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문무왕의 발원
23. 문무왕의 발원
  • 고명석
  • 승인 2019.12.17 10:44
  • 호수 15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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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생 될지언정 부처님 법 받들어 백성 지키겠노라”

평화로운 세상 원했던 신라 국왕
사천왕사 불사 등 불교 의지하며
삼국통일 뒤 당나라 침략 막아내
죽어서도 ‘나라수호’ 비장한 서원
문무왕은 나라의 안위와 백성을 위해 죽어서도 나라를 수호하려고 했다. 문무대왕릉과 감포 앞바다. 출처=경주시
문무왕은 나라의 안위와 백성을 위해 죽어서도 나라를 수호하려고 했다. 문무대왕릉과 감포 앞바다. 출처=경주시

군주로서 항상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전쟁의 공포에서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으며, 죽어서도 우리국토를 수호하고자 원을 발했던 사람이 문무왕이다. 그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불법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더불어 그는 커다란 봉분보다는 한 줌의 티끌, 바람에 날리는 재로 돌아가 왜국 일본이 우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동해 용왕이 되어 이 국토를 연민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문무왕(文武王, ?∼681)은 태자시절부터 부친 무열왕을 따라 전장을 누볐으며 왕이 돼서는 삼국을 통일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삼국통일을 원했을까? 그 사연을 ‘삼국사기’를 통해 읽어보자.

“지난 날 신라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북에서 쳐들어오고 서에서 침입하여 잠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병사들의 뼈들이 들판에 쌓였고 몸과 머리는 따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선왕(무열왕)께서는 백성들의 참혹함을 불쌍히 여겨 천승(千乘)의 귀중한 신분도 잊고, 바다를 건너 당나라 조정에 들어가 병사를 요청하였다. 이는 본래 두 나라를 평정하여 영원히 싸움을 없애고, 누대에 걸친 원한을 풀며, 백성들의 남은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바람이었다.” 

이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한 나라의 군주로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참혹함에서 백성을 구해내고자 했으며, 물고 물리는 원한을 풀고 평화로운 세상을 이 땅에 구축하고 싶었던 것이다.  
문무왕은 항상 외침을 경계했다. 당나라가 신라마저 넘보려하자, 고구려 유민들과 합심하여 당을 공격하였다. 당이 백제에 설치한 웅진도독부도 공격의 대상이었다. 그러자 당나라 고종은 당에 유학중이던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옥에 가두고 군사 50만을 조련하여 신라를 치려했다. 의상대사가 이 사실을 김인문으로부터 전해 듣고 급히 귀국하여 신라에 알린다. 대왕은 이 소식을 듣고 명랑(明朗) 법사로 하여금 경주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를 창건케 한다. 명랑이 문두루 비법으로 기도하자, 본격적인 전투에 들기 전에 풍랑이 거칠게 일어 당의 선박들은 모두 물속에 빠진다. 이후 또다시 5만의 당나라 군사가 쳐들어왔으나 전과 같은 비법을 써서 배들을 침몰시켰다. 문무왕이 얼마나 불력에 의지해 나라를 지키려 했는지 그 간절한 서원을 사천왕사의 건립을 통해 이루어냈던 것이다. 

당의 분노는 더 악화되어갔다. 김인문과 함께 옥에 갇혔던 박문준(朴文俊)이 당 고종에게 말하길, 사천왕사는 당나라 왕의 축수를 비는 것이라고 거짓으로 고한다. 정말인지 그 사실여부를 알기위해 당에서 사신을 급파하자, 문무왕은 바로 사천왕사 반대편에 망국사를 지어 사신을 꾀어 보낸다. 위기를 모면한 후 그는 강수(强首) 선생에게 김인문을 석방해 달라는 청방인문표(請放仁問表)를 짓게 하여 당 고종을 감화시켜 그를 풀어주도록 한다. 당나라와 정면 대결을 피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현명한 길임을 통감한 문무왕은 비굴해 보일지언정 사대의 예를 다하겠다고 말하고 외교력으로 이를 극복하기에 이른다.

문무왕은 또한 스님들을 극진히 모셨다. 그들이 의상, 명랑, 지의, 경흥, 신혜 등이었다. 원효도 그 한 자리를 차지한다. 낭지와 지통, 광덕과 엄장 등도 지방에서 활약하여 신라사회를 종교적으로 감화시킨다. 특히 문무왕과 의상은 각별했던 듯하다. 그는 의상으로 하여금 부석사를 창건케 했으니 부석사를 비롯한 범어사 등의 창건에서 문무왕의 국가적 도움이 컸을 것이다. 왕은 또 외침을 막으려고 여러 성을 짓는데, 급기야는 경주에 성을 구축하려 마음먹는다. 그때 의상은 왕에게 조언한다.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서 성이라고 하여도 백성들은 넘지 않을 것이며 재앙을 씻어버리고 복이 될 수 있을 것이나, 정교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을 쌓더라도 재해를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의상의 조언대로 성곽 건설을 그만두고 병기와 투구를 무장사(鍪藏寺)에 파묻는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로 삼는다. 평화의 시대를 열겠다는 원력의 천명이다. 문무왕의 뛰어난 점은 죽은 후 자신의 몸을 화장한 후 그 재를 동해에 뿌리라 했던 것과 자신이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서원이다. 먼저 그의 유언을 보자. 

“산과 골짜기는 변해서 바뀌고 사람의 세대도 바뀌어 옮아가니, 오나라 왕(손권)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 모양의 빛나는 향로를 볼 수 있을 것이며, 위나라 임금(조조)이 묻힌 서릉의 망루는 단지 동작이라는 이름만이 전할뿐이다. 지난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는 한 무더기의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 굴을 판다. 헛되이 재물을 쓰는 것은 책에 꾸짖음만 남길 뿐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의 넋을 구원하는 것이 못된다. 가만히 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상하고 아플 뿐이다. 이와 같은 일은 즐거이 행할 바가 아니다. 내가 죽어 열흘이 지나면 고문(庫門) 밖의 뜰에서 인도 의식에 따라서 화장하라.”(‘삼국사기’, 김상현 교수 글)

이 구절에서 문무왕은 삶의 무상함을 비장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자신의 몸을 화장하고 장례식을 간소하게 치르라고 이른다. 역대 신라의 왕들이 화려한 봉분으로 무덤을 삼았음에 비해 그는 삶의 무상 속으로, 그저 자연 속의 한 줌 티끌이요 흙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그냥 돌아가지 않고 원력을 남긴다. 그는 평소에 지의(智義) 법사에게 자신은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서원을 자주 말하였다. 그 사연을 보자.

“‘죽은 후 호국대룡이 되어 불법을 받들어 이 나라를 지키겠소.’ 법사가 아뢴다. ‘용은 축생의 응보일진대 어찌하자는 것입니까?’ 왕이 말한다. ‘나는 세간의 영화를 버린 지가 오래니 거칠게라도 갚을 수 있는 축생이 된다면 이는 내가 품은 마음과 잘 어울리오.’”(‘삼국유사’)

내생에 축생으로 태어나도 상관치 않겠다는 말이다. 차라리 축생으로 태어나 이 세상 사람들의 고통을 짊어지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동해의 용왕이 되어 동해를 지킨다. 대왕암은 그의 산골처다. 그 대왕암 근처에 감은사가 자리 잡고 있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부왕의 은혜를 기려 완성한 절이다. 용이 드나들 수 있도록 금당 밑에 초석을 쌓고 지하 공간을 두었으며, 바다 쪽을 향해 용이 서리게 구멍을 냈다. 원래 이 절은 문무왕이 왜국의 침입을 막으려고 짓기 시작했던 진국사(鎭國寺)였다. 감은사 삼층석탑의 웅혼하고 웅장한 모습을 보고 봉길리 용담 앞바다로 가서 대왕암을 바라볼 일이다. 거기서 왜국으로부터 이 나라를 수호하겠다는 문무왕의 원력을 되새겨 볼 일이다. 푸른 파도가 일렁이고 마음이 일렁이는 그곳.

고명석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 kmss60@naver.com

 

[1517호 / 2019년 12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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