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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㊱ 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⑮

중고기 신라불교 완성자였으나 변방에 쫓겨나는 비극적 삶 주인공

황룡사9층탑 건립케 하고
왕실 신성화 정치이념 수립

신라불교 10성 중 1인 추앙
풍부하고 다양한 사료 전해

삼국유사·속고승전 대표자료
여러 면서 상당한 차이 보여

속고승전은 자장 생존시 기록
600년 뒤 삼국유사보다 앞서

​​​​​​​문수신앙에 대한 다른 기록
역사적 맥락 봐야 진실 보여

통도사 자장율사진영. 경남 유형문화재 제276호.
통도사 자장율사진영. 경남 유형문화재 제276호.

자장은 선덕여왕대(632~647) 당(唐)에 유학하고 중국의 선진문화 수입에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대국통(大國統)에 취임하여 계율을 정리하고 교단을 정비하여 다음 ‘중대’기 불교발전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또한 왕실불교・국가불교의 상징물로서 황룡사 9층탑을 건립케 하고 신라의 불국토설(佛國土說)과 진종설(眞宗說)로 ‘중고왕실’을 신성화하는 정치이념을 수립케 하였다. 그러나 고승으로서는 비교적 단명이라고 할 수 있는 50대 전후에 지방에 쫓겨나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는 불운을 맞는 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보다 한 세대 앞을 살았던 원광(圓光)은 진평왕대(579~632) 수(隋)에 유학하고 역시 중국의 선진문화 수입에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사회의 발전에 상응하는 새로운 사회윤리를 제시하였다. 또한 수(隋)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작성하여 국가적인 위기를 벗어나게 하였으며, 국왕의 권위를 드높이는 왕실불교・국가불교를 발전시키는 종교적 임무 못지않게 사상가・정치가・외교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원광은 80대의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나자 장례의식을 국왕의 그것과 같은 격식으로 거행할 정도로 화려하게 삶을 마감하여 불운하게 생을 마감한 자장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이들 두 사람의 말년의 운명이 다르게 된 까닭은 이들이 각자 활약한 시기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즉 원광이 활약한 진평왕대(579〜632)는 ‘중고’기 불교의 발전기였던데 견주어 자장이 활약한 선덕여왕・진덕여왕대(632〜654)는 ‘중고’기 불교의 완성이자 쇠퇴의 시기였다는 점이 두 사람의 말년 운명을 다르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자장은 ‘중고불교’의 완성자로서 뒷날 신라불교 10성(聖)의 1인으로 추앙되었던 반면, 원광은 중국 유학의 선구자로 평가되었을 뿐이고 10성에서는 제외됨으로써 또한 대조를 이루었다. ‘삼국유사’에서 자장은 ‘자장정률조(慈藏定律條)’, 원광은 ‘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로 각각 독립된 편목으로 수록되었다. 또한 중국의 ‘속고승전’에서도 자장은 ‘당신라국대승통석자장전부원승(唐新羅國大僧統釋慈藏傳附圓勝)’ 원광은 ‘당신라국황륭사석원광전부원안(唐新羅國皇隆寺釋圓光傳附圓安)’으로 각각 독립된 열전으로 입전되었다. 이로써 이 두 사람은 한국의 불교사에서뿐만 아니라 중국의 불교사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한 세대 차이를 두고 각각 신라 ‘중고기’의 국가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나아가 중고기 불교가 집약된 총체적인 모습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대국가의 발전과 왕권의 강화과정에서 이들의 역할을 새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본고에서는 편의상 시대적인 순서를 바꾸어 자장과 원광의 차례로 각자의 생애와 업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자장의 생애와 업적에 관한 자료는 ‘중고불교’의 완성자로 평가받은 사실에 걸맞게 비교적 풍부하고 다양하게 전해지는 편이다. 그러나 이들 자료 대부분이 역사적인 사실과 설화적인 허구가 뒤섞여 있어서 엄밀한 자료 고증과 함께 전문적인 설화 해석의 방법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자장에 관한 종합적인 자료로는 앞에서 언급한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 권4 자장정률조와 당 도선(道宣, 596~667)의 ‘속고승전’ 권24 자장전 등 2편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자료는 여러 면에서 상당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어서 비교 고찰이 요구된다. 특히 당의 유학 연대와 행적에서 커다란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자장의 불교 이해에 적지 않은 혼란을 일으켜 왔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삼국유사’에 크게 의존하는 편향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재고를 요하는 문제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삼국유사’는 13세기 후반에 편찬된 사서로서 자장의 시대부터 600년 이상의 시차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내용 자체가 그대로 자장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600년이라는 긴 시간의 불교사의 전개과정에서 끊임없는 불교계의 변화에 따른 불교사 인식들이 대두하여 역사적 사실들을 재해석하게 되었고, 그러한 해석들이 누적되어 일연의 자장에 대한 인식에 반영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후대에 윤색되거나 새로 첨가된 자료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사료 비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삼국유사’에서 자장정률조와 같은 성격의 자료로서 함께 참고할 수 있는 자료로서는 권4 황룡사장륙조(皇龍寺丈六條)・황룡사9층탑조(皇龍寺九層塔條)・대산5만진신조(臺山五萬眞身條)・대산월정사5류성중조(臺山月精寺五類聖衆條) 등을 비롯하여 민지(閔漬, 1307)의 봉안사리개건사암제일조사전기(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 ‘五臺山月精寺事蹟’所載), 민오(敏悟, 1705)의 사바교주계단원류강요록(娑婆敎主戒壇源流綱要錄, ‘通度寺誌’所載)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자료들의 공통적인 성격은 설화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인데, 설화적인 허구라고 하여 가볍게 부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장정률조를 비롯한 자료들은 김부식 같은 유학자의 ‘삼국사기’나 각훈 같은 승려의 ‘해동고승전’ 등의 역사서에 실렸던 자장의 전기를 비롯하여 ‘사적기(事蹟記)’ 형태의 관련 사찰들의 전승 자료에 상당부분 의존하면서 이를 재편집한 것이며, 또한 금석문이나 고고학적 자료에 토대를 두고 기술하거나 추가하였다는 점에서 사료로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남아있는 자료 가운데 가장 시대가 올라가며 가장 풍부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자장정률조 등에 전하는 설화적인 내용은 상당 부분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여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엄격한 사료 비판을 통하여 후대에 첨가되거나 윤색된 내용을 구분하면 훌륭한 자료가 될 수 있으며, 때로는 정사류(正史類)의 역사서에서는 결코 읽어낼 수 없는 당대인들의 정신세계나 정치이념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자장 관련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로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황룡사 9층목탑 사리함기(舍利函記)이다. 이 사리함기는 찰주본기(刹柱本記)라고 하는데, 경문왕 12년(872) 황룡사를 중창할 때에 박거물(朴居勿)이 찬술한 것이다. ‘삼국유사’ 황룡사9층탑조에서도 이미 일부 내용을 인용하고 있으며, 사중기(寺中記)라는 명칭으로 인용하고 있는 자료와도 부합하는 내용이다. 이 찰주본기는 자장이 입적하고 200년도 더 지난 뒤에 씌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신라 당시의 기록이자, 국내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랜 자료의 원래 모습이라는 점에서 가장 신빙성이 높은 자료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도선(道宣, 596~667)의 ‘속고승전’ 권24 자장전은 우선 가장 시기가 빠른 자장의 생존시에 씌어졌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자장이 당 유학 중에 도선과 직접 교류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자장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시해야 할 자료이다. 도선은 수의 대업 12년(616) 즈음에 지수(智首)의 문하에 들어가 계율을 공부하여 남산율종의 9조로 추앙받게 되었다. 무덕 7년(624)에 종남산에 들어가 강설과 저술에 종사하였다. 뒤에는 계율의 이전(異傳)을 구하여 상부종(相部宗)의 법려(法礪)를 찾기도 했으나, 정관 16년(642)에 다시 종남산으로 돌아왔으며, 현장의 번역작업장에 초청되어 참여하기도 하였다. 도선이 자장과 만나게 된 것은 640〜642년 즈음 도선이 종남산 운제사(雲際寺)에 있을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선이 특히 자장의 계율 정비 노력을 높이 평가하여 호법보살(護法菩薩)이라고 칭송하면서 그를 호법편(護法篇)에 편입한 것은 불교교단을 정치권력에 예속시키고, 또한 불교를 도교의 아래로 위치시키려는 당왕조의 불교정책에 대하여 강렬하게 항거하였던 도선 자신의 입장에서 자장의 행적을 극히 우호적으로 평가한 결과였다고 본다.

‘속고승전’ 자장전과 ‘삼국유사’ 자장정률조는 모두 자장의 생애와 업적을 종합적으로 서술하면서도 그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상당한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자장이 당에 갔던 연대에서 ‘속고승전’의 정관(貞觀) 12년(638)설과 ‘삼국유사’의 인평(仁平) 3년(636)설로 나뉘어 2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자장의 오대산 순례와 문수신앙에 대해서는 ‘속고승전’에서 시종 침묵을 지키고 있는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자장의 오대산 참배 사실을 여러 곳에서 반복해서 전해주고 있다. 즉 ‘삼국유사’ 권4 자장정률조를 비롯해서 황룡사장륙조・황룡사9층탑조・대산5만진신조 등에서 자장의 오대산 참배와 문수신앙의 사실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 자신도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지, 자장정률조에서 주석의 형식으로, “자장은 처음에 이것을 숨겼기 때문에 당승전(속고승전)에는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명하고 있었다. 자장의 오대산 문수신앙은 오랜 기간 불교계와 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아 중요시되어 왔기 때문에 현재도 ‘삼국유사’의 내용을 더욱 긍정적으로 이해하려는 학자들이 상당수 있다. 그러나 자장의 문수신앙이 오대산 순례에서 기원한다는 점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자장의 오대산 순례를 전하는 문헌으로 ‘삼국유사’를 앞서는 것은 아직 발견된 바 없다. 만일 자장이 실제 오대산을 순례했다면 중국에 도착한 직후로 장안(長安)에 도착하기 전일 것이다. 그런데 도선은 직접 오대산을 답사한 바 있고, 또한 자신의 저술에서 누누이 오대산 문수신앙을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장의 순례사실을 고의로 누락시켰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본다. 결국 황룡사9층탑의 찰주본기에서 증언한 대로 자장은 선덕여왕 7년(638) 당에 가는 사신 신통(神通) 일행을 따라 곧장 장안으로 갔다고 보지 않을 수 없으며, 장안에 가기 앞서 오대산 순례 사실을 윤색하기 위해 당에 간 연대를 선덕여왕 5년(636)으로 설정, 2년 앞당기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속고승전’ 자장전을 해석하려고 할 때 반드시 함께 참고해야 할 자료가 있다. 같은 ‘속고승전’ 권15 법상전(法常傳)과 도세(道世)가 저술한 ‘법원주림전(法苑珠林傳’ 권64 자장전(慈藏傳)이 그것이다. ‘속고승전’ 법상전에서는 자장이 법상(567~645)으로부터 보살계를 받은 사실을 전해주고 있는데, 법상은 섭론종의 북방전파에 가강 큰 공을 세운 담천(曇遷)의 제자로서 ‘섭대승론’과 ‘열반경’ 등에 대한 주석서를 남기었다. 또한 도세(?~668후몰)는 도선의 동문인데, 그가 저술한 자장전은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속고승전’의 자장전을 줄여서 기술한 것이다. 그러나 자장의 입적 시기와 사인(死因)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어서 주목된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15호 / 2019년 12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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