조건하의 진리이다. 예를 들어 색깔로 파악하는 것은 절대적 진리가 아닐 수 있다. 색깔이란 존재하지 않고, 뇌가 만들어낸 것이고, 그것도 극히 일부분의 빛의 파장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우리 의식과 인식력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의식의 발전과도 연관이 있다. 진리는 의식과 지능의 한계 내의 진리이다. 진리는, 진리를 인식하는 우리 인식능력과 의식의 한계 내에서의 진리이다. 우리는 진리란 말을 함부로 쓸 수 있는 것일까?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513호 / 2019년 11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