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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㊲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⑯

자장, 당의 선진문물 수용으로 신라의 국난극복 도운 주역

백골관을 주로 수행한 자장
열반경이 사상적 배경 추정 

출가·수계 과정 설화로 처리
제도 미비한 당시 상황 반영
중국 유학을 결심케 한 동기

열반·섭론학 법상에게 사사
3년 간 종남산에 머문 기록

​​​​​​​자장, 당의 황제에게 건의해
중국 의복과 연호, 아홀 사용

삼국유사 권4 자장정율조. 정덕본.
삼국유사 권4 자장정율조. 정덕본.

자장은 ‘중고’기 후반에서 ‘중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만큼 극적인 반전을 거듭한 삶을 영위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생애는 4시기로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이 편리하다. 첫째는 출가와 수행 시기, 둘째는 입당 유학 시기, 셋째는 대승통으로서의 교단 통솔 시기, 넷째는 은퇴 입적 시기 등으로 시기 구분이 가능하다. 

자장은 3등 관계인 소판 무림(武林)의 아들로서 진골 귀족 가운데서도 왕실과 가까운 가문의 출신이었다. 또한 그의 아버지가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한 공덕으로 자장을 얻었고, 석존의 탄일인 4월 8일에 출생하였다는 등의 탄생설화를 남기었고, 누이의 아들 3인이 모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할 때, 독실한 불교신앙의 가문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선종랑(善宗郞)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자장의 출가 동기에 대해서는 일찍이 부모상을 당하여 출가하였다는 설(道宣・一然・閔漬)과 어려서 살생을 좋아하여 매를 놓아 꿩을 잡았는데, 그 꿩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느낀 바 있어서 출가하였다는 설(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 등이 전승되고 있다. 두 종류의 출가동기 가운데 특히 전자는 그의 아버지 무림이 진덕여왕대까지 활약하고 있었던 사실을 보아 신빙성이 의심되고 있다. 자장은 출가한 뒤 격렬한 고행을 하였는데, 특히 백골관(白骨觀, ‘삼국유사’에서는 枯骨觀)을 닦은 것으로 유명하며, 그 사상적 배경은 ‘열반경’으로 이해된다. 자장이 이러한 수행을 거쳐 정식으로 출가를 허락받은 것은 25세 때였다. 당시의 선덕여왕의 출사령(出仕令)에 대하여 “내 하루라도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백년동안 파계를 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라고 거절하여 마침내 출가를 허락받게 되었다. 그 뒤 다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고행 끝에 도리천(忉利天)에서 내려온 두 장부로부터 5계를 받았다고 한다. 출가에서 수계까지의 과정이 다분히 신이한 설화로 처리되고 있는 것은 당시의 불교계에서 출가와 수계의 제도가 아직 정비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 같다. 이러한 불교계의 사정이 자장으로 하여금 중국 유학을 결심하게 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자장은 선덕여왕 7년(638) 당에 가는 사신 신통(神通)을 따라서 문인 승실(僧實) 등 10여인과 함께 해로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문인 10여인을 데리고 갔다는 것을 보면, 자장의 나이는 적어도 30대 후반을 넘긴 중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자장의 입당 연대에 대해서는 ‘속고승전’권24 자장전과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 및 민지의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설에 따른 것이다. ‘삼국사기’와 그를 따른 ‘삼국유사’에서는 그보다 2년 앞선 선덕여왕 5년(636)에 입당하였다고 하였으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입당연대설은 오대산의 순례 행적과 함께 사실에 어긋난 기록이다.

자장은 장안(長安)으로 직행하여 먼저 흥화방(興化坊)의 공관사(空觀寺)를 찾아서 법상(法常 567〜645)으로부터 보살계를 받고 그를 사사하였다. 법상은 열반학자인 담연(曇延)과 섭론종의 북방전파에 공적이 컸던 담천(曇遷)을 사사하였으며, ‘섭대승론의소’ 등 10여종의 저술을 남기었다. 그는 정관 9년(635) 조칙을 받고 공관사의 상좌가 되어 교화에 진력하였는데, 성실・비담・섭론・화엄・십지 등의 학자 수천명이 청법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유학승들이 많이 와서 법을 듣고 돌아가 각각 법장(法匠)이 되었다고 한다. 뒤에 유식학자로 일가를 이룬 원측(圓測 613〜696)도 현장(玄奘)의 귀국에 앞서 법상에게 수학한 적이 있었다. 자장은 법상으로부터 열반학과 섭론학을 전수하게 되었는데, 특히 자장의 문수신앙의 경전적 배경이 ‘문수열반경’이었으며, 다른 한편 자장이 귀국한 뒤 궁중에 초청받아 처음으로 강의한 경전이 ‘섭대승론’이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에 자장은 640년 전반기까지 당태종의 특별한 후대를 받으면서 광덕방(光德坊)의 승광별원(勝光別院)에 머물렀다. 이때 그는 도둑에게 죄를 고백케 하고 계를 주었다거나, 선천적인 장님을 참회케 하여 눈을 뜨게 하는 등의 이적을 보였으며, 이런 감응 때문에 자장에게서 계를 받는 사람들이 하루에 수천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이후 자장은 당 태종에게 글을 올려 허락을 받고 고요한 곳을 찾아 종남산(從南山) 운제사(雲際寺)의 동쪽에 암자를 짓고 642년 후반기까지 머물렀다. 당시 종남산은 장안 인근의 불교성지로서 정토교의 대성자인 선도(善導 613~681), 남산율종의 도선(道宣 596~667), 화엄종의 두순(杜順,557~640)・지엄(智儼 602~668) 등의 각 종파의 명승들과 함께 삼계교(三階敎)의 신행(信行 540~594)의 유적(遺跡)이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자장은 이곳에서 수나라부터 당나라 초기의 다양한 조류의 불교사상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남산율종을 대성시킨 도선과 자장의 관계에 대하여 직접적인 자료는 없으나, 그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두 사람은 서로 알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도선은 624년 이미 종남산에 들어와 강설과 저술에 종사한 적이 있었고, 뒤에 율의 전적을 구하여 상부종(相部宗)의 조사인 법려(法礪)를 찾기도 하였으나, 642년에 다시 종남산에 돌아와 운제사에 머물렀는데, 이때 자장이 그와 교류하면서 계율사상에 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도선의 동문인 도세(道世 ?~668後沒)도 사분율종의 연구서로서 ‘사분율토요(四分律討要)’를 저술하여 도선의 ‘사분율행사초(四分律行事鈔)’와 함께 양대 명저로 평가받았다. 남산율종에서는 ‘사분율행사초’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초가(鈔家)라 부르고, ‘사분율토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요가(要家)라고 불려질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승려의 전기로서 도선은 ‘속고승전’, 도세는 ‘법원주림전(法苑珠林傳)’ 등을 저술하였는데, 이 두 책 모두 자장전을 편입하고 있는 것을 보아 2인 모두 자장과는 특별한 관계였을 것으로 본다. 자장이 선덕여왕 12년(643) 귀국한지 18년 뒤에는 의상(義相 625~702)이 종남산을 찾아서 지엄에게서 화엄종을 전수해 왔다. 

자장은 ‘속고승전’에서 “세 번의 여름이 지나는 동안 항상 이 산에 머물렀다”고 밝힌 바와 같이 3년 동안 종남산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이며, 642년 후반에 이르러 마침내 종남산을 떠나서 다시 장안으로 돌아왔다. 자장은 국가적인 위기를 맞은 본국의 선덕여왕으로부터 귀국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자장은 장안에서 귀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 태종과 황실로부터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아울러 불교경전과 불상, 그리고 불교장엄구 등의 불교 관련의 문물들을 받아왔다. ‘속고승전’ 자장전의 해당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윽고 도읍에 들어가 황제의 위문을 받았는데, 황제가 비단 2백 필을 하사하여 의복 마련에 사용하게 하였다. 정관 17년(643) 본국에서 돌아오기를 요청하자, 당 태종에게 글을 올려 허락을 받았다. 당 태종은 자장을 궁중에 들어오게 하여 납의(衲衣) 한 벌과 채색비단 5백단을 하사하였고, 황태자도 2백단을 하사하였다. 이어서 홍복사(弘福寺)에서 자장을 위하여 큰 법회를 개설하고, 대덕들을 모이게 하고, 8인에게 도첩을 주었다. 또한 태상사(太常寺)에 명하여 구부(九部)를 공양케 하였다. 자장은 본국에 경전과 불상이 보잘 것 없고 온전하지 못하다고 여겨 대장경 1부와 여러 신묘한 불상, 번당(幡幢), 화개(花蓋) 등을 얻었다. 이는 모두 복되고 이롭게 하는 것들로서 싣고 돌아왔다.” 

한편 ‘삼국유사’ 자장정율조에서는 “일찍이 우리 나라의 복장이 중국과 같지 않았으므로 조정에 건의했더니 허락하여 좋다고 하였다. 이에 진덕왕 3년 기유(己酉, 649)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을 입게 하고, 이듬해인 경술(庚戌 650)에 또 정삭(正朔)을 받들어 비로소 영휘(永徽) 연호를 썼다. 이 뒤부터는 중국에 조빙할 때마다 반열이 (외방 나라들의) 윗자리에 있었으니, 자장의 공이었다” 고 하였으며, 또한 같은 책 태종춘추공조에서도 “이 임금 때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衣冠)과 아홀(牙笏)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은 법사 자장이 당나라 황제에게 요청해서 가져온 것이다”라 한 것을 보아 중국의 의관이나 연호의 사용, 그리고 아홀의 사용이 자장의 건의에 의한 사실임을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진덕여왕 2년(648) 김춘추가 당에 사신으로 갔을 때 당 태종에게 장복(章服)을 고쳐 중국의 제도를 따를 것을 요청하자, 당 태종이 내전에서 진귀한 옷을 꺼내 춘추와 그를 따라 온 사람들에게 주었고, 그 다음해 정월에 공식적으로 중국의 의관제도를 착용케 하였다는 사실을 명기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덕여왕 4년(650) 4월 왕명을 내려 진골로서 관직에 있는 사람은 아홀을 갖게 하였다고 하여 김춘추가 중국의 의복이나 아홀의 사용을 주도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추측컨대 자장과 김춘추는 불교승려와 정치인으로써 신분은 달랐지만, 신라의 국가적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친당정책을 추진하고 당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의지에서는 다름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조만간 김춘추가 집권하여 정치개혁을 추진하면서 그 운영원리로 유교를 채택하자, 자장의 불교치국이념과는 갈등을 빚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마침내 자장의 퇴거로 끝을 맺게 되었다. 자장의 은거와 입적과정에 대해서는 뒤에 구체적으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자장은 선덕여왕 12년(643)초 귀국길에 올라 그해 3월 16일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에 도착하였다. 승려의 유학 기간으로서는 5년 남짓의 비교적 짧은 체류였지만, 장안과 종남산을 오가면서 실로 당 불교계의 다양한 불교조류를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불교교학으로서는 열반학과 섭론학, 불교신앙으로서는 문수신앙과 아미타신앙 등을 전수해 왔으며, 특히 계율관을 정립하고 교단을 정비한 것은 ‘중고기불교’의 마지막을 장식한 성과였고, 다음 시기의 ‘중대불교’의 기반을 마련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또한 당의 의복제도와 아홀의 사용, 나아가 당 연호의 사용 등 선진문물제도의 수입에도 자장이 영향을 미쳤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17호 / 2019년 12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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