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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설충, 극락세계를 펼쳐 보인 판타지 화가

기자명 주수완

임종 앞둔 이들에 호스피스 역할 하는 ‘관경변상도’

당나라 때 전통적 방식서 벗어나
원근 보단 평면구도 선택한 설충

인간 감성으로 인지할 수 없는
더 높은 차원 즐거운 세계 보여줘

​​​​​​​조선시대 이맹근 또한 비슷한 경향
최근 현대작품서도 나타난 형태

일본 교토 지온인에 소장되어 있는 설충의 1323년작 관경변상도(좌, 224.2×139.1㎝)와 이맹근의 1465년작 관경변상도(우, 269×182.1㎝).

고려불화의 도상 중에 ‘관경16관변상도’, 줄여서 ‘관경변상도’라는 그림이 있다. ‘관무량수경’에 의하면 누구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극락세계의 16종류의 모습을 머리 속에 떠올리는 연습을 열심히 하면 실제로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관경변상도’는 이 16종류의 모습을 그려내어 불자들이 극락세계를 상상 속에서 떠올리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그려진, 일종의 명상 보조 기구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이런 그림은 임종을 맞이한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걸어두고 이 그림에 마지막 정신을 집중하게 함으로써 극락세계에 태어나도록 돕는데 사용되었다. 과학적으로만 따진다면 과연 이런 그림을 집중해서 보고 상상한다고 해서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판타지가 죽음에 임한 사람들의 두려움과 고통을 어느 정도 덜어주는데 충분히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호스피스의 역할을 해왔던 그림이라고 하겠다.

16장면의 극락이 한 화면에 표현되다 보니 고려불화로서는 큰 크기인 2m를 넘는 대작임에도 몇 작품이 알려지고 있는 것을 보면 고려시대에 꽤 유행했던 도상임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일본 지온인(知恩院)에는 두 점의 걸작 관경변상도가 전하고 있는데, 한 점은 고려후기인 1323년에 화공 설충(薛沖)에 의해 그려진 작품이며, 다른 한 점은 조선초인 1465년에 어진화사로도 활동했던 사직(司直) 이맹근(李孟根)이 그린 작품이다. 유사한 구도의 작품이기 때문에 이러한 전통이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까지 이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그 외에 고려시대 작품으로 1323년에 그려진 린쇼지(隣松寺) 소장본, 사이후쿠지(西福寺) 소장본, 오타카지(大高寺) 소장본 및 조선 초인 1435년 그려진 지온지(知恩寺) 소장본 등이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지온인에 소장된 두 점의 관경변상도는 각각 설충, 이맹근이라는 직업화가의 작품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 그림을 발원하고 주문한 분들은 대선사(大禪師)로 불린 어떤 스님과 정업원의 주지로서 승통의 직책을 지닌 또다른 스님을 필두로 도인(道人)으로 통칭되는 신도들이 함께 참여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함께 발원하면서 어떤 특정한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목적인이보이지 않는 것은 이 그림이 일종의 공유 대상이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맹근의 관경변상도에 보이는 광명기둥과 최정화 작가의 알케미(2017, 플라스틱 그릇과 LED조명).

즉, 당시로서는 임종을 맞이한 사람이 이러한 값비싼 대작을 걸어두고 편히 숨을 거두는 것도 일반 사람들은 결코 쉽게 누릴 수 없는 사치였을 수 있다. 그래서 정업원의 주지스님을 필두로 함께 돈을 모아 이러한 관경변상도 한 점을 제작하고는, 절의 신도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마다 이 그림을 빌려주고 함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이 그림을 제작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도 극락에 갈 수 있도록 관경변상도를 시주한 공덕으로 자신들 뿐 아니라 일체의 중생들이 함께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한 내용을 화기(畵記)에서 엿볼 수 있다.

설충은 이 그림을 그림에 있어 당나라 때로부터의 전통적인 방식, 즉, 원근법에 의한 극락세계를 그리지 않고, 매우 평면적인 구도를 선택했다. 이전의 방식이 강한 원근법을 통해 임종을 맞이한 사람이 마치 그 공간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인상을 주려고 했다면, 이 관경변상도는 원근법을 무시하고, 압축된 듯한 공간에 극락세계를 표현함으로써 마치 이미 극락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효과를 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아가 원근법이 인간의 감성에 의한 세계의 인식이라면, 원근법이 무시된 이 관경변상도는 인간의 감성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더 높은 차원의 즐거움이 가득한 세계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으로도 읽힌다.

이렇게 평면적인 공간에 압축한 극락세계에 존재하는 아미타 부처님을 비롯한 수많은 보살 권속들은 기하학적인 대칭을 이루며 자리잡고 있는데, 이러한 구도로 배치된 보살들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면 마치 화면 중앙에 커다란 연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여 신비롭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구도를 보이는 조선시대 궁정화가인 이맹근이 그린 또다른 관경변상도를 살펴보면, 우선 이 관경변상도는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 등 쟁쟁한 인물들이 태종의 명복을 빌면서 이와 함께 모든 고혼들의 극락왕생을 기린 그림이다. 아마 그 중에는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킬 당시 죽인 많은 사람들의 혼령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이렇듯 왕실의 쟁쟁한 인물들이 궁정화가인 이맹근을 고용해서 만든 관경변상도임에도 정업원의 주지스님이 주도해서 만든 설충의 관경변상도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고려와 조선이라는 시대적 배경도 고려해야겠지만, 이를 보면 설충이라는 화가가 정업원의 스님과 신도들을 위해 이 그림을 왕실 주문의 그림에 준하는 정성으로 그려 납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 두 관경변상도에 보면 가운데 설법장면의 바로 위에 마디마디 연결된 듯한 기둥 같은 것이 줄지어 서있고, 여기서 광명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묘사된 부분이 보인다. 그런데 이 기둥 같은 물체가 마치 오늘날 최정화 작가의 설치작품인 “알케미”(Alchemy, 2017)와 놀랍도록 닮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최정화 작가가 이 고전적 모티프를 알고 있었는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다만 이런 신비한 기둥들이 모인 숲에 알케미(연금술)란 이름을 붙여 평범한 플라스틱 그릇이 보석같은 작품으로 변화한 것을 암시한 것이라면, 이를 역으로 관경변상도에 적용해볼 수 있겠다. 즉, 극락의 공간에서 이들 신비한 기둥들은 중생들의 영혼들이 극락왕생하고 깨달음을 얻도록 변화시켜주는 마법같은 장치일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고려와 조선 작가들의 상상력이 오늘날 현대작가의 상상력과 맞닿아 있다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주수완 고려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516호 / 2019년 12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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