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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노영, 자화상을 남긴 리얼리즘 화가

기자명 주수완

예술가로서 높은 자의식…왕과 자화상 함께 놓아

도솔암 미타전 중수한 화가 노영
자신의 일에 자부심 표현한 화가

왕건 뒤 금강산 배경한 불화 눈길
왕도 평범한 인간으로 그려내며
그림 속에선 그저 인간일 뿐 강조

노영이 그린 목판금니화. 아미타팔대보살도(좌)와 그 뒷면의 태조금강산예불도(우). 1307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2.5×13㎝.

고려불화 속에 이름을 남긴 예술가 중에는 노영(魯英)이란 화가도 있다.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그는 충숙왕 14년이던 1327년 강화도 선원사 비로전의 벽화와 단청 작업을 이끌었고, 또한 도솔암 미타전을 중수한 작가로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는 비교적 소상히 남아있어 고려말 법당 내부의 법식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도솔암 미타전의 경우 서쪽 벽에는 아미타정토도(阿彌陀淨土圖)를 그리고, 또 다른 벽면에는 천신과 신중들을 그렸다고 한다. 근래 사찰 법당의 오른쪽 벽면에 신중탱을 거는 전통이 당시부터 이미 존재했음을 알려주며, 아미타정토도를 그리는 전통은 멀리 당나라 때의 돈황 막고굴에서 비롯하여 조선초 무위사 극락전 안에서도 그 전통이 이어짐을 찾아볼 수 있다. 선원사 비로전에는 동편과 서편에 40위의 신중을, 그리고 북벽에는 55명의 선지식(善知識)을 그렸다고 한다. 비로전이니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이었을 것이고, 내용은 ‘화엄경'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마지막 입법계품을 소재로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찾아 떠난 구법여행을 전각 안에 스펙타클하게 펼쳐 그렸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그림은 현재는 우리나라 법당에서 잘 찾아보기 어렵지만, 중국의 화엄성지 오대산의 사찰벽화에서는 종종 만날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런 그림들이 고려시대에 그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뛰어난 화가여서 기록에 남았겠지만, 이렇게 그가 그린 그림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 그림들이 어디에 걸렸는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연구자들에게 매우 고마운 존재다. 그런데 이렇게 이름만 남긴 것이 아니라, 실제 작품도 한 점 남아있어 더더욱 고마울 따름이다. 물론 그가 그렸다던 웅장한 벽화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소품이나마 그의 필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그의 작품은 1307년에 그려진 것이니 20년쯤 후에 대작 벽화를 그렸을 때와는 다른 젊은 시절의 패기가 더 담겨있을 듯하다. 이 작품은 작은 나무판에 옻칠을 하고 그 앞뒷면에 금선으로 그린 불화이다. 그러나 크기는 작아도 그 작품이 담고있는 내용은 결코 작지 않다. 우선 그가 도솔암 미타전에 아미타정토도를 그렸다고 하는데,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아미타팔대보살도가 이 목판 그림의 한쪽 면에 그려져 있다. 아미타불이 상단에 그려져 있고, 그 아래로 8분의 보살이 그려진 것은 일반적인 고려불화 속의 아미타팔대보살 도상과 같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그 필선이 매우 구불구불하게 요동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정교하고 섬세하기로 유명한 고려불화의 필선과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고려불화의 필선이 너무 정제되고 점잖은 표현이라면 이 필선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분출하는 역동적인 필선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고려불화의 필선은 서양화의 신고전주의 화풍의 다비드가 그린 그림이라면, 노영의 이 그림은 귀스타브 쿠르베 풍의 그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화풍도 새롭게 막 등장한 화풍은 아니었다. 이미 당나라 때 활동했던 호탄 출신의 유명한 화가인 위지을승이 구사했던 ‘굴철반사’라는 화풍을 재해석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하간 이 그림이 중요한 점 중의 하나는 굴철반사라는 오랜 화풍이 고려 말기에까지도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도솔암 미타전 내부에 이런 필치로 아미타정토도와 신중도가 그려져 있었다면, 그것도 채색화로 그려져 있었다면 매우 역동적인 분위기를 자아냈을 것이다.

그 뒷면에 그려진 그림은 태조왕건이 금강산에 들렸다가 그곳에 상주하는 담무갈보살(법기보살)을 친견했다는 전설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에서 중요한 점은 다른 불화들과 달리 그 배경이 우리나라 금강산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림 속 배경의 산은 한참 후에 등장하는 진경산수 속 금강산 표현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화풍 뿐 아니라 불화의 배경으로 인도나 중국이 아닌, 우리의 땅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크나큰 인식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이 점이 이 작품의 두 번째 중요한 점이다. 아마도 선원사 비로전에 그렸다는 40위의 신중은 이 그림 속에서 담무갈보살과 함께 현현한 여러 신중들의 표현과 유사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담무갈보살 역시 ‘화엄경'에 등장하는 보살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추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태조금강산예불도 우측하단의 노영 자화상.

세 번째 중요한 점은 이 그림 속에는 담무갈 보살을 친견하는 태조 왕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그림 속에서 왕을 그리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왕을 그려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어떤 미화도 없이 그저 보살 앞에 무릎을 꿇고 조아린 평범한 인간으로 무덤덤하게 그렸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리얼리즘이다. 노영은 화풍에서만 쿠르베에 비견될 것이 아니라 리얼리즘 화가였다는 점에서도 쿠르베와 닮았다. 아무리 왕건이라도, 아무리 태조라도, 그림 속에서는 그저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진짜 이 그림이 지닌 충격적 중요성은 왕건과 대각선으로 대칭되는 위치에 화가가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넣었다는 것이다. 감히 화가 따위가 왕건과 한 화면 안에 그것도 뭔가 비슷한 신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려넣고는 떡하니 그 위에 자신의 이름도 적어 넣었다. 서구방이나 김인문처럼 이름을 적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자화상까지 그려넣다니 도대체 이 시대를 초월해 자화상을 남긴 노영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혹자는 그가 주로 불화를 그린 것으로 미루어 승려화가로 생각하지만, 이 그림 속 자화상을 보면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그가 속세의 화가였음을 짐작케 한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고려 불교의 전설적 설화 속에 자신의 모습과 이름을 동시에 남겼던 것일까?

자화상은 보통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초상화로 그려지는 인물들은 원래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화가가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자신들의 지위에 스스로 자부심을 지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최소한 노영은 화가로서의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음을 세상에 알린 우리나라 최초의 화가인 셈이다.

주수완 고려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514호 / 2019년 11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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