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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사띠 비구의 나쁜 견해

기자명 마성 스님

식을 자아로 이해한 사띠 비구 견해는 상견(常見)

알음알이 역시 조건에 따라서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는 것
오온에는 분별하는 자아 없어
마음도 생·멸하는 생각의 흐름

스리랑카의 고대 수도 아누라다뿌라에 있는 미리사와띠야(Mirisawatiya) 대탑의 모습.
스리랑카의 고대 수도 아누라다뿌라에 있는 미리사와띠야(Mirisawatiya) 대탑의 모습.

어부의 아들 ‘사띠(Sāti)’라는 비구는 나쁜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내가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알기로는, 다름 아닌 바로 이 알음알이(識)가 계속되고 윤회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세존께서 다겁생을 통해 여러 존재들로 태어나 보살행을 실천했다는 말을 듣고 오온(五蘊) 가운데 색(色)・수(受)・상(想)・행(行)이라는 네 가지는 죽으면 소멸하지만, 식(識)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윤회한다고 주장했다.

동료 비구들은 “사띠여,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알음알이(識)는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고 하셨다. 조건이 없어지면 알음알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셨다”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사띠 비구는 자신의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이 사실이 붓다께 알려져 사띠 비구는 붓다께 불려갔다. 붓다는 그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 사실이냐고 확인한 다음 그에게 물었다. “사띠여, 그러면 어떤 것이 알음알이인가?” “세존이시여, 그것은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선행과 악행의 과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띠 비구의 답변은 ‘자아’라는 것이 있어서 말하고 느끼고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는 식(識)을 자아라고 이해했던 것이다. 이것은 외도들이 자아는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법이고 영원히 지속된다고 주장하는 전형적인 상견(常見)이다.

그러자 붓다는 사띠 비구에게 “쓸모없는 자여, 도대체 내가 누구에게 그런 법을 설했다고 그대는 이해하고 있는가? 쓸모없는 자여, 참으로 나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알음알이는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고 설했고, 조건이 없어지면 알음알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라고 꾸짖었다. 그런 다음 붓다는 여러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했다.

“비구들이여, 알음알이는 조건을 반연하여 생기는데, 그 각각의 조건에 따라 알음알이는 이름을 얻는다. 알음알이가 눈과 형색들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눈의 알음알이[眼識]라고 한다. 알음알이가 귀와 소리들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귀의 알음알이[耳識]라고 한다.(…)알음알이가 마노[意]와 법들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마노의 알음알이[意識]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마치 어떤 것을 조건으로 하여 불이 타면 그 불은 그 조건에 따라 이름을 얻나니, 장작으로 인해 불이 타면 장작불이라고 하고, …… 왕겨로 인해 불이 타면 왕겨불이라고 하고, 쓰레기로 인해 불이 타면 쓰레기불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붓다는 알음알이나 마음이라는 것도 조건에 의해 일어나기도 하고, 조건에 의해 사라지기도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사띠 비구는 알음알이가 불변하는 실체, 즉 자아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사띠 비구는 사람이 죽으면 육체와 수・상・행은 소멸하지만, 식(마음)은 죽지 않고 윤회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과거에도 사띠 비구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눌(知訥)은 육조단경 발문(跋文)에서 남양혜충(南陽慧忠, ?-775) 국사가 지적했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즉 “너희 남방은 몸은 무상하고 마음은 항상하다고 말한다. 이런 까닭에 반쪽은 생멸하고 반쪽은 불생불멸한다. … 역시 몸은 생멸하고 마음은 생멸하지 않는다는 뜻이 들어 있어, 곧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스스로 생각을 일으킨 것이고, 눈・귀・코・혀 등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바로 이 점은 혜충 국사께서 꾸짖은 내용이다.” 이처럼 혜충 국사는 ‘몸은 생멸하지만 마음은 생멸하지 않는다’고 하는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은 불법이 아니라고 꾸짖었던 것이다.

대림 스님은 ‘맛지마 니까야’ 해제에서 “한국불교에는 마음 깨쳐 성불한다거나 마음이 곧 부처[心卽是佛]라거나 마음 외에 부처란 없다[心外無佛]라거나 일체는 마음이 만들어낸 것[一切唯心造]이라거나 하며 마음을 절대화하는 데 열을 올리는 분들이 많다. 이처럼 마음을 절대화하여 마음이 우주의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주나 절대자인 양 받아들여 버린다면 이것은 큰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붓다는 기회 있을 때마다 오온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라고 설했다. 이른바 오온에는 불변하는 자아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온무아설이다. 오온이 무아라면 오온의 다섯 번째인 알음알이[識], 즉 마음도 불변하는 자아가 아님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마음이 불변하는 실체라고 착각하고 있다. 마음이란 찰나생・찰나멸하는 생각의 흐름일 뿐이다. 더욱이 마음은 육체보다 더 빠르게 변화한다. 이처럼 허깨비나 환상과 같은 마음이 윤회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사띠 비구는 식(識)을 불변하는 자아로 인식했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갖게 하는 원인은 오온 가운데 산냐(saññā, 想)의 작용 때문이다. 산냐는 한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듣고 터득한 온갖 개념으로부터 형성된 고정관념 혹은 잘못된 인식을 말한다. 산냐는 그 다음 단계인 의지작용(行)과 인식작용(識)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잘못된 정보에 의해 고착화된 산냐는 올바른 인식 판단을 내리는데 장애가 된다. 이것이 그 사람의 한계인 것이다.

‘금강경’에서도 잘못 입력된 산냐, 즉 불변하는 자아가 있다는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을 버리지 않으면 결코 보살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에게 고착화된 고정관념 혹은 잘못된 인식은 천지개벽과 같은 자각이 없는 한 바꾸기 어렵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신(神)과 불변하는 자아(自我, ātman)나 영혼(靈魂, soul)이 존재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붓다는 그러한 신이나 불변하는 자아나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있던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철저한 자각이 있어야 비로소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된다. 한 사람의 올바른 불자가 되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것이다.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ripl@daum.net

 

[1514호 / 2019년 11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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