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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자유의지와 구속

자유의지는 우리를 자유롭게 않고 구속한다

인간에게 자유라는 단어는 큰 매력
무능력이 ‘자유’ 포장지에 싸인 것
수영선수일수록 수영방법도 단순
‘자유의지는 무지의식’이라 불러야

우리는 암묵적으로 우리가 자유의지를 행사하고 산다고 생각한다. 그럼,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자유의지를 행사하고 사는지 살펴보자. 아침에 특정 시간에 일어난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다. 우리가 잠속에서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자고 결정하고 일어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의식적인 결정은 일어난 적이 없다. 세수를 하고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는다. 평소에 하던 행동을 하는 것뿐이다. 거의 자동적인 행동이다. 여전히 자유의지의 작용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행해진다. 이것들은, 설사 자유의지가 작동한다 하더라도, 자유의지가 없어도 상관하지 않을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다. 정말 중요한 일은 어떨까? 정말 중요한 일에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무작위적인 자유의지를 적용할까? 아닐 것이다.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서 제반 사항을 꼼꼼히 살피고 살필 것이다. 자유의지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더 이상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상황에 가서 적용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얼마나 될까? 몇 건이나 될까? 그리고 만약 무작위로 일어난다면 주사위를 던져 결정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그리고 이성을 이용해 숨은 규칙을 찾아내 내리는 합리적인 결정에 비하면, 이런 무작위적인 결정은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만약 자유의지란 게 이런 무작위적인 행위가 아니라면, 뭔가 숨어 있는 규칙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숨어 있는, 즉 우리가 아직 모르는 메커니즘 또는 규칙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럼, 이게 어떻게 전통적 의미의 자유의지의 작용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전통적인 의미의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 해도 가치가 없다. 우리는 파친코 머신이나 룰렛이나 주사위 도박을 할 때도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려고 노력을 한다. 머리를 쥐어짠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무작위적인 결정을 하려는 경향은 없다. 그러므로 만약 그런 기능이 있다면, 그 기능을 좋아해 택한 것이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무능력이 아름다운 포장지에 싸여 골방에 놓여 있는 것이다. ‘자유’라는 포장지를 쓰고.

인간에게 자유라는 말처럼 매력적인 말은 없다. 자유란 구속의 반대말로서, 인간의 욕망충족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구속이고 그걸 없애는 것이 자유이다. 자유란 심지어 이성적인 사고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많은 경우에 이런 일은 모순이다. 이런 종류의 자유는 감성적인 자유이다. 특정한 상황에서 느끼는 구속감을 해방하는 구실을 한다. 실제로 구속되어 있는지 여부와는 무관하다. ‘줄에 묶여있지 않아도 묶여있다고 생각하면 구속’이라는 것이 심리적인 구속의 특징이다.

자유의지란 말은 마치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마치 우리는 ‘의지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의지는 우리를 자연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등장한 기능이다. 만약 자연의 구속을 원한다면 의지를 없애도 좋다. 화산이 폭발해 시뻘건 용암이 밀려와도, 산사태가 나고 홍수가 밀려와도 ‘도망가자는 의지’가 안 생겨도 좋다면 그리하면 된다. 세상일에는 이치가 숨어 있다. 그 이치를 발견하고 적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다. 그래서 많이 알수록 지식이 쌓여갈수록 택할 수 있는 길은 줄어든다.

예를 들어 수영선수들은 팔다리 놀림과 숨쉬기를 함부로 하지 않는다. 특정한 방법으로, 즉 가장 속도를 빨리 내는 방법으로 한다. 그리고 그런 길은 많지 않다. 극소수로 한정된다. 특히 자기 신체에 맞는 방법은 더 줄어들어 하나둘 정도로 줄어든다. 하나로 줄기도 한다. 그리되면 자유의지의 작동에 의한 수영은 없다. 정해진 길을 가는 것, 즉 정해진 대로 손발과 몸을 놀릴 뿐이다. 초보자가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직 가장 효과적인 길을 모르므로 함부로 손발과 몸을 놀리는 것뿐이다. 이 점에서 자유의지는, 역설적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한다. 자유의지는 무지의식(無知意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맞는 말이다.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때 작동하는 의지라는 말이다. 이 경우조차도 낮은 수준의 지식 아래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는 없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516호 / 2019년 12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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