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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마침, 다시 시작! ① - 진광 스님

기자명 진광 스님

“어느 곳이라도 좋다는 심정으로 사소함 동행하다”

동은 스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치명적인 유혹끌려 1년간 동행
한 가지 주제 서로보기 신선해
​​​​​​​
동은 스님 좋은 원고 볼때마다
중압감과 함께 기분좋은 깨달음
허재경 작가의 삽화 경이로워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인연(因緣)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 아닌가 싶다. 왜, 무엇 때문에 이 무지막지하고 엄청난 일을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전생의 빚을 갚으려고 그러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어쩌면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처럼 갑자기 글 쓰는 벌레로 변했다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 그런 느낌이다. 아니면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처럼 햇빛이 너무나 강렬해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우연(?) 혹은 필연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 시작은 이러했다. 평소 ‘불교신문’에 연재되는 동은 스님의 감성 에세이 ‘지금 행복하기’의 열렬한 팬이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거니와 밥 한 끼도 함께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무작정 스님의 글과 그 마음이 좋았다. 아마도 홀로 이룰 수가 없는 짝사랑을 했었나보다. 그래서 무작정 스님의 전화번호를 물어보고는 전화와 문자를 주고받았었다. 사람들은 운명적이고 필연적인 사랑을 믿고 싶어 하지만 도리어 우연으로 시작해 마침내 필연이 되는 경우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스님과 나의 경우가 그러하다 할 것이다. 그러던 중 스님으로부터 손수 붓글씨로 정갈하게 쓴 편지를 한통 받았다. 몇 년 전에 강진 백련사 무문관 정진할 적에 쓴 ‘무문관’이란 책을 개정 증보해 ‘그대 지금 간절한가’라는 책을 발간하는데 추천사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워낙 불학무식하고 졸렬한 문장인지라 극구 사양하였으나 간곡한 부탁 말씀에 주제 넘게도 추천의 글을 쓰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아니 평소 존경하고 흠모하던 스님의 책에 추천의 글을 쓰게 되어 너무나 영광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송구스럽고 부끄럽고 욕 되기가 그지없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 얼마가 지나지 않아 갑자기 법보신문 ‘모과나무 출판사’ 대표와 팀장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내년에 동은 스님과 함께 일년 간 한 가지 주제에 두 가지 다른 시선으로 연재를 한번 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하였다. “참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펄쩍 뛰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동은 스님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건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이자 두 번 다시 올 수가 없는 치명적 유혹(?)과도 같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악마에게 내 영혼이라도 팔아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보들레르처럼 “어느 곳이라도 좋다! 어느 곳이라도! 그것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이라는 심정이었을 게다.

그러나 나는 물론 스님도 원고지 15장 이상의 장문의 연재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실로 무모하기 그지없는 도전인지라 주저하고 망설여지기까지 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하고 싶은 일기일회(一期一會)의  기회인지라 간곡히 스님을 설득해 허락을 받아냈다. 사실 나도 두렵고 무모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스님과 함께라면 능히 이룰 수 있으리라 믿었다. 도대체 무얼 믿고 그리 엄청난 일을 벌였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우짜든둥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동은·진광 스님의 사소함을 보다’라는 연재가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너무 불교적인 소재나 종교적이지 않은 대중 친화적이고 시사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싶었다. 아니면 스님 개개인의 비밀스런 이야기까지 흉허물 없이 털어 놓을 수 있는 연재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언론과 스님의 특성상 그렇게까지는 할 수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사소함을 보다’라는 제목보다는 같은 생각 다른 꿈이라는 ‘동상이몽(同想異夢)’이나 같은 꿈에 다른 생각이라는 ‘동몽이상(同夢異想)’으로 제목을 정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계 신문사상 처음으로 시도하는 참신한 기획과 파격으로 인해 수많은 관심과 호응을 이끌어내며 단연 화제의 중심에 설 수가 있었다. 

처음으로 스님의 ‘절 출입카드 일주문’이란 글과 나의 ‘일주문을 들고 나며’라는 글이 ‘법보신문’에 활자화되어 나왔을 적의 감동과 환희를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행복의 충격과 전율 그 자체였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란 시에 “한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중략)…그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는 말처럼 일생을 다시 산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우리들의 무모한 연재는 같은 주제에 서로 다른 생각을 펼쳐나가며 이어졌다. 어떤 독자는 매 연재마다 누가 더 잘 썼는가 비교평가와 승부를 매기기도 했고 왜 상대 스님보다 못 쓰느냐는 핀잔과 걱정도 들어야 했다. 때론 스님의 멋진 글에 절망해서 붓을 꺾어 버린 채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 함께하며 참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었기에 지금까지 계속해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삽화를 그려주신 ‘허재경’ 작가님께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눈에 잡히지도 않고 그림이 그려지지도 않는 글에 어찌 그리 삽화를 잘 그리셨는지 모를 일이다. 마치 내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와서 그린 듯 신묘한지라 깜짝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역시 글도 그렇지만 그림은 아무나 그리는 게 아닌가보다. 

1월에 시작한 연재는 회가 거듭될수록 무거운 중압감으로 혹은 기분 좋은 깨달음으로 1년여를 더불어 함께하였다. 수많은 독자의 관심과 격려가 없었다면 어찌 지금까지 올 수가 있었겠는가. 머리 숙여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한다고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렇게 날이 가고 달이 가고 봄·여름·가을을 지나 낙목한천(落木寒天)의 겨울에 이르러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되돌아보면 어떻게 지금까지 올 수가 있었는지 아득하고 힘겨운 여정이었다. 반면 연재를 통해 무언가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면서 전혀 새로운 나로 거듭 태어난 느낌이다. 어쩌면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여정(旅程). 그 자체로 보상이다”라는 말이 맞는가 보다. 그러나 마침은 도리어 새로운 시작의 다른 이름 일게다. 길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어김없이 길은 다시 시작된다. 이 길 위에서 배고픈 채로 우직하게 다만 가고 또한 갈 따름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사람들에게 안녕(Good bye!)이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내게 도리어 안녕(Hello!)이라고 말하는듯하다. 마지막으로 박노해 시인의 ‘다시’라는 시를 모든 이와 함께하고 싶다. 

“희망찬 사람은 / 그 자신이 희망이다 // 길 찾는 사람은 / 그 자신이 새 길이다 // 참 좋은 사람은 //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 사람 속에 들어있다 /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진광 스님 조계종 교육부장 vivachejk@hanmail.net

 

[1517호 / 2019년 12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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